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혁명에서 레닌 사망까지 구질서의 전복

2017-09-28     엘렌 리샤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16세기 말 유럽의 다른 가톨릭 국가들은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우스력을 도입했다. 그러나 러시아만은 1918년 1월 31일까지 러시아 정교의 상징인 율리우스력을 계속 이용했다. 다음 연표는 사건 발생 당시 사용된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했다.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된 날짜도 괄호 안에 병기했다.


1917년

2월 23~27일(3월 8~12일). 비보르크 지구의 섬유 노동자들이 빵 배급에 불만을 품고 시위를 일으켰다. 다른 150만 노동자가 운동에 동참하면서 총파업 사태가 벌어졌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시위가 무장봉기 사태로 번졌다. 병사와 노동자가 무기를 들고 도시의 주요 전략 요충지를 점거했다.

2월 27일(3월 12일). 두마의 의원들이 페트로그라드에서 임시위원회를 구성했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창설하고, 각 공장과 군부대에 대표(대의원)를 선출할 것을 호소했다. 두 기관은 타협점을 찾았다. 소비에트가 자유주의자(카데트, KD)들이 지배하는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민주개혁정책을 시행하기로 약속했다.
3월 3일(3월 14일). 니콜라이 2세 황제가 동생에게 제위를 넘기려 했지만, 그도 역시 제위 계승을 거절했다.
3~4월. 초대 임시정부가 보통선거, 정치범 전원사면, 사형제 폐지, 계급·인종·종교 간 차별 근절, 핀란드와 폴란드의 민족자결권 보장 등 기본적 자유와 관련한 조처를 단행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전쟁을 지속하는 의견에는 찬성했다. 페트로그라드 모델을 바탕으로, 600개 이상의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전국에 군대, 공장, 촌락 위원회가 창설됐다. 15만 명 이상이 군대를 탈영했다.

4월 4일(4월 17일). 레닌이 망명지에서 돌아와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는 ‘전쟁중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세 가지 구호를 제시했다.

4월 20~21일(5월 3~4일). 연합국에 “최종 승리 때까지 싸울 뜻”을 밝힌 임시정부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임시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5일(5월 18일). 전 소비에트 지도자 6명이 2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6월 18일(7월 1일). 러시아 총공세가 1주일 만에 교착상태에 빠졌다. 7월 2일(7월 15일) 동맹국(Central powers: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불가리아로 이루어진 동맹체제-역주)들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며 승기를 잡았다.

7월 3~4일(7월 16~17일).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이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과 내통해 국가 전복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많은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감옥에 투옥됐다.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했다.

8월 27일(9월 9일). 군사 쿠데타 시도가 공장위원회와 노조의 저지로 실패했다. 쿠데타를 주도한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지지하는 바람에 자유주의자(KD)들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다. 반면 볼셰비키는 혁명의 수호자로 떠올랐다.

8월 말. 지주들에 반대한 대규모 농민봉기가 시작됐다.

9월 9일(9월 22일). 러시아의 거의 모든 주요 생산기지의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로 등극했다. 레온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10월 25일(11월 7일). 볼셰비키가 겨울궁전과 주요 권력 요충지를 장악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모두 떠나고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10월 26일(11월 8일). 새 정부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평화를 선언하고, 대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11월 12일(11월 25일).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개최됐다.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은 다수를 차지했지만, 볼셰비키는 총 703석 중 168석만을 얻는 데 그쳤다.

11월 14일(11월 27일). 노동자들이 선출한 위원회가 국유화된 산업체를 관리했다. 정부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인정했다. 다음 달에는 은행도 국유화됐다.

11월 15일(11월 28일). 국적에 관한 법령을 발포해, 민족의 평등과 주권, 자결권, 연합 및 분리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했다.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국가,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이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7일(12월 20일). 새 정권이 정치적 목적의 비밀경찰, 체카(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 러시아 위원회)를 창설했다.

12월 말. 러시아 남부에 반혁명군이 조직됐다.

1918년

1월 5일(1월 18일). 제헌의회가 열렸지만, 다수는 정부의 법령을 심의하기를 거부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제헌의회 해산을 결정했다.

3월 3일. 연합국들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며, 전체 인구의 26%, 특히 가장 중요한 철강 및 밀 생산지를 잃었다.

5~6월. 농촌에서 강제로 밀 작물을 징발했다. 자본 규모 50만 루블이 넘는 기업을 국유화했다.

