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미심쩍을 때

2017-09-28     엘렌 리샤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강압적인 변화는 볼셰비키의 계획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을 짓누르는 주변상황 때문에 생겨난 것인가? 레닌 생전에 러시아 민중들은 자주적인 관리를 꿈꿨으나, 명령을 하달 받는 상황으로 바뀌자 이미 이 문제는 제기된 바 있었다. 


혁명이라는 생각 자체를 배제하려 했던 보수주의 역사학자들에게 상황은 계속 나빠져 갔다. 도미니크 콜라스는 “민중에 대한 억압은 우발적인 사고도 아니었고, 어려운 상황에의 대응도 아니었다. 레닌의 계획 중 한 요소였다”라고 말했다.(1) 이와 반대로 좌파 역사학자들은 백군(白軍, 반혁명 황제파-역주)과 외국군, 농민봉기에 맞섰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서, 볼셰비키가 계획 없이 임시방편으로 강제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2) 그 이후에 이어진 암울한 스탈린 시대는 공산당의 계획 그 자체와는 무관했고, 내전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레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레닌의 선택을 두고 광범위한 논의가 있었다. 당 내·외부에서 어떤 이들은 당시 정치·군사적인 긴급 상황에 따른 것이라며 레닌의 선택을 옹호했고, 다른 이들은 다소 시기상조적인 독선적인 일탈이라고 평가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무력 사용, 민주주의, 국가 등의 문제가 제기됐던 선택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서도 1917년 10월(11월)에 있었던 혁명군의 봉기에 의한 권력장악과 1918년 1월에 있었던 제헌의회의 해산, 1921년에 있었던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봉기 진압, 이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임시정부가 설립된 지 몇 달 만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정권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당내 노동자층과 징집병들은 여기에 힘을 보탰다. 깜짝 놀란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다른 위원들과 함께 이 결정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와 함께 점점 급진적으로 돼가는 볼셰비키의 모습은 다른 사회주의 세력(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 12면 러시아혁명 관련용어 참조)과 막심 고리키를 포함한 동지들까지도 두렵게 만들었다. 2월 혁명의 성과(민중의 자유, 보통선거, 사형제 폐지)를 중요하게 여기며 진보적인 지식인을 대표했던 작가 막심 고리키는 평화와 토지에 굶주린 민중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면서 변해가는 형태,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한 그 형태를 걱정하고, 더 나아가 반감을 품었다. 고리키는 볼셰비키가 “혐오와 증오, 복수심을 퍼트리면서, 붕괴된 일상과 거짓말과 정치적 타락에 화가 난 군중들의 모든 어두운 본능”을 선동했다고 비난했다.(3)

이와 반대로, 레닌은 이 혼란을 구체제의 구조가 가차 없이 붕괴하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레닌은 러시아가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보다 순수하게 받아들여 혁명의 부르주아 단계를 넘어섰다고 봤다. 멘셰비키는 국가가 진정한 자본주의 세력이 되려면, 이 시기를 안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건을 목격한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두마(하원)와 관련 있는 임시정부와 근로자(노동자, 농민, 병사)를 대표하는 소비에트의 두 세력이 대립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적인 계획, 즉 다수가 염원하는 즉각적인 평화와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토지분배,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와 그 유명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잃은 임시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켜야 했다. 그리고 10월 24일 밤부터 25일까지 볼셰비키 적위대는 다들 버리고 간 임시정부가 있던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어렵지 않게 장악했다.  

무장반란을 선택한 볼셰비키는 예방적 차원에서 군사 쿠데타로부터 제헌의회를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9월에는 군사 폭동으로 제헌의회가 무너질 뻔했다. 볼셰비키는 11월 선거에서 전체 의석 700석가량 가운데 17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1918년 1월에 제1차 회의가 열리자마자 제헌의회를 해산시켰다. 제헌의회 해산 결정으로 ‘즉각적인 사회주의’를 찬성하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의구심이 생겼다. 

독일에서 활동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브로츠와프 감옥에서부터 의문을 가졌다. 룩셈부르크는 제헌의회 해산으로 사회주의자와 상대편 노조원들만이 동요했을 뿐, 국민은 여전히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제헌의회 해산에 대해 레닌을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볼셰비키가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붕괴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로의 사회 변화는 보통선거나 언론의 자유 등의 ‘부르주아적인’ 발명품(볼셰비키는 이를 헛된 것이라며 비판했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봤다.

