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통한 인민해방’을 꿈꾼 볼셰비즘

2017-09-28     니콜라 포르네 | 역사학자

1958년 출간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 유리아틴 도서관 장면은 작가가 40년 전에 느꼈을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 주인공은 전형적인 구(舊) 인텔리겐차들 옆에서 ‘일요일에 교회에라도 가듯 잘 차려입었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인민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1917년 지식의 변방에 있었던 민중이 지녔던 문화에의 갈증과 그들을 사로잡았던 혁명의 경이로움이 소비에트 사회에 깊게, 그리고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줬다.

볼셰비키는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로 올라선 노동자와 농민들이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정권을 잡았을 때 민중 계급의 정치화와 그들의 지식에 대한 열망을 인민해방계획에 반영했다. 인민들은 학교와 도서관을 점령하기 전에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소비에트(평의회, 대표회의)라는 학교에 다녔다. 1917년 10월에는 1,500명 이상이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며 학습하고 투쟁하고 사회를 재조직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역시 민중의 열망이 최대한 표출되도록 지원했고, 싹트기 시작한 민중의 창의력이 만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민중의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러시아에는 1억 5천만 명의 아동과 성인남녀가 문맹이거나 겨우 문맹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레온 트로츠키는 “문화는 경제라는 수액을 먹고 자란다”(1)고 했다. 하지만 세계대전과 내전, 그리고 강대국들의 금수조치는 러시아의 생산력을 파괴했고 이미 빈약한 자원을 더욱 고갈시켰다. 가장 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제정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게다가 1920년대 초 독일, 핀란드, 헝가리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비에트 연방, USSR)은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레닌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행했던 연설에서 “우리는 고립됐다. 철저하게 고립됐다”고 한탄했다. 당시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다른 곳에서 혁명이 재개되는 것이었다.

만성적인 종이 부족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교과서와 수백만 부의 글자교본을 ‘새로운 국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십 개의 언어로 발행했다. 1917년 12월에는 읽고 쓰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고 선언했고, 1년 후에는 지식인에게 ‘문맹자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발표했다. 1919년 12월에는 “문맹자가 수업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자는 누구든 형사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공표했다.(2) 외딴 시골 마을에는 신문을 큰 소리로 읽는 시간이 생겼다. 내전 중인 1918년 4월 의무교육이 시행되자 붉은 군대가 수천 명의 젊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의 배움의 장이 됐다. 

1919년부터 군대 내에서 1,200개의 독서클럽과 6,200개의 정치, 과학, 농업 등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문맹 퇴치 운동이 시작돼,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문맹자를 가르치고 노동자가 농민을 가르쳤다. 라디오, 영화, 포스터, 연극 등 모든 수단이 경쟁적으로 동원됐고 헛간, 공장, 농장, 유목민의 텐트에서 글을 배우는 수업이 진행됐다. ‘선전’ 열차와 배는 고립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민중들의 지식에의 허기를 충족시켰다. 문맹 퇴치 운동의 책임자이며 볼셰비키 투쟁가였던 나제다 크룹스카야는 “책을 실은 선전 열차가 마을에 도착하면, 곧바로 책이 있는 화물칸 앞에 긴 줄이 늘어선다. 할머니, 할아버지, 자루를 들쳐 맨 청년들 모두 다 몰려들었다”(3)라고 적었다. 프랑스 역사학자 장 미셸 팔미에에 의하면 “선전 열차는 운행 2년 만에 수천 곳이 넘는 마을을 방문했고 3천여 회가 넘는 강의를 진행했다.”(4) 여자들은 야학에 다니거나 집에서 수업을 받았다. 

내전이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정권은 다양한 유형의 혁신적인 교육정책과 제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례로 1918년에는 인민들이 대표하는 교육 소비에트에서 교사들을 선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관행은 1920년대 중반 관료화되면서 사라졌다.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4백만 명의 고아들을 교육하기 위해 캠프, 보육원, 아동 보호시설 등 다양한 교육 시설이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단체생활과 학습을 통해 자율성을 가르쳤고 이는 생산 활동과 다름없는 가치를 가졌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안톤 마카렌코와 같은 교육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1천여 개의 시설에 8만 2천 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고 교육했다.(5) 현지에서 고용된 교사들의 자질이 뛰어나지 않았지만 공동의 열정으로 그것을 보완했다. 많은 관찰자들이 놀라움을 가지고 이를 기록했다. 프랑스 교육학자 셀레스탱 프레네는 1925년 이렇게 썼다. “이토록 놀라운 진보, 그것도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이뤄졌다는 것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소비에트의 교육가들은 러시아의 교육 수준을 서구의 수준으로 높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구의 무기력한 정책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인민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것이 혁명 완수의 길이라 생각했다.”(6)

