국제 로비스트, 프랑스·대만을 농락하다

용두사미로 끝난 '대만 프리깃함' 스캔들 조사… 로비스트만 거액 챙길 판

2008-10-29     롤랑피에르 프랭고 | 기자

 

특히 그간 지출된 수 백만 유로의 소송비를 누가 낼 것인가? 옛 톰슨 사를 대신하는 현 탈레스 사가 낼 것인가? 아니면 계약 파기를 이유로 중재 재판소에서 대만 정부로부터 10억 달러의 반환청구 소송을 당한 프랑스 정부가 낼 것인가? 만약 프랑스 정부가 유죄 판결을 선고받게 되면, 결국 수 백만 달러의 벌금을 프랑스 납세자들 말고 과연 누가 지불한단 말인가? 요컨대 톰슨 사의 로비스트였던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앤드루 왕 씨에게 스위스 사법 당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이 각하 결정의 진정한 승리자는 바로 그의 몫이 됐다. 2001년 스위스 법정에서 동결시킨 5억 달러의 커미션을 그는 요청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은밀히 진행된 '프리깃함' 거래 계약

 '대만 프리깃함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이 처음 터진 것은 1980년대 말경이었다. 당시, 대만의 주권을 둘러싸고 타이베이와 베이징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대만인들은 '중국 본토'에 맞서며 꾸준히 무장에 열을 올렸고, 명성이 자자한 프리깃함과 F3000프랑스 해군 경비정 등에 관심을 보였다. 또 항공기, 잠수함, 미사일 등 '메이드 인' 프랑스 군수 장비에도 관심을 쏟았다.
 프랑스의 공식 사절단이 대만을 방문하고, 대만의 해군 대표 사절단이 프랑스 해군 기지창들을 방문했다. 곧 이어 양측은 합의를 봤다. 프랑스 측을 공식적으로 대표한 것은 해양 건설부(DCN)였다. 사업이 마무리될 무렵, 베이징이 대만과의 공식적인 협상, 특히 군 무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이 반대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사업 자체가 '저격' 당한 셈이었다. 1990년 초, 프랑스 정부가 수출 계획을 철회하며 모든 일이 중단됐다. 사태는 일단 그렇게 마무리 된 듯 보였다.
 하지만 양 측은 여전히 서로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이 사업을 새로운 편법으로 포장했다. 즉 공공 분야의 거래가 아닌 민간 사업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 사업에 참여 했던 사람 중 한명은 "모든 관련자들은 이 계약이 중국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정부의 개입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신경을 써야 했다."고 후일 전했다. 그래서 1991년 프리깃함 거래 사업단이 민간 차원으로 바뀌면서, 'DCN'을 대신해서 전자와 방어 시스템 분야의 인터내셔널 그룹인 톰슨 사가 계약자로 선정됐다. 대만 정부를 대신해선 '중국 건함사'(CSBC)가 계약자로 나서게 됐다. 
 