“인간이 만든 다른 모든 제도처럼 그 어떤 민주적 기관에도 분명히 한계와 결점이 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해결책은 (…) 그것이 해결하고자 했던 악보다도 나쁘다.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실제로 사회제도가 태생적으로 지닌 결함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원천, 즉 민중의 생기발랄하고 자유로우며 활기 넘치는 정치적인 삶을 막고 있다. (…) 볼셰비키가 용기와 결의를 가지고 전념했던 위대한 업적은 대중들에게 더욱 더 강력한 교육을 필요로 했고, 정치적 자유 없이는 불가능한 경험의 축적을 필요로 했다.”(4)
지식인들이 여러 사건에서 이렇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혁명진영’에서 떨어져 나온 사실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19세기(1848년, 1871년, 1905년)의 참혹했던 억압적 악몽에 사로잡힌 많은 좌파 운동가들, 즉 무정부주의자와 1918년 3월까지 정부에 속했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내전 기간 내의 강제 징발, 산업 국유화, 반대파 체포(심지어 예방적 차원에서의 체포까지) 등의 강제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조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했다. 러시아 출신으로 벨기에의 무정부주의자였던 빅토르 세르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는 백색공포를 겪은 후에야 적색공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혁명을 미래에 필요한 거대한 희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혁명에서 자유의 정신을 보존하거나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5)

하지만 레닌이 강요한 당 규율보다 앞서는 것은 없었고, 국가적 강압은 때로 맹목적인 억압으로 변질되는 듯했다. 이런 ‘전시 공산주의’의 정당성에 의구심이 제기됐다. 내전이 한창일 때 정치경찰의 수는 2만 명(민간인과 군인)에 달했고, 이들은 백인들이 토지를 되찾았을 때만큼이나 폭력을 이용해 수탈을 자행했다. 농민들은 씨 종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징발을 피하고자 농작물을 감췄지만 정치경찰들은 이를 엄하게 벌했다.  

1921년 3월, 긴장 상태는 10월 혁명에서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크론시타트 섬 수비대의 봉기로 절정에 달했다. 1917년 2월 때처럼 식료품 제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2월에 파업했고, 그 다음 달에는 병사들과 요새 수병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우세했던 위원회에서는 이들의 파업에 정치성을 부여해 소비에트에 신규 선거 시행, 노조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군 식료품 징발 폐지를 요구했다. 3월 6일, 봉기에 참여한 이들은 다음과 같은 무전을 보냈다.

“우리는 정당의 권력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권력을 지지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근로자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 선거를 지지한다. 공산당에 이용당하는 꼭두각시 소비에트는 항상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귀를 막았다. 우리가 받은 응답이라고는 ‘일제 사격’밖에 없다.” 

네바강 연안에 위치한 크론시타트는 페트로그라드 서쪽으로 30km 거리에 있다. 크론시타트는 무정부주의자 네스토르 마흐노(우크라이나)가 이끈 반란 농민군과 사회혁명주의자 알렉산드르 안토노프(탐보프 지역)가 이끈 반란 농민군이 볼셰비키 권력에 저항했을 때 전략적인 ‘저지 진지’ 역할을 했다. 적위군은 백색 음모를 구실로 삼아서 3월 7일 공격을 개시했다. 적위군은 수만 명을 희생시키고 며칠 후 요새를 탈환했다. 그 이후에 수천 명이 처형당했다.

“우리의 국가는 관료주의가 변형된 노동자의 국가다. 
우리가 붙였어야 했던 게 바로 이 슬픈 명찰이다”
- 레닌, 1922

미국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알렉산더 버크만은 일기에서 “불안이 엄습한 날들이었다. 절망으로 가슴이 저릿했다. 내 안의 어떤 것이 죽었다”라고 밝혔다. 버크만은 동지였던 엠마 골드만과 함께, 봉기를 일으킨 이들과 중재를 시도했다.(6) 버크만은 “이날 나는 마침내,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공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끊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산당의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공산 독재의 본질이 돼 버린 국가의 절대주의를 (…)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라고 회고했다.

당 내부 토론에서는 앞서 언급한 이 세 가지 중대한 결정 이외에도 관료주의적인 변화에 대한 비판이 빠져 있었다. 크론시타트 봉기가 일어나기 얼마 전, 당은 1920년 트로츠키가 주장한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노조를 국가화시켜 노동자들을 국가의 필요성에 따라 동원 가능한 국가기관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역주)’로 술렁였다. 적위군을 창설했던 트로츠키는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노동을 군사화해야 하고, 노조는 노동자 국가에서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성향’의 여러 반대 진영에서 이를 반박했다.

1921년 1월, 대표자 중 한 명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마지막 백군에 대한 승리와 함께 방향을 바꿔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콜론타이는 강령에 관한 기사에서, 3년 간의 내전으로 노동자들은 지쳤고 자신들이 “독재계급의 선봉부대”인지 아니면 “민중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민중의 의견과 창조적인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정치를 이어가는 이들을 위한 순종적 군중”인지 자문할 권리가 있다고 평가했다.(7) 콜론타이는 “당에서 우리 노조와 공장에서 최선의 것들을 모아 최전방과 소비에트 기관으로 보내면 보낼수록, 하부조직의 노동자들과 당 중앙 지도부 간의 연결고리는 점점 약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콜론타이는 노조의 자율성과 생산에 있어서 노조의 지배적인 역할을 권장했다.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을 하십시오! 당신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까?”