러시아 제정시대에는 아동 5명 중 1명만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국적과 무관하게 모든 아동에게 남녀공학 무상의무교육을 했다. 그리고 1918년 10월 7일에는 구 교육제도를 대체하는 통합노동교육이 법제화됐다. 하지만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권위적인 교육 대신 아동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측과 실생활에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측이 격하게 충돌하는 바람에, 1918년 새 학기 시작이 늦춰질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정부는 도시별로 각기 다른 교육과정을 시행하는 실험을 결정했다. 혁명가들은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사회의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구 체재에서 해방된 새로운 교육제도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래서 인민교육위원회(교육부)는 종합적이고 다방면의 교육을 통해 생산수단을 근대화하고 과학을 발전시킬 엔지니어와 기술자를 육성하고 아울러 사회주의 사회의 미래 시민을 길러내는 자율적인 학교 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921년 1월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인해, 8세부터 17세까지 해당했던 의무교육이 15세까지로 축소됐다. 동시에 1919년부터는 부분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가 시행됐다. 노동자 예비학교인 ‘랍파크(Rabfak)’를 설립해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과학과 경제에서 사적 이윤을 분리했고 덕분에 내전이 시작되면서 세워진 연구소와 대학교에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를 하게 됐다. 시베리아의 아카뎀고로도크 과학연구센터는 실리콘밸리가 존재하기 훨씬 전인 1957년에 조성됐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우주에 쏘아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한 정부주도의 교육 및 연구 정책은 혁명 첫해부터 글자 그대로 맨손으로 일궈낸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몇몇 소수 민족은 거의 문맹이었기 때문에 40여 개의 언어와 지방어를 표기하기 위한 글자가 필요했다. 차르 체제에서 강제적으로 시행된 동화정책과는 달리 (이 정책은 후에 스탈린 시대에 다시 채택됐다) 볼셰비키 정부는 대(大)러시아의 중요한 통치수단이었던 키릴어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국수주의도 허용하지 않는 볼셰비키는 로마자 표기를 채택하는 놀라운 조치를 취했다. 이 정책은 시베리아와 코카서스의 소수민족과 극동의 중국과 한국계 주민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로마자는 특히 터키어 사용자들에게 봉건주의자들, 막 부상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지, 아랍문자를 지키고 문자의 신비를 보존하고자 하는 성직자 계급에 맞서 싸우는 피착취자들의 투쟁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로마자 표기는 서방 세계에 대한 개방을 의미했고 러시아의 민중들을 선진국의 노동자들과 좀 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시도였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122개 언어와 지방어가 존재했다. 1929년까지 조지아어, 이디시어, 아르메니아어, 우크라이나어 등 고유의 문자가 있는 언어를 제외하고 수십여 개의 구어(口語)가 로마자로 표기됐다.

민중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르고 볼셰비키는 민중도 스스로 국가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적 수단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레닌은 가정주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물자는 부족했으며, 넘어서야 할 장애물은 컸다. 칭기스 아이트마토브의 소설 <최초의 교사>(7)는 붉은 군대의 병사에 관한 이야기다. 책도 없고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병사는 군대에서 글을 배우고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한 후 1924년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려 하나, 마을 사람들은 학교가 밥 먹여 주냐며 학교 짓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수만 개의 인민의 집, 노동자 클럽, 독서 이즈바(러시아 전통 목재가옥), 도서관이 세워졌다. 이 시설들은 민중들, 특히 1918년 봄 강제징집 조치 후 소비에트 정부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농민들을 교육하고 계몽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농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책을 사거나 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돈이 남아도는 것을 의미”했고 쿨라크(부농)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었다.(8)  

이렇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1921년 20만 명의 교사가 5백만 명에게 글을 가르쳤고 1922년 말에는 7백만 명이 글을 깨쳤다. 1921년 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학생 수가 350만 명에서 5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1929년에는 학생의 수가 1,300만 명, 학교의 수는 13만 9천 개였다. 교육 대중화 정책은 스탈린 체제에서도 계속됐다. 농업의 집단화를 발판으로 강력한 산업화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 초기, 사회를 혼란하게 했던 교육과정에 대한 논란은 사라졌고, 수많은 엔지니어와 전문가들이 배출됐다. 그런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힘이 강화되는 것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관료주의가 자리를 잡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된 뒤 10년 간 책임자 위치에까지 오른 노동자와 민중계급 출신의 청년들은 숙청당했다. 

노동자 대중이 교육을 받아야 관료주의의 부상을 막고 스스로 ‘자신들의’ 국가를 경영할 수 있으며, 관료들로부터 권력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생각은 옳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을 통한 인민의 해방을 꿈꿨던 볼셰비키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글·니콜라 포르네 Nicolas Fornet 
<Russie soviétique (1917-1927), la révolution dans la culture et le mode de vie(소비에트 러시아 (1917-1927), 문화와 생활 방식 혁명)> (Les Bons Caracteres, Pantin, 2016.)의 저자.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왜 책을 읽는가> 등이 있다. 


(1) Léon Trotsky, Littérature et révolution(문학과 혁명), introduction de 1924, Les Éditions de la passion, 2000.
(2) Harbans S. Bhola, Campagne d’alphabétisation, URSS 1919~1939(소비에트 러시아 문맹퇴치 운동 1919~1939), Unesco, Paris, 1986.
(3) Nadejda Kroupskaïa, Le Bulletin communiste, n° 1, Paris, 6 janvier 1921.
(4) Jean-Michel Palmier, Lénine, l’art et la révolution(레닌, 예술과 혁명), Payot, Paris, 2006.
(5) Éric Aunoble, ‘Le Communisme, tout de suite !’ Le mouvement des Communes en Ukraine soviétique(‘당장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아동 보호시설 운동), Les Nuits rouges, Paris, 2008.
(6) Célestin Freinet, <Mes impressions de pédagogue en Russie soviétique(소비에트 러시아 교육에 관한 인상)>, L’École émancipée, n° 7, Marseille, 8 novembre 1925.
(7) Tchinghiz Aïtmatov, Le Premier Maître(최초의 교사), Éditeurs français réunis, Paris, 1964.
(8) Nicolas Werth, <Alphabétisation et idéologie en Russie soviétique(소비에트 러시아의 문맹퇴치 운동과 이데올로지)>, Vingtième Siècle, vol. 10, n° 1, Paris,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