 부정한 뒷거래… '계약, 없던 일로'
 당시 톰슨 그룹은 이미 80년대 이래 대만 시장, 특히 민간시장에 눈독을 들여왔다. 이 회사  내부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 등의 경쟁사와 맞서 특정 프로젝트에 쏟아 부은 자금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중화민국'(대만)을 그 목표이자 전략적 동반자로 여겼다.
 프랑스와 대만의 이런 물밑 거래를 맡게 된 톰슨 그룹의 계열사인 톰슨 CSF 사는 기술 이전과 현지 생산, 그리고 합리적 투자를 통해서 기술협력을 도모하는데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그 후 대표단을 대만에 상주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1980년대 말 당시 사업의 중요성을 반영하듯, 톰슨CSF 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프랑스 군수업체들이 프리깃함 판매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협상은 그렇게 새로운 각도에서 재개됐다. 1991년 8월 31일, 대만 해군의 자랑인 해군 기지창 'CSBC'사와, 프랑스 측의 'DCN'과 'DCNI'(국제 해양 건설부)가 소개한 사업을 총괄한 톰슨 CSF 사 사이에 계약이 체결됐다. 즉, 프리깃함 타입의 해군 함정 '라파이예트' 모델을 25억 2천 569만 2,731달러, 즉 10억 6천만 유로에 판매·구입하기로 한 것이다.1) 
 '브라보' 작전으로 명명된 협상 과정에서 정계 인사들과 현지 톰슨 사 직원들이 깊숙이 개입하게 됐다. 당시 계약서 18조는 외부 로비스트 개입과 커미션을 금지한다고 명기했다. 또  합의된 보장 내용을 위반하면 법적 책임을 묻는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대만이 계약을 취소할 경우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이 걸린 이 계약의 성사를 위해 톰슨CSF 사는 영향력 있는 여러 정보망을 통해 뒷거래를 한 사실이 금세 드러났다. 가장 중요한 정보망은 바로 앤드루 왕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로비 조직이었다.
 주로 대만에서 활동한 그는 1970년대부터는 톰슨CSF 사의 로비스트였으며, 톰슨 그룹의 총수인 고메즈 씨의 측근이었다. 또 다른 정보망은 중국 지도자층 사이에 실세로 알려진 여성, 릴리 리우가 이끄는 것이었다. 계약이 체결된 이후, 다년간 이 두 정보망, 특히 왕 씨가 이끄는 정보망이 개입해 형법에 저촉되는 일들을 저지른 단서들이 여럿 포착됐다. 2001년 6월 20일, 스위스 사법 당국은 프랑스 사법부에 프리깃함 사건과 분명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액의 커미션'의 존재를 알린다. 커미션이 스위스 은행에 10년 전부터 예치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돈은 왕 씨에게 건네진 돈으로서 다양한 인물들, 특히 대만의 고위층 인사들에게 전달할 커미션이었다. 당시 수십 개의 스위스 은행 구좌에 분산 예치된 커미션의 액수가 1억 달러를 웃돌았다.

 양국 간 얽히고 설킨 법적 다툼
 이 사건은 전 프랑스 외무부장관 롤랑 뒤마가 '레트로-커미션'2)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발언 때문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발언을 계기로 2001년 6월 22일 파리에서 계약 체결을 빌미로 자행된 회사 자금 유용과 은닉에 대한 법적 심리가 열렸다.
 얼마 후 톰슨CSF 사를 대신했던 탈레스 사가 1998년 5월 형사소송을 제기했다. 8월 26일에는 대만이 같은 방식으로 형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파리 중재재판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대만은 '브라보' 계약이 금지하고 있는 커미션을 지불했다고 폭로했다. 그 후 8월 22일, 대만은 59억 9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배상 중재절차에 가입했다. 탈레스 사는 그 중재절차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타이베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절차를 믿고 보상금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적 심리의 목적은 회사 기금 유용이란 명목으로, 형법상 유일하게 저촉되는 '레트로-커미션'의 존재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 씨가 주도하는 조직망이 본질적으로 문제될 만 한 것은 '레트로-커미션' 수뢰 혐의였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뤄 보아, 계약 당시 지불된 거액의 커미션은 '레트로-커미션'의 존재를 확실하게 해주는 단서다. '브라보' 프로젝트(박스 기사 참조) 차원에서 왕 씨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한 돈을, 스위스 당국이 압류하면서 처음으로 프랑스는 그 액수에 관심을 표명했다. 게다가 1991년 4월, 프랑스 수상 미셸 로카르의 집무실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프리깃함 판매 총액이 무려 19억 유로였다. 그런데 결국 계약서상엔 24억 유로를 상회하는 액수가 명시되어 있었다. 5억 유로의 차이가 생긴 셈이다.
 톰슨과 탈레스 사측은 이 엄청난 차이를 설명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법정에서 고메즈 씨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 거액을 챙겼을까. 베이징의 공산당 지도자들일까, 아니면 대만의 여당인 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일까. 혹은 파리의 프랑스 정치인들일까. 이들 모두일까. 혹은 프랑스에 반환했을까. 온갖 설이 난무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믿을 만한 정보'라며 사회당 소속의 전 국방부장관 알랭 리카르가 커미션의 일부를 프랑스가 돌려 받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다. 톰슨CSF 사의 한 고위 관계자가 지적한 것처럼 "만약 결정권자들이 가격을 추가 부담했다면, 그것은 그 돈을 커미션의 일부로 되돌려 받아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라면,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앤드루 왕'이 부정한 로비의 핵심
 대만 당국도 같은 시각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프리깃함의 판매가가 상승한 것은 사실상 왕 씨가 대만의 해군 사절단을 상대로 자행한 뇌물 청탁 때문이라 여겼다. 그 와중에 대만 당국은 고위직 공무원 쿠오 리-한 씨를 매수한 죄로 톰슨CSF 사의 한 로비스트를 기소했다. 그 후 쿠오 리-한 씨는 그 사건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 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또 '브라보' 문서를 담당했던 대만 해군장교 친 펑인 씨가 1993년 12월 살해되는 사건도 생겼다(박스기사 참조).
 쿠오 씨가 체포된 것은 1993년 12월 17일. 그로부터 사흘 후 왕 씨는 가족과 함께 대만을 떠났다. 부정부패, 군사기밀 누설 그리고 계획 살인 등의 혐의로 국제적으로 그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왕 씨와 그의 가족은 톰슨CSF 사의 로비스트와 고메즈 씨의 도움으로 위조 여권을 만들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과정에서 고메즈 씨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대만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톰슨 그룹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왕 씨는 미국, 런던, 파리 등 여러 곳에 주거지를 두고 있어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2005년 다시 왕 씨 부자에 대해 톰슨CSF 사(그 무렵 탈레스로 이름이 바뀜) 3)에 피해를 입히고 회사 자금을 유용해 은닉한 죄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수사는 스위스 사법부가 애초 손댄 부분부터 시작됐다. 수사를 통해 톰슨CSF 사를 위해 영향력 있는 정보망을 왕 씨가 진두 지휘했다는 다양한 단서들이 확보됐다. 이를 토대로 왕 씨를 비롯한 그 일가족들에게 흘러 들어간 자금이 약 5억 달러(3억 2천만 유로)라고 스위스 사법 당국은 추정 발표했다.