이런 방향 전환에 대한 요구는 받아들여졌지만, 콜론타이가 바랐던 방식은 아니었다. 크론시타트 봉기가 한창이던 때에 열렸던 제10차 전당대회 당시 신경제정책(NEP)이 시행됐다. 신경제정책의 목적은 농민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신경제정책을 통해 강제징발 대신 현물로 조세를 내게 됐다. 사적 소경영이 되살아났으며, 소매업에 대한 통제도 완화됐다. 곳곳에서 농민들의 봉기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고, 레닌은 당이 마비될 사태를 걱정하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힘”인 당을 단속하는 데 애썼다.(8) 레닌은 향후 결과에 따라 수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분파 활동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 결정은 국가 미래에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 “이로써 공산당의 정치국과 그 사무국의 힘이 세졌다(1922년 4월부터 조셉 스탈린이 정치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9)

말년에 레닌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줬던 이 멋진 행정 기계에 한계가 있음을 인지했다. 레닌은 1920년에 “우리의 국가는 관료주의가 변형된 노동자의 국가다. 우리가 붙였어야 했던 게 바로 이 슬픈 명찰이다”라고 밝혔다.(10) 하지만 문제는 당시에 레닌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볼셰비키 권력의 사회적 기반이었던 노동자 계층은 내전 동안 말 그대로 파괴됐다. 적위군에 가입했던 헌신적인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죽었다. 공산당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새로운 기구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더 다양하고 덜 정치화된 계층의 사람들을 모집했고, 이로 인해 지하운동에서부터 이어진 희생정신은 옅어졌다. 공산당원은 1918년부터 4배로 증가했지만, 1921년을 기준으로 볼 때 볼셰비키 ‘보수파’들은 공산당 내에서 2%밖에 되지 않았다.(11) 역사학자 모세 레빈은 이를 두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주변 상황 때문에 사회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독재로 변모된 이후 공산당만을 위한 독재체제가 됐다”라고 분석했다.(12)

레닌은 여러 번의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1922년 말 비서들에게 구술로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유언을 남겼다(레닌은 유언 구술을 통해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를 받아 적은 비서가 스탈린에게 몰래 알려줘서 스탈린이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뒷얘기가 있다-역주). 레닌은 이 유언에서 계파를 금지하는 한편 권력 균형의 형태를 재현할 수 있는 개혁 조직(중앙위원회의 확장, 통제위원회의 설치)을 구상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레닌은 자신의 노선을 강요할 수 없었다. 모세 레빈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선을 수정하려고 노력했던 볼셰비키들이 많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 중 어느 것도 원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라고 말했다.(13) 레닌 또한 말년에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Dominique Colas, <Lénine politique(정치적인 레닌)>, Fayard, Paris, 2017.
(2) Moshe Lewin, <Le Siècle soviétique(소비에트 시대)>(Fayard - Le Monde diplomatique, Paris, 2003) 또는 Alexander Rabinowitch, <Les Bolcheviks prennent le pouvoir. La rèvolution de 1917 à Petrograd(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혁명)>(La Fabrique, Paris, 2016)를 참조할 것.
(3) Orlando Figes, <La Rèvolution russe. 1891-1924: la tragédie d’un peuple(러시아 혁명. 1891-1924: 어떤 인민의 비극> (Denoël, Paris, 2007)를 인용함.
(4) Rosa Luxemburg, ‘La rèvolution russe(러시아 혁명)’, 해당 텍스트(미완성)는 1918년에 작성됨, 링크: www.marxists.org
(5) Victor Serge, <Mémoires d’un rèvolutionnaire et autres écrits politiques, 1908-1947(한 혁명주의자의 기억과 정치적 기록, 1908-1947)>, Robert Laffont, coll. ‘Bouquins’, Paris, 2001.
(6) Alexandre Berkman, <Le Mythe bolchevik. Journal, 1920-1922(볼셰비키 신화. 1920년-1922년까지의 일기)>, Klincksieck, Paris, 2017.
(7) Alexandra Kollontaï, ‘L’Opposition ouvrière(노동자 저항)’. 해당 텍스트는 1921년 초 러시아에서 출간됨. 프랑스에서는 1964년 <Socialisme ou barbarie(사회주의 또는 야만)> 잡지 n° 35, 1-3월호에서 소개됨(영문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함).  
(8) Moshe Lewin, <Le Dernier Combat de Lénine(레닌의 마지막 전투)>, Syllepse, Paris, 2015.
(9) 상동.
(10) Lénine, ‘제8차 소비에트 , 러시아 노조 중앙위원회 위원 및 모스크바 시 노조위원회 위원전당대회에서 이들 대표들 간 연석회의에서의 연설’ Discours à la séance commune des délégués au VIIIe congrès des soviets, des membres du Conseil central des syndicats de Russie et du conseil des syndicats de la ville de Moscou’, 1920년 12월 30일.
(11) Nicolas Werth, <Histoire de l’Union soviétique de Lénine à Staline(1917-1953)(레닌부터 스탈린까지의 소련 역사(1917~1953)>,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coll. ‘Que sais-je?’, Paris, 2017.
(12) Moshe Lewin, <Le Dernier Combat de Lénine(레닌의 마지막 전투)>, Syllepse, Paris, 2015.
(13) Moshe Lewin, <La Formation du système soviétique(소비에트 시스템의 형성)>, Gallimard, coll. ‘Bibliothèque des histoires’, Paris,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