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권력쟁취에 나선 빈곤층

2017-09-28     에릭 오노블 | 역사학자

전쟁으로 황폐화 돼 굶주린 배를 움켜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파는 사회혁명에 동참할 힘을 갖춘 유일한 조직적 세력이었다. 당시 무엇보다 계도의 대상으로 통하던 민중들이 스스로 점차 과격해지면서, 볼셰비키 세력의 급진성도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1917년 전쟁 3년째에 접어들자, 애국심에 고취됐던 제정러시아의 병사들은 어느새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한 병사는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부자들이 이렇게 잘 사는지 몰랐어요. 전선에 나가 싸우는 동안 부자들에게서 징발한 집에 머물렀는데 신세계가 따로 없더군요. 바닥이며 벽이며 사방이 죄다 부자들이 가진 근사하고 비싼 물건들로 가득하고요. 별 쓸모 없어 보이는 자질구레한 장식물들이지만, 나도 이제는 그렇게 살렵니다. 바퀴벌레와는 영영 이별하고요.”(1)

총사령관에 오른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요승’이라 불린 신비주의자 라스푸틴의 내정간섭을 방임하며 황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러시아는 모든 경제력을 전쟁에 소모하는 바람에 국가기능이 마비됐다. 1914년 물가가 두 배로 급등했고, 정권은 농민이 수확한 작물을 징발해 도시나 전선에 보급했다. 1917년 3월 8일(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2월 27일) 노동자 시위는 파업과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역주)의 무장봉기 사태로 이어졌다. 상류층에서 하류층에 이르기까지 정권을 옹호하는 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차르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당시 러시아를 대표하는 기구로는 두마가 유일했다. 1912년 불공정한 법률에 따라 구성된 의회인 두마는 카데트(입헌민주주의자-역주)를 다수로 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의 목표는 “법치, 평등, 자유의 초석”을 다지는 동시에, “승리의 순간까지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었다.(2)

정부 인사가 새롭게 물갈이됐지만, 민중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신뢰를 잃고 비틀거리는 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기구가 필요했다.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경찰은 민중이 결성한 치안조직으로 대체됐다. 실패로 돌아간 지난 1905년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노동자 대표 위원회(소비에트)가 조직됐다. 이렇게 뽑힌 노동자 대표들이 순식간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대의원을 충원했다. 소비에트는 현 권력기구의 부당성을 공격하며 군부대마다 “서둘러 병사 대표를 선출”할 것을 호소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소비에트 조직이 결성됐다. 유서깊은 혁명의 역사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모든 정파의 투사들이 소비에트 조직에 동참했다. 1881년 폭탄테러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기도 한, 급진주의 조직 ‘인민의 의지’가 혁명에 실패한 이후, 혁명가들은 민중과 결속을 도모했다. 그들은 파업과 토지 점거에 동참하고, 1905년 봉기 이후로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모든 시위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민주공화국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혁명투사 출신의 운동가들은 사회혁명당의 구호처럼, “투쟁을 통해서만 권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노동자 대표단이 총독에게 지난 2월 초 정치범으로 체포된 운동가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한 사람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의 요구에 총독은 3일째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소식이 없지만, 정치범을 석방해줄 테니, 함께 손잡고 잘 해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를로프는 총독에게 “반동세력이 우산으로 마구 노동자의 눈을 후벼 파던 프랑스의 사례는 우리 노동자가 혁명가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대답했다.(3) 마치 실제 경험인 양 1871년 파리코뮌의 예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오를로프’라는 이름의 노동자 대표는 사실상 러시아 사회민주당(POSDR)의 ‘온건’ 세력인 멘셰비키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이 온건세력이 혁명의 물줄기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혁명투사들의 급진화와 함께, 민중도 급진화 경향을 보였다. 권력에 대한 불신은 민중의 자율적 봉기를 부추겼다. 프랑스인 기자 세르주 드 셰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모든 사회계층, 모든 동업조합, 정치적 성향과 직업을 총망라한 모든 이들이 앞다퉈 거칠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맨 앞줄로 나가 자신들의 특별한 요구를 주장했다. ‘다 함께 단결하라!’, ‘다 함께 봉기하라!’ 이 구호가 러시아 전역에 울려 퍼졌다.”(4)

임시정부는 여성과 소수민족처럼 그동안 러시아제정에서 배척받던 계층에게 곧바로 평등한 시민의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금세 이 약속은 현실로 실현했다. 반면 정부는 전쟁이라는 외부적 위험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국내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지만, 이와 관련한 모든 중요사안은 다른 세 곳, 바로 공장(5)과 군, 그리고 촌락에서 결정됐다. 그곳에는 사회적 긴장이 팽배했다. 3월, 하리코프의 기관차 공장에서는 “노동자 대표 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해고를 결정하자”는 요구가 제기됐다. 3월 말, 노동자 대표 위원회에 의해 생산관리위원회가 선출됐다. 6월, 사장은 작업반장에게 “위원회에는 절대 어떤 정보도 주지 말고, 무슨 자료를 보여주거나 전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 간부 노동자는 당시 키예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엔지니어나 작업반장의 역할은 점점 축소됐다. (…) 종종 ‘반혁명 성향’을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노동자 총회는 사장을 쫓아냈다.”