 완고한 기밀문서 '조사의 결정적 장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왕 씨의 정보망이 연루된 부패사건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러나  대만이나 베이징에 상주하는 외국인 로비스트들이 직접 저지른 부정부패로 치부하기에는 커미션의 액수가 너무 컸다. 여러 정황들은 자금(그 유명한 레트로-커미션)의 일부가 또 다른 수혜자들 수중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 자들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시도한 모든 조사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조사 대상이 될 만한 서류마다 모두 기밀로 분류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커미션 계약, 세관 신고서, 은행 잔고 증명서, 컴퓨터 파일, 컴퓨터 데이터 등등이 모두 그랬다. 관련 당국은 이들을 기밀 문서에서 해제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국가 이익과 나라 밖에서 책무를 준수하는데 심각한 방식으로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된다"고 완강한 자세를 보였다.
 2002년 4월 8일, 예심 재판관들은 재경부 장관을 제소해 그가 톰슨-탈레스 사의 커미션 계약문서를 기밀문서에서 해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브라보' 계약 문서에 대한 모든 보호 조치를 풀고, 이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또 그들은 "오로지 대만 권력층에 청탁할 목적으로 사용한 커미션에 관한 조사를 위한 것으로 군사기밀도 아니다"고 요구했다. 4월 17일 재경부 장관 로랑 파비우스는 우편을 통해, 'CCSDN'(국기기밀문서 보호 자문위원회)에 제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6월 6일 위원회는 불가 판정을 내렸다. 6월 19일 장관은 'CCSDN'의 판단에 따라, 자료 기밀 문서 해제를 불허한다고 밝혔다.
 
