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전성시대

2017-09-28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러시아 혁명을 다시 읽다

1917년 러시아를 뒤흔든 ‘지각변동’은 사회혁명이라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당시 사회혁명을 거칠게 밀어붙인 것은 ‘해방의 기획에는 무엇보다 대중교육(8면 참조)이 선행해야 한다’고 믿는 정치세력, 볼셰비키파였다. ‘전시 공산주의’로 더욱 강화된 볼셰비키의 독재적 행태는 이미 레닌의 시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장 핵심이 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민중과 함께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민중의 이름으로 행동할 것인가?(11면 참조) 10월 혁명은 세계를 뒤흔드는 동시에 예술 역시 전복시켰다. 이로써 예술이 지닌 목적도 뒤바뀌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 기대했던 반향은 일어나지 않았고, 혁명의 경제, 외교적 물줄기는 새로운 방향을 틀게 된다. 비록 인터내셔널리즘의 바람이 소비에트 모델의 좌초로 완전히 잠잠해진 듯 보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터내셔널리즘을 촉발했던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있다.

소련. 일명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이는 본래 영토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른바 ‘세계혁명’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소련의 경계는 단순히 민중봉기에 성공한 러시아 국경 내에 그치지 않았다. 민중봉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다른 지역들까지도 널리 포괄했다. 소련의 거대한 붉은 국기는 왼쪽 상단 귀퉁이에 새로운 나라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었다. 이 새로운 나라의 국가가 바로 ‘인터내셔널가’였다.

분명 소련의 국부는 인터셔널리스트(국제주의자)였다. 소련을 세운 레닌은 직업 혁명가로서 살았던 인생의 대부분을 망명지(뮌헨, 런던, 제네바, 파리, 크라쿠프, 취리히, 헬싱키 등)에서 보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노동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토론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1917년 4월 그는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폐위된 조국 러시아로 귀향했다. 당시 그를 실은 기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절정이던 와중에 독일의 영토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 때에도 사람들은 ‘라 마르세예즈’ 노래를 열창했다. 레닌의 동지들에게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프랑스혁명은 여러 면에서 제정러시아의 역사보다는 레닌의 글에 더 자주 언급되곤 한다. 사실상 레닌의 머릿속에서는 한시도 “민주주의 혁명과 군주제 지지자들에 대한 저항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본보기”(1)였던 자코뱅파 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혁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의, 파리코뮌보다 더 오래 혁명을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곳에, 민족주의가 자리할 틈은 없었다.

이 볼셰비키 지도자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1914년 이후 거의 모든 유럽의 조합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외세에 맞선 ‘신성한 동맹’에 동참했지만, 그와 달리 자신의 당은 “차르 군주정의 패배를 외치며, 탐욕적인 두 제국주의 세력 간의 전쟁을 비판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자마자 “모든 민중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고, “독일 등의 여러 국가에서 조속히 혁명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2)고 다짐했다. 역시나 인터내셔널리즘(국제주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노동자계층이 정작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한 어떤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표방한 어느 정당이 로마노프 왕조의 갑작스런 몰락과 이를 대체할 권력의 공백을 틈타 국가 시스템을 장악했다. 이것은 훗날 중대한 영향으로 작용하는 ‘최고의 역설’이기도 했다.(3) 처음에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더욱 강건하고, 더욱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사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선진국에서 바통을 이어 받아 그들을 구원하고 구제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간문제였다. 몇 주, 기껏해야 몇 달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무장봉기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레닌은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러시아는 금방이라도 혁명이 터질 듯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내일 당장 세계혁명의 동이 트고, 역사적 대전환이 시작될 것만 같은 의심할 수 없는 징후들”이 곳곳에 감지됐다. 그러니 이제 첫 포를 쏘는 것은 볼셰비키의 몫이었다. 그러면 곧이어 다른 나라들이 바통을 이어받으리라.

그러나 러시아의 뒤를 이어 베를린, 뮌헨,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무참히 진압됐다. 러시아의 새 정권은 “모든 교전국에 무병합, 무배상을 원칙으로 한 조속한 강화 조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전쟁을 지속했다. 이미 그들은 러시아 병사들이 개죽음을 면할 길 없는 이 전쟁에 신물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젊은 국가 러시아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영토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말하자면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은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유럽에 혁명의 바람이 몰아치리라. 그러나 정작 기다리던 혁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반혁명의 움직임만 더욱 거세졌다. 레닌은 “모든 자본가들에 대립한 노동자들의 평화”를 요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대신 10개 군대(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세르비아, 핀란드, 루마니아, 터키, 그리스, 일본)가 오히려 구질서를 복원하겠다는 미명 아래 ‘백군’을 지원하러 파병됐다.