10월 초, 병사들이 서투른 손길로 탄원서를 작성했다. “우리는 지금도 귀 임시정부에 조속한 종전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만일 케렌스키 동지가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곧장 총을 든 채 전장을 이탈해 후방으로 달려가 당신네 부르주아지를 박살내겠소.”(6) 실상 정부는 지난 7월 민중에게 적극적 개혁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총리로 임명한 터였다. 10월 중순, 페트로그라드의 한 마을에서 농민 총회가 열렸다. 그들은 “소수자본가의 이익을 충족해주기 위한 광적인 전쟁”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경제파탄에 더해 “이런 상황은 국가 전체를 최악의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마을 주민들은 “민주적이고 진실성 있는 종전절차”와 더불어, 토지·자본·생산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통제”를 요구했다.(7) 이런 투쟁은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2월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좌파 세력, 소비에트는 어느새 진정한 반정부 세력으로 돌변했다. 사회 혁명은 한 가족의 가장, 국가관료, 기업가, 지주, 장교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을 상징하는 자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비단 수천 명의 지주와 자본가만이 아니라 지식인마저 공포에 벌벌 떨었다. 이제 안경은 ‘부르주이(Bourjoui)’, 다시 말해 치욕스러운 부르주아를 의미하는 징표로 둔갑했다. 인텔리겐차는 인민의 의식을 지도하는 인도자이자 교육자라는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작가 이반 부닌은 그동안 하녀에게 원고조각을 읽게 하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술에 취한 병사로부터 ‘폭군’, ‘창녀 자식’으로 취급받았다!(8) 지난 2월 혁명의 열기에 고무됐던 오데사의 한 젊은 여성 음악가는 11월이 되자 ‘동지들’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나는 점점 더 우경화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군주제마저 지지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던 내가.” 그리고 그녀는 2개월 뒤 장교들을 공격한 한 “새파랗게 젊은 유대인 청년”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9)

인텔리겐차와 민중 사이의 반목은 점점 더 깊어졌다.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분석했다. “대체 뭘 기대한 거요? 혁명이 무슨 동화라도 되는 줄 알았소? 혁명이라는 창조 행위가 중간에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날 줄 알았던 거요? 민중이 그저 한낱 순한 양 같을 줄 알았소? (…)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노동자’와 ‘새하얀 손을 가진 자’, ‘학식 있는 자’와 ‘무지한 자’, 인텔리겐차와 민중 사이에 저 유서 깊은 증오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은 채’ 한순간에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거요?”(10)

지식인층의 발밑에 사회적 심연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그들을 집어삼킬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 지식인층 중에는 좌파정당의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사회혁명당원은 전쟁을 지속하는 데 찬성하며,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제헌의회 구성 등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멘셰비키도 그들의 뜻에 동조했다. 멘셰비키는 민주공화국이라는 틀 속에서 점진적으로 노동자단체를 기초로 한 사회모델을 건설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율리우스 마르토프는 멘셰비키 중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자랑하며, 사회민주당(POSDR)의 왼쪽 날개를 담당하는 볼셰비키파의 승리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것은 바로 볼셰비키가 ‘정밀한’ 사회학적 분석이 무색하게, 젊은 미숙련 노동자와 빈농, 병사 등 다양한 계층이 전부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는 하나의 모호한 계급으로 단합하게 만든 데 있었다.
사실상 체제에 반기를 들고 민중운동과 보조를 맞출 줄 아는 정파는 오로지 사회민주당의 좌익 분파인 볼셰비키뿐이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4월에 이르러, 각 소비에트 조직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권력을 쟁취할 채비에 나섰다. 당원 5천 명으로 구성된 이 마르크스주의 조직은 저항적인 민중을 설득해 그들 조직에 영입했다.(11) 이제 볼셰비키만이 민중과 함께 체제전복의 길로 나아갈, 민중을 정치 세력화할 유일한 조직으로 떠올랐다. 한 마디로 볼셰비키는 현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다른 정당과는 차별화된 길을 걸었다. 볼셰비키는 11월 7일(러시아력으로는 10월 25일) 자신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소비에트 제2차 전국대회 개최일에 맞춰, 페트로그라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12)