 무죄가 된 '앤드루 왕', 거액 챙길 듯
 결국 예심 재판관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보고 싶었던 문서에 접근조차 못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우파건 좌파건 재경부 장관들(로랑 파비우스, 프랑시스 메르 그리고 티에르 브르통) 모두 기밀문서 해제에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게다가 톰슨CSF 사 간부와 경영진에 대한 수사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한 채 답보 상태였고, 철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왕 씨와 그의 아들 부뤼노, 그리고 톰슨CSF 사의 경영자, 장-클로드 데스주에게 각하 결정이 내려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셈이다.
 그래서 법조계에선 "2001년 스위스 인들이 프랑스 인들을 사건에 개입시켰을 당시와 똑같은, 초동 수사 단계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이제 프랑스는 방관자가 되고, 스위스 사법부가 재수사를 펼쳐야 할 실정이다. 수사의 초점은 3억 2천만 유로에 달하는 커미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 지침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은 그 돈이 은행에 압류되어 있지만, 왕 씨와 그의 변호사들은 그 돈을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측은 각하 결정을 얻어 내며 소송에서 승소를 했으나, 이제 그 돈을 요구하는 대만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됐다.
 만약 대만이 스위스에 있는 자금을 돌려받게 되면, 중재절차는 당연히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면 톰슨CSF 사(탈레스 사)와 프랑스 정부도 면죄부를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스위스가 왕 씨에게 3억 2천만 유로를 돌려주면, 중재재판소는 프랑스 정부에게 그 엄청난 금액을 변제하라는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매우 부도덕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대만 사법부에 의해 인 씨 살해범으로 기고 있는 왕 씨가 과연 3억 2천만 유로의 커미션을 챙기게 될 것인가. 그럴 경우 또 다시 프랑스 납세자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인가.

번역 | 최혜경

 

'스위스 계좌·차명계좌'로 뒷거래와 상납

 2001년 6월 21일은 '프리깃함' 사건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날이다. 그 날 답보 상태에 빠진 프랑스 사법부를 돕기 위해 스위스 당국은 프리깃함 거래와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1억 달러(약 7천500만 유로)를 상회하는 금액이 '앤드루 왕'이란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있다고 통보한다. 돈과 계좌가 벌써 스위스 은행 시스템 속에 10년째 은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힘을 얻은 프랑스 사법 당국은 르노 반 루임베크와 크자비에르 시메오니, 두 법관을 통해 2005년까지 대략 12개 항목에서 사법적인 공조를 갖자고 스위스 측에 요청했다. 이는  왕 씨 가족의 계좌를 통해 거래되었을 수도 있는 '레트로-커미션'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 었다. 게다가 스위스 사법부가 프랑스에 건넨 문건 중에는 톰슨CSF 사가 스위스로 이체한 은행 잔고 증명서도 있다. 왕 씨가 카이만 군도와 영국 버진 군도 등 국외에 설립한 회사들로 흘러 들어간 돈이었다. 대만의 톰슨CSF 사는 '프리깃'함 판매 계약서 18조항에 분명 커미션을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스위스 사법부는 "톰슨 사는 왕 씨가 소유한 유로맥스사와 미들배리사에 약 5억 2천만 달러를 이체했고, 1991년과 1999년 사이에만 2억 900만 달러, 1992년과 2000년 사이에는 또 다른 회사 네 곳에 약 3억 9천700만 달러가 이체 됐다"고 밝혔다. 그 총액이 대략 9억 2천만 달러에 이르고, 그 중 5억 2천만 달러가 프리깃함 계약과 연루된 커미션이었다.
 이 수치는 스위스 대형은행들(UBS, Bank Leu AG, HSBC, Bank Julius Baer)에 개설된 63개 회사의 은행 문건을 분석한 결과다. 이 계좌들은 왕 씨 일가의 것이거나, 혹은 이들의 차명계좌들이었다. 이에 스위스 사법당국은 그 때까지 계좌에 예치되어 있던 돈을 압류했다. 2000년과 2003년 사이에 조사된 66개 계좌 중에서 33개의 계좌에서 차압한 돈이 6억 3천300만 달러, 즉 4억 유로에 달했다.
 수사 결과, 1991년과 1998년 사이에 문제가 된 왕 씨의 국외 회사들이 파리 소재 여러 은행들(Indosuez, BNP Paribas, BFCE, Credit agricole)에서 대출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스위스 사법당국은 "1991년과 1998년 사이에 왕 씨 부부가 챙긴 액수가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강조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프랑스의 여러 은행들이 사건과 관련된 문건들을 사법부에 건네지 않기 위해 기밀 문서 운운했다는게 정설이 되고 있다.
 특히 유로맥스사와 미들배리사의 계좌에 예치된 자금은 왕 씨 가족 소유의 계좌와 차명계좌를 통해 거래되거나, 계좌 이체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달러나 혹은 프랑스 프랑으로 이체된 것이다.

