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속으로 들어간 혁명, 그러나 ···

2017-09-28     코린 아마셰 | 제네바 대학 교수

1917년 10월 혁명 발발 직전, 레닌은 과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정권을 무너뜨리려던 1825년의 첫 시도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이 시도가 “민중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레닌이 처음으로 차르의 권위에 도전한 1825년 12월의 혁명지사(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긴 했으나, 이와는 별개로 그는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와 1917년의 볼셰비키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함을 강조했다. 귀족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데카브리스트 반군세력은 사실 ‘민중봉기’라는 개념 자체를 혐오했다. 기존의 대규모 반란 뒤에 수반됐던 대대적인 지주 학살이 러시아 귀족들의 뇌리에 끔찍한 공포로 각인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민중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힘만으로 차르정권을 타도하고자 했던 1825년 반군에 대한 레닌의 비판으로부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선봉에 내세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분명 농민들의 혁명 역량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17년까지 제정 러시아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농민들이었음에도, 러시아 마르크시즘의 아버지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이들이 산업노동자보다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새로운 시도를 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농민층이 사회주의 학설에 동화되는 데 노동자 계층보다 더 어려움을 느낀다고 봤는데, “사회주의 이론을 촉발한 삶의 여건과 농민들의 생활여건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1)

민중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데카브리스트 반군이나, 혹은 농민들의 혁명 잠재력을 믿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의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구축해 나가던 인민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있어 주된 역할을 하게 될 세력이 바로 농민들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사회주의’라고도 불리는 인민주의(2)는 1840년대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영향 하에서 크게 부상한다. 1847년 러시아를 떠난 게르첸은 1848년 파리에서 시도된 혁명들이 차례로 실패하는 것을 지켜본 뒤, 정치와 사회의 서구식 진보에 대한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후 러시아로 눈을 돌린 게르첸은 특히 토지의 개인 소유권에 대한 인식이 없던 농촌사회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그 당시 농민들에게는 농사지을 땅이 주기적으로 재분배되고 있었는데, 게르첸은 향후 농노제와 전제 정치가 막을 내린 뒤에는 바로 이 같은 농촌사회의 특징을 기반으로 공동체주의와 평등주의의 원칙이 꽃을 피우리라 확신했다. 이제 막 그 위력을 인정받은 러시아 민중들은 도덕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됐을 뿐 아니라 바람직한 새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 만한 세력으로 등극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면 러시아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수순을 밟지 않고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수월하게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었다.(3) 

1860년대 초 런던에서 제정 러시아 타도 운동을 벌인 게르첸은 러시아의 급진파 청년들에게 “민중 속으로” 들어갈 것을 권장함으로써 러시아 국민들이 오래전부터 염원해 마지않던 두 가지, 즉 ‘자유’와 ‘땅’을 얻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4)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유형지 시베리아를 탈출해 스위스에서 지낸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역시 러시아 청년들에게 혁명기질과 사회주의 성향이 자생하던 “인민의 생각을 실현하라”고 호소했다. 압제에 허덕이던 비운의 러시아 민중이라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돼있다고 본 것이다.(5)

1861년 농노제 폐지 이후 (토지가 무상분배되지 않고 유상으로 판매됨에 따라) 불거진 소요사태 및 과거의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곧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1873~1874년에는 학생들을 주축으로 약 2,500명의 청년들이 사회주의 전파를 위해 각지로 파고든다. 청년들은 심사숙고한 사전 계획도, 구체적인 정치적 구상도 없었지만 머지않아 대대적인 혁명봉기가 일어나리라는 사실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베라 자술리치에 따르면 “이 문제에 일말의 의심을 가지는 것조차 러시아 인민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배신감과 불만에 가득 찬 국민들이 두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줄 알았다면 그건 곧 오산”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농민들이 혁명의 주역이 되리라는 환상은 곧 실패로 돌아갔다. 농민들은 자신들에게 자유에 대해 논하던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특히 토지공유에 대한 발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땅에 대한 소유권이 각 개인에게 돌아가길 바랐다. 심지어 일부농민들은 경찰에 이 ‘선동세력’을 고발할 정도였다. 사회주의 포교를 위해 떠난 청년들이 방문한 30여 개 농촌지역 가운데 그 어떤 곳도 젊은이들의 호소에 동하지 않았으며, 비밀 결사의 그 어떤 규칙도 준수하지 않았던 이 청년들의 헛된 노력 앞에서 농민층의 사회주의 계몽운동은 결국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몇 년간 수많은 회의와 논란이 이어졌는데, 고난에 허덕이던 민중이 스스로의 주체적인 혁명을 체념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국가의 중추를 무너뜨리려면 민중을 앞세우면서 민중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1881년 테러조직 ‘인민의 의지’ 소속원이 그 당시 산책 중이던 알렉산드르 2세에게 폭탄을 투척해 제거한 일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차르정권이 무너지기는커녕 전제정치의 전횡이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를 비롯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은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급속도로 성장하던 당시 러시아에서 새롭게 마르크시즘에 눈을 뜬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 뒤이은 탄압으로 유배지에 보내진 뒤, 이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초창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민들의 혁명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곧 노동자 계급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 이와 관련한 플레하노프의 설명에 따르면, “농민층보다 더 높은 수준의 발전단계에 도달한 산업노동자들은 (혁명에 대한) 더 많은 욕구와 지적으로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들은 전제 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 인텔리겐차 대오에 합류해올 것이다. 이후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 나면 이들은 노동사회당을 조직해 농민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사회주의 선전운동을 시도할 것이다.”(7)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층이 곧 사회쇄신의 모든 희망을 짊어진 주체라고 봤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 농민은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세력에 불과했다. 그러나 농업인구가 대다수인 나라에서 농민을 배제한 채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까? 1917년까지 혁명운동 진영 내에서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넘어야 할 큰 산은 바로 비(非)마르크시즘 노선의 사회혁명당원들이었다. 과감한 테러 행위로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떨친 사회혁명당은 농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토지의 사회화, 즉 땅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농민들 간에 평등의 원칙에 따라 땅을 재분배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비록 사회혁명당원들이 노동부문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긴 했으나, 이들은 주로 농촌지역에 적을 두고 있었고, 농촌에서 불거지는 주기적인 농민반란은 사회혁명당의 세력확대를 쉽게 해줬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하는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기간 레닌은 소요사태로 들끓던 농촌사회에 주목한다. 이에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두 피지배계급 각각의 역할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하는데,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기에는 부르주아 계층이 지나치게 차르정권에 타협적이었으므로 가난한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합류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의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 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노동자 농민 민주 독재론’을 언급한다. 즉 도시와 농촌 각각의 두 피지배계급이 연합해 구체제를 뿌리 뽑자는 것이다. 이렇듯 레닌이 농민계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이자 일부 당원들은 그가 인민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며 - 다소 과한 - 비난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민주의자들과는 달리 레닌은 농민들의 자주적인 혁명 역량을 믿지 않았다. 레닌이 원한 것은 그저 농민들의 반체제적인 잠재력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1917년 2월 혁명의 발발로 결국 차르정권이 무너지고, 여름 무렵에는 토지를 둘러싼 소요사태가 빚어지면서 다시금 농민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임시정부로서나 혁명 정당들로서나 더는 이 문제를 미뤄둘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레닌은〈4월 테제〉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및 농촌 빈민층으로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 모든 토지의 국유화”에 대해 언급한 그는 “토지가 농촌 근로자 및 농민들 대표로 구성된 지역 협의회의 관할 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레닌은 이어 상황의 흐름을 고려하며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농민들은 농민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임시정부는 법령으로써 토지 위원회를 만들어 관할 하에 두려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상황은 더 이상 임시정부가 손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농민들의 지지 없이, 적어도 이들의 중립적인 지위 없이는 혁명을 완수할 수 없으리란 점을 깨달았고, 1917년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는 확실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토지 문제를 토지 위원회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다. 농민들 대다수가 자기 땅을 원한다는 걸 알았던 레닌은 토지의 국유화를 언급하지 않았다.(8) 