1921년, ‘혁명 러시아’는 이 새로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됐다. 그러나 피해는 불가피했다. 러시아는 강대국들의 적대를 피해갈 수 없었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을 대놓고 전복하려 하는 그들을 더욱 적대적으로 대했다. 10월 이후, 자본은 지구상에서 가장 드넓은 영토에 대해 누리던 권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 정도 천지개벽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알베르 롱드르가 1920년 글에서 거칠고 위협적인 입에 칼을 문 유태인 세계주의자라고 묘사한 공산주의자 레닌은 단순히 러시아 일국의 특별한 현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방역선을 치고 엄격한 검역을 통해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아니었다. 레닌이라는 존재는 내부의 적인 동시에, 모스크바를 수도로 삼은 인터내셔널의 잘 훈련된 보병이자, 사회혁명의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여기, 지금,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말이다.

위협이라고 했는가?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기도 했다. 비록 그의 여정에는 수많은 피 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희망의 지속력은 강했다. 철학자이자 노동운동가 시몬느 베이유는 1934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독재자들이 마르크스를 숭배하며 그의 명성을 더럽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스탈린의 숙청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볼셰비키 지도자의 70%가 총살되는 참극을 낳았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둘러싼 신화는 상당히 전복적인 힘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설령 작업반장에게 쫓겨나는 처지가 되더라도 과거 붉은 군대와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영광된 역사가 있었음을 마음에 되새기며 여전히 자긍심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혁명의 역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아무리 모호한 역사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홀로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자신에게 마음 속 깊이 되새길 수 있는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4)

변치 않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아무리 왜곡된 형태일지라도, 한 세기의 역사에 획을 그은 가장 중대한 정치 운동, 전 세계 인구의 1/3을 통치했던 한 사회시스템이 세계 곳곳에서 차지했던 의미다. 세계 도처에서 그것은 자본주의 소유제의 철폐이자, 동시에 교육의 발전, 무상 교육의 실시, 여성의 해방, 대부분의 반식민주의 투쟁과 그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에 대한 외교적, 군사적,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의미했다. 물론 “서민층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특별한 시도”였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동안 부르주아지의 대표에게만 허락되던 권력기구에 노동자와 농민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고자 했으니 말이다.(5)

그런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서로 현대의 사회관계망에 비견될 정도로, 각종 언어와 종교, 인종, 국경을 초월한 국제주의 관계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시몬느 베이유는 마그니토고르스크를 떠올리며 밝은 희망으로 가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한 공장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희망은 1930년대 급진주의와 세속주의를 표방한 프랑스는 물론, 개신교를 믿는 독일, 유교를 숭상하는 중국, 이슬람을 숭배하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말하자면 담배꽁초를 줍는 쿠바의 노동자만큼이나, 양털을 깎는 호주의 노동자에게서도, 모두 똑같은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6) 대체 오늘날 이 정도의 힘을 갖는 정치 운동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단편 <칠레 산티아고의 군인 파차예프>에서 1965년 12월 미국과 싸우는 베트남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참여했던 한 연대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독자는 어느새 작가가 칠레 공산당의 모리스 토레즈 조직의 일원이었음을, 그리고 그의 동료는 응우옌 반 쪼이 조직의 일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두 친구는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이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 토론을 벌이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두마에서 볼셰비키와 멘체비키가 러시아 민중에게 봉기를 호소하기 전 무려 72시간 동안이나 열띤 토론을 벌였던 사실을 회고한다. 또 소녀들을 꼬이기 위해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됐는가>를 같이 읽자고 권하거나 혹은 소비에트 영화를 함께 보러 가자고 청하기도 한다. 사실상 이런 식의 인터내셔널과 관련한 일화는 수천 가지, 아니 수백 가지에 달한다.

모스크바의 다음은 다보스인 것일까? 소련의 해체는 또 다른 보편주의(유니버설리즘)의 승리를 앞당겼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와는 전혀 상반되는 성격의 승리, 바로 소유계급의 승리였다. 그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변화였는지, 2000년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도 한 훌륭한 논문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종교개혁 이후 사상 처음으로 서구 사상계에서는 대립 구도가, 다시 말해 세계관의 경쟁이 완전히 사라졌다. 각종 종교 교리를 제외한다면, 이제 전 세계적으로 세계관의 대립이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 원리를 아우르는 총체적 이론인 신자유주의가 혼자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7)