7월 6~7일. 사회혁명당 좌파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8월. 연합국이 백계러시아인들(러시아 혁명에 반대하고 국외로 망명한 러시아인-역주)을 지원하며 군사개입에 나섰다.

8월 30일. 사회주의혁명가 파니 카플란이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암살을 시도했다. 정권은 ‘적색 테러’(예방 차원의 체포, 인질 처형)로 맞대응했다. 백계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도시에서 잔혹한 만행을 일삼았고, 토지에 대한 법령을 폐지하며 농민과 멀어졌다.

11월 21일. 국내 상업을 독점했다. 모든 상점이 시영화됐다.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금지되고, 강제 징발로 인한 물자난이 심화됐다.

1919년 3월. 최초의 대대적인 당내 숙청이 시행됐다. 당원의 1/3이 ‘출세지상주의’나 ‘정치적 소극성’을 이유로 축출됐다.

1920년 11월 11일. 크림반도까지 퇴각한 최후의 백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도주했다. 백군은 1922년까지 동부지역에서 저항을 지속했다.

1921년 2~3월. 크론시타트의 수병과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위원들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봉기했다. 동시에 농민의 저항도 거세졌다.

1921년 3월 8일. 제10회 당 대회를 열었다.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됐다.

1922년 4월 3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당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1922년 12월. 병에 걸린 레닌이 당의 분열과 관료화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작성했다. 레닌은 트로츠키의 거만함에 당황하면서도, 스탈린을 그보다 한층 더 위험한 인물로 평가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했다. 


출처 : Nicolas Werth, <Les Révolutions russes(러시아 혁명)>, 프랑스대학출판부, 파리, 2017년, <Histoire de l'Union zoviétique de Lénine à Staline, 1917~1953(1917~1953년, 레닌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소련의 역사)>, 프랑스대학출판부, 2017년.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박스기사

귀족출신 공보관의 눈에 비친 볼셰비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러시아 황제가 권좌에서 물러났을 당시, 루이 드 로비앵은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공보관으로 활동했다. 브르타뉴의 한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인 그는 혁명 초기 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의 정치상과 사회상을 일지에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귀족 출신임에도 볼셰비키를 적대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점진적 종말을 자세히 묘사해놓았다.

1917년 5월 24일.
기차역이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얼마 전 나는 니콜라스 역에서 모스크바행 열차의 출발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기차는 승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열차 칸이며, 복도, 난간, 지붕까지, 기차가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새통을 이뤘다. 화장실까지 병사 4~5명이 몸을 구겨 탔을 정도였다. 역장은 이대로 출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며, 토바리시(1)(그들은 대부분 무임 승차자였다)들에게 하차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도 기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장은 노동자 병사 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위원회가 파견대를 보내왔고, 그들의 지휘관인 장교 한 명이 기차 위의 병사들에게 얼른 기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장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끼리 새로운 위원회를 선출했다.(2) 그 자리에서 선거가 열렸고, 객차와 열차 지붕 위의 승객들이 순식간에 ‘열차위원회’를 조직했다. 물론 열차위원회는 열차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다. 병사들은 말했다. “우리 열차위원회도 병사위원회만큼 중요하다. 둘 다 우리 손으로 선출한 기구니까.”

우리는 중앙위원회에 다시 새로운 명령을 요청했다. 마침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장교는 부하들에게 기차에 올라 저항자들을 끌어내게 했다. 그러나 저항자들은 오히려 기차에 올라탄 이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모스크바로 가려 한다. 당신네는 모스크바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절호의 기회다. 당신네도 우리와 함께 가자! 모스크바로 가자!”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몇 분 뒤 승강장에 남은 사람은 장교 혼자뿐이었다. 병사들은 억지로 역장에게 기차를 출발시키게 했다. 마침내 기차가 몇 시간 연착 끝에 역을 출발했다. 무단으로 기차에 오른 사람들과, 그에 더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군사들까지 전부 싣고. 그들은 저마다 열차 위원회를 내세워, 종착지로 가는 내내 줄곧 자기들 마음대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유료 승객들을 괴롭혔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러시아어로 ‘동지’라는 뜻.
(2)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명령 제1호’를 내렸다. 병사들에게는 대표 위원회를 선출할 권리가 부여됐고, 장교에게 경어를 붙이거나, 병사들에게 반말하는 것이 금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