레닌은 반대파인 사회혁명당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전술적 유연함을 보여줬는데, 지주들의 토지를 수용해 농촌 공동체의 주재로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하기로 한 것이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에는 “토지의 사유권은 아무런 보상 없이 철폐된다”는 내용의 법령이 발포됐으며, 이제 “토지는 토지 위원회 및 지역구 농민 대표 협의회, 나아가 제헌의회의 재량에 맡겨진다.” 문서상으로는 상당히 혁명적이었던 이 법령은 농촌 현지의 실질적인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사회혁명당의 대표인 빅토르 체르노프가 농림 장관으로 있던) 임시정부의 토지배분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농촌 공동체에서는 여름 이후 대주주와 부유한 농민들의 토지를 직접 몰수했기 때문이다. 

내전이 끝나자 농민들은 결국 볼셰비키에 등을 돌린다. 그들에게 볼셰비키는 인민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의 장점을 설파하려는 데만 급급했으며, 무엇보다 농촌지역의 재산을 가져다 굶주린 도시의 배만 불려줬기 때문이다. 1921년, 레닌은 민간기업의 일부 형태를 부분적으로 되살리는 신경제정책(NEP)을 수립함으로써 상황을 잠시 미루고자 한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노동자들보다 농민층을 더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곡물의 강제 공출이 금지되고, 그 대신 세금은 현물로, 이어 현금으로 내도록 해 농민들이 잉여분을 시장에 자유롭게 팔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시와 농촌 간의 상업 거래를 복원해 산업의 도약도 장려한다. 이로써 농촌지역에서는 반공산주의 정서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농민문제는 1917년보다 더 단편화되고 복잡해진 상태에서 여전히 미해결된 채 계류된다.

1928~1929년 ‘대전환기’부터는 스탈린이 과격하게 나서며 농민문제를 해결한다. 토지를 강제로 국유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아가는 러시아 민중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운영을 지향하던 인민주의자들의, 순진하지만 관대한 꿈은 이제 스탈린식의 집단 강제명령에 밀려난다. 민중에게 다가갔던 초기 인민주의자들은 스스로 민중을 대체하려 들지 않았다. 외려 이들은 민중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글·코린 아마셰 Korine Amacher
제네바 대학 러시아 및 소련 역사학 부교수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플레하노프 <철학 전집> 1권, Éditions en langues étrangères, Moscow, 1961.
(2) 인민주의의 원어 표기는 ‘Populisme’인데, 19세기 러시아의 인민주의는 오늘날 ‘포퓰리즘’이 의미하는 바와 하등 상관이 없다.  
(3) 참고. <1598-1917 시기의 러시아: 혁명 운동과 봉기>, Infolio, Paris, 2011. 
(4) 니콜라이 오가레프Nikolaï Ogarev, ‘민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Kolokol>, London, 1861년 7월.
(5) 미하엘 바쿠닌, <국가주의와 아나키>, E. J. Brill, Leiden, 1967 (초판 :1873).
(6) 베라 자술리치, <차르에 맞선 네 명의 여인들>(크리스틴 포레Christine Fauré 엮음), Maspero, Paris, 1978.
(7) 앞의 책, 플레하노프 <철학 전집> 1권.
(8) 마르크 페로Marc Ferro, <1917년 러시아 혁명>, 알뱅 미셸 ‘인류의 진화 총서’, Pari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