이 현상은 요란한 결과를 몰고 왔다. 가령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브랑코 밀라노비치에 따르면, 1988년 이후 전 세계적인 부의 증가로 양극화가 더욱 심화됐다. 1914년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과거 회귀 현상이 전혀 우연에 의한 결과라고는 보지 않는다. “서민층이 마침내 전쟁의 주범이 부유층임을 깨닫고 환상에서 깨어나면서 더욱 거세졌던 러시아 혁명의 압력, 사회주의 운동과 조합주의 운동의 압력이 결국엔 재분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한 셈이다.”(8) 누진적 조세제도, 노동법, 하루 8시간 노동제, 사회보장, 부유층의 손에 전적으로 국가의 고삐를 쥐어주지 않으려는 노력.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10월 혁명이라는 전례가 혁명의 재발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일단 모든 혁명의 기운을 몰아내고 나자, 이제 그 반대급부로 ‘행복한 세계화’라는 불행한 현상들이 증가했다. 가령 과거 획득한 사회적 권리의 해체, 서구식 ‘내정간섭권’,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공산주의·아나키즘·자주관리 등의 모든 혁명적 기획의 폄하가 대표적인 예다.

소련이 종말을 고하기 몇 주 전, 중도좌파 성향의 한 아카데미 회원 출신의 프랑스인 변호사는 1991년 8월 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눈부신 선언을 우울한 선언으로 고쳐 썼다. “만일 공산주의가 사회주의를 견제하며 언제든 사회주의를 대체할 태세로 바짝 뒤쫓지만 않았어도, 사회주의는 일종의 급진주의에 그쳤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 저 고집불통의 광신자들, 지칠 줄 모르는 파업 가담자들, 무질서를 비웃으며 공장과 거리를 점거한 점령자들, 혁명을 꿈꾸며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하던 불굴의 인간들, 역사의 물줄기를 막아서는 자본주의가 편히 잠들기를 방해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 우리는 저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9)

‘공산주의의 종말’은 러시아 혁명 이후 인터내셔널 좌파의 두 사조를 둘러싼 중대한 논의에서 결국 승자가 누구인지를 판가름했다. 두 주인공 가운데 한 쪽의 패배는 곧 상대방의 승리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 요란한 막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민주의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겨울궁전 점거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공교롭게도 이 개량주의 사조는 엄청난 시련기를 겪고 있다. 얼마 전 클린턴 왕조가 축출되는가 하면, 토니 블레어, 펠리페 곤잘레스, 게하르트 슈뢰더 등은 비즈니스맨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프랑수아 올랑드는 또 어떤가? 한편 이들의 국가에서는(그리고 또 다른 국가들에서도) 오늘날 일종의 조급하고 급진적인 경향이 재출현하고 있다.

흡사 엑소시즘 의식을 방불케 한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식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사회주의자 미셸 로카르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위험하다. 혁명이 없다고 그리 나쁠 것도 없다.”(10) 그로부터 어느덧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야흐로 세계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유령들이 다시 돌아왔다. 방부처리 된 죽은 레닌은 지금도 여전히 몸을 뒤척이며 도무지 편안한 영면에 들지를 못하고 있다.  


글·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레닌, 1917년 6월 24일. Victor Serge의 <레닌>(1924)에서 인용.
(2) 레닌, <La Maladie infantile du communisme(le gauchisme)(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1920년.
(3) Moshe Lewin, <Le Siècle soviétique(소비에트 시대)>, Fayard-Le Monde diplomatique, 파리, 2003, Eric Hobsbawm, <Marx et l'histoire(마르크스와 역사)>, Demopolis, 파리, 2009년.
(4) Simone Weil, ‘Méditations sur l'obéissance et la liberté(복종과 자유에 대한 성찰)’, <Oeuvres complètes(전집)>, 제2권, Ecrits historiques et politiques , Gallimard, 파리, 1991년.
(5) Julian Mischi, <Le Communisme désarmé. Le PCF et les classes populaires depuis les années 1970(무장해제된 공산주의. 1970년대 이후의 프랑스공산당과 서민층)>, Agone, 마르세유, 2014년.
(6) Eric Hobsbawn, <L'Age des extremes(극단의 시대)>, Complexe-Le Monde diplomatique, 브뤼셀-파리, 1999년.
(7) Perry Anderson, 'Renewals', <New Left Review>, 런던, 2000년 1월.
(8) <르몽드>, 2016년 7월 21일.
(9) Jean-Denis Bredin, ‘Est-il permis?(가능한가?)’, <르몽드>, 1991년 8월 31일.
(10) Eric Hobsbawm, <Aux armes, historiens. Deux siècles d'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역사학자들이여 무기를 들라. 2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사)>, La Découverte, 파리,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