사회적 반감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올라탄 볼셰비키는 불가능한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섰다. 국가가 해체된 상황에서도 국가를 더욱 파탄으로 내몰 위험을 감수하며, 지금처럼 계속 공장 및 촌락 소비에트에 분권화된 자율적 운영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을까? 12월 수립된 제헌의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대부분 신뢰하기 힘든 과거의 정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말았는데? 우리가 약속했던 평화조약은 또 어떻게 우리의 상대국들과 체결한단 말인가? 우리의 주요 ‘동맹’인, 조르주 클레망소와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는 우리의 적국인, 빌럼 2세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독일만큼 소비에트에 대해 적대적인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종종 레닌의 결정에 반대를 표명하곤 했지만, 브로츠와프 감옥에 갇힌 이후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10월 봉기는 단순히 러시아 혁명만 살려낸 것이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의 명예 또한 살려냈다.”(13) 사실 혁명은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항의 물결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봄이 되자 독일의 금속노동자, 파리의 여성 재봉사가 파업에 돌입했다. 여름에는 프랑스군이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독일에서도 수병들이 들고일어났다. 6월, 이제르 도지사는 “러시아 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이 이미 노동자 병사 위원회나 사회혁명 위원회 조직을 꿈꾸고 있다”(14)고 말했다. 러시아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된 ‘유럽 내전’(15)의 중추와도 같았다. 유럽 내전은, 공산주의에서 파시즘에 이르는, 이후 25년간 유럽의 지형을 형성했다. 그리고 내전의 결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에 이르는, 러시아 소비에트 체제의 변화를 이끌었다.  


글·에릭 오노블 Eric Aunoble
역사학자, 제네바 대학 연구원. 주요 저서로는 <La Révolution russe, une histoire française. Lectures et représentations depuis 1917(러시아 혁명, 1917년 이후의 글과 영상>(La Fabrique·파리·2016)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Sofia Fedortchenko, <Le Peuple à la guerre(전쟁에 나선 민중)>, Valois, 파리, 1930년.
(2) 임시정부의 문서(봉답문), 1917년 3월 6일.
(3) 키예프(TsDAGO, TsDAVO)와 하리코프(DAKhO)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문서에서 인용.
(4) Serge de Chessin, <Au pays de la démence rouge. La révolution russe(1917-1918)(적색테러의 나라에서. 러시아 혁명(1917~1918년))>, Plon-Nourrit, 파리, 1919년.
(5)  Steve Smith, <Pétrograd rouge. La Révolution dans les usines(붉은 페트로그라드. 공장의 혁명)>, Les Nuites rouges, 파리, 2017년.
(6) Mark D. Steinberg, <Voices of Revolution, 1917>, 예일대학출판부, 뉴헤이븐, 런던, 2001년.
(7) 위의 책.
(8) Ivan Bouine, <Jours maudits(저주받은 나날들)>, L'Age d'homme, 로잔느, 1988년.
(9) Elena Lakier의 일기. ‘Preterpevchi do kontsa spasen budet(끝까지 버티는 자, 구원 받으리라)’, <Jenskie ispovedalnye teksty o revolutsii i grajdanskoï voïne v Rossii(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관한 여성들의 증언)>에서 인용,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출판부, 2013년. 
(10) Alexandre Blok, ‘L'intelligentsia et la révolution(인텔리겐차와 혁명)’(1918년 1월 19일), <Oeuvres en prose, 1906-1921>, L'Age d'homme, 1974년.
(11) Voline, <La Révolution inconnue(미지의 혁명)>, Entremonde, 제네바, 2010년.
(12) 대의원의 75%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하는 것을 찬성했다. Alexander Rabinowitch, <Les bolcheviks prennent le pouvoir. La révolution de 1917 à Pétrograd(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혁명)>, La Fabrique, 파리, 2016년.
(13) Rosa Luxembourg, <La Révolution russe(1918)(러시아 혁명)> Spartacus-Lefeuvre, Robert Laffont, 파리, 1977년.
(14) Jean-Jacques Becker, <Les Français dans la Grande Guerre(세계대전 중의 프랑스인들)>, Robert Laffont, 파리, 1980년.
(15) Enzo Traverso, <1914-1945, la guerre civile européenne(1914~1945년, 유럽 내전)>, Hachette-Pluriel, 파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