꼬리를 문 의문사

'프리깃함'관련자들… 타살 의혹 불구, 미온적 수사로'자살'결론

 경악스런 세 명의 죽음이 프리깃함 사건을 비극적인 형사사건으로 몰고 갔다. 첫 번째 희생자는 프랑스 정부와 '브라보' 계약 협상 때 관여했던 장교, 칭-펑 인 씨다.
 대만 당국은 앤드루 왕 씨가 스위스에 개설된 구좌에 수 백만 달러를 예치시키며 그를 매수했다고 보고 있다. 왕 씨는 같은 계약 문서 담당자였던 또 다른 고위직 공무원, 쿠오-리 한 씨도 똑 같은 방식으로 매수했다. 1993년 12월 8일 인은 백주에 기습 살해됐다. 대만 당국은 그가 죽기 전 그의 동료 쿠오와, 그리고 왕 씨와 여러 번에 걸쳐 전화 통화를 했다고 밝혔다. 그 후 쿠오-리 한 씨는 부정부패와 반역죄가 인정되어 군사재판소로부터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프랑스 예심재판관의 조사 과정에서 인 씨의 미망인은 남편이 프리깃함 사건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껴 "프랑스인들에 대한 폭로를 준비 중"이었다고 증언했다.
 인씨 부인은 자신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문 기사 한 토막을 소개했다. 거기에는 "톰슨 사가 인 씨 암살사건 뿐만 아니라, '레트로-커미션'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는 대만 대통령  자문위원의 주장이 담겨 있다.
 7년 뒤인 2000년 10월 10일, 'DGSE'(해외안전본부 지휘부)요원, 티에리 엥보가 파리 소재 자신의 집 5층 아파트에서 추락사했다. 'DGSE'의 옛 국장이었던 르네 엥보 장군의 아들, 티에리 엥보는 1991년 대만에 파견되어, 프랑스의 경제문서, 특히 프리깃함 판매에 관한 문건을 관장했었다.
 부친 엥보 장군은, 아들이 톰슨 사의 중역들과 경영진들은 물론, 계약을 빌미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프랑스와 대만의 고위직 관리들을 폭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그들을 두고 "아주 못된 불량배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또 다른 증인은 티에리 엥보가 죽기 전날 사건을 세상에 폭로할 목적으로 한 기자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대만과 파리에서, 루머와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으나, 프랑스 사법부는 아무런 혐의점도 밝혀내지 못했다. 세찬 '외풍' 탓에 덧문을 닫았음에도 분명한데도 불구, 부검 결과 티에리 엥보가 사고로 추락사 했다고 결론지었다. 여러 증인들이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일부에선 타살이라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티에리 엥보의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에 얽힌 어떤 의혹도 제기하지 않았다.
 '브라보' 작전과 연루된 예기치 못한 세 번째 죽음은, 2001년 5월 18일에 발생한 톰슨 사의 옛 엔지니어 작크 모리송의 사망 사건이다. 그것 또한 우연의 일치일까? 그 역시 창문으로 뛰어 내렸다고 주장한다. 우울증과 약물 중독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는 1990년 프리깃함 사업 때문에 대만에 파견된 바 있다. 이듬해 익명의 제보자가 르노 반 루임베크 예심 재판관에게 자크 모리송이 "평소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고 제보해 왔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도 사법부는 정황상 그가 자살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1) 프리깃함(라파이예트) : 3,600톤급의 해군함정. 길이 125미터, 승무원 160명, 미사일 장착.
2) 레트로-커미션은 초기 목적과 달리 쓰인 공식 커미션(여기서는 로비 자금)으로서 그 돈을 받을 권리가 없는 제 3자가 챙긴 커미션을 말함.
3) 예심 재판관은 앤드루 왕 씨를 '공공 분야를 담당하는 외국인 로비스트 매수 죄'로 기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프리깃함 계약은 1991년에 체결되었지만, 이 범죄에 대한 법은 그 이후인 2000년 9월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