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부패’ 목소리는 요란한데…거꾸로 가는 국제사회

2010-05-10     에리크 알

금융 및 경제 위기의 확산으로 여러 국가에서 불법 금융거래 차단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경제 및 금융 전문가, 노조로 구성된 비정부기구인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조세회피 지역으로 빠져나간 탈세 재산이 11조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경우, 부패 정치인이 외국으로 빼돌린 재산이 국내총생산의 30%에 이른다고 한다. 아프리카연합은 탈세 금액이 연간 1480억 달러일 것으로 본다.(2) 또한 최빈국 내 정치인 30여 명이 ‘부정 취득한 재산’만 1050억∼18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3) 지난 10년간 국제사회가 채택한 관련법과 결의안 수를 따져봤을 때, 국제기구의 실천 노력이 부족했다고 봐야겠다. 부정 축재는 이미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제경제 관계에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뇌물 안 줘 계약 실패하는 기업들

2005년 한 영국 기업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뇌물주기를 거부해 계약 수주에 실패한 프랑스 기업이 세 개당 하나꼴이라고 한다.(4) 부정거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고, 보잉사 관련자 2명이 사법 처벌을 받은 후 뒤따른 미 공군의 보잉사에 대한 2003년 임차 및 공급자 계약 취소는 충격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아프리카투자자협회와 국제상공회의소, 국제투명성기구 등 점차 많은 사람이 기업의 부패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8년 9월 발표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보고서’는 기업의 부정부패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큐어 파이낸스(Secure Finance), 노베틱 비지오(Novethic Vigeo), 에틱 인텔리전스(Ethic Intelligence) 등 기업 내 반부패 교육이나 반부패 관련 컨설팅을 제공하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일부 기업은 기업의 반부패 정책과 관련한 인증서를 제공한다. 유엔이 주도한 글로벌 콤팩트에 대한 다국적기업의 참여도 활발하다. 글로벌 콤팩트 10대 원칙은 “모든 형태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을 포함한다. 글로벌 콤팩트에 가입한 프랑스 기업만 370개에 이른다. 강제적 제재 방안은 없는 자발적 협약이지만, 목표와 태도만은 확고하다. 한편 유럽연합(EU)은 신규 회원국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부패 위험이 높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EU가 부패 근절을 위해 도입한 수단은 무엇인가? 첫째, 부패방지협력부가 1999년 EU 부패방지국으로 변경됐는데, 이 기구는 EU의 재정적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다. EU의 재정 상황 및 산하기관과 관련한 의혹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부패방지국은 실질적 제재 권한을 가진 개별 국가의 사법부와 효율적으로 공조할 법적 수단이 없어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사사건에 대한 회원국 간 수사 공조 책임을 맡은 유로저스트(Eurojust)가 난처한 처지에 있다. 총괄책임자인 주제 루이스 로페스 데 모타가 2009년 12월 포르투갈 총리 주제 소크라테스의 연루 의혹이 있는 부패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사임했다.

 EU의 드라이브, 각국서 멈칫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사법 처벌 활동이 각국 정부의 거부감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 영국 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560억 유로에 해당하는 무기를 판매한 불법 거래망에 대한 수사를 금지한 것이 한 예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부패방지 고등판무관 직위를 폐지했다. 비슷한 시기 루마니아에서는 전 비밀경찰조직인 ‘세큐리타테’(Securitate)와 협력한 의혹을 산 법관이 최고사법기관인 사법위원회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EU 가입을 신청한 세르비아에서는 불분명한 의혹으로 판사 900명이 경질됐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부패 근절이라는 목표만이 아니라, 이를 실질적으로 달성하는 사법제도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정치권은 프리깃함 대만 판매계약과 얽힌 ‘엘프 사건’에 대해, ‘안보상 기밀’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담당 판사들의 관련 문서 접근을 차단했다. 2009년 7월 29일 제정된 2009~2014년 방위산업 계획 관련법은 국가 방위와 관련한 민간 기업의 활동 영역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달리 말해, 거대 기업집단은 향후 안보와 관련된 기밀문서라는 명목으로 국제 사법 수사망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 것이다.

너무 낮은 유죄판결 비율

한편 프랑스 중앙부패방지청(SCPC)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인원은 3분의 1로 감소했다.(5) 중앙부패방지청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경제 및 금융 문제 담당부서 내 인력 부족과 업무량 과다로, 적절한 기한 내에 부패 의혹을 조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밝혔다.(6)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반부패 감독기구 하나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지방감사원이 국립중앙감사원에 통합될 예정이다. 지자체의 예산 집행 규모가 점점 증가하는 가운데, 예산 및 운영 감사 기능이 평가 및 인증을 맡은 새로운 조직에 넘어갈 것이라고 한다. 사실 문제의 근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프랑스의 사법체계가 부패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이해관계 상충이라는 문제는 늘 도사리고 있다. 프랑스 검찰청은 기소독점권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직속 상관인 사법부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7) 현재 진행 중인 사법부 개혁의 근간이 된 2009년 6월 검찰청 보고서에 따르면, 전직 판사인 필리프 레제르가 지휘하는 형사소송개혁위원회에서 예심판사 직위 폐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예심판사제는 검찰청의 독점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 중 하나인데, 이를 폐지하려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와 대조되는 현상이다.

오스트리아는 2008년 예심판사제를 폐지하면서, 헌법에 검찰청의 독립 보장 조항을 추가했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은 검찰청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새로운 모델은 대륙법에서 파생된 다른 모델보다 러시아 모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러시아 검찰청처럼 프랑스 검찰청도 막강한 권력을 지니겠지만, 행정부에 극히 의존적인 위상에 놓일 것이다. 셰르파, 쉬르비, 프랑스 국제투명성기구 같은 단체가 2009년 아프리카 국가 정치 수반 3명을 ‘부정 취득 재산’을 이유로 사법 고발한 것에 대해 예심판사가 수리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렸는데 검찰청이 즉각 항소한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2006년 프랑스 내 유죄판결을 받은 58만2천 건 중 0.025%인 149건만이 부패 관련 사건인 것은 검찰제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8)

글•에리크 알 Eric Alt
판사노조 회원, <반부패를 위한 투쟁>(프랑스대학 출판부·파리·1997) 공동 저자.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www.taxjustice.net.
(2) 존 크리스텐슨, ‘탈세천국, 더러운 돈 그리고 국제화된 시장’, <Alternatives Sud>, 루뱅 라 뇌브, 2007년 14호.
(3) www.ccfd.asso.fr/BMA/.
(4) 시몬스 & 시몬스, <Control Risks International 보고서>, 2005, www.simmons-simmons.com.
(5) 중앙부패방지청은 1993년 설립됐으며 법원, 소비자 보호 및 공정거래 감독원, 지방감사원, 조세감독원, 경찰, 헌병, 교육부 등의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6) www.justice.gouv.fr.
(7
) 자일스 세나티, ‘사법부 독립은 더 이상 도그마가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6월호.
(8) 중앙부패방지청 2007년 보고서.
 



[박스기사1] 협약의 난립

프랑스는 유엔 ‘초국가조직범죄방지협약’(2000년 12월, 팔레모)과 ‘부패방지협약’(2003년 12월 9일, 메리다)을 비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차원에서는 1997년 11월 17일 ‘국제 상거래상 외국 공무원 뇌물 방지에 관한 파리 협약’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이사회(1999년 1월 27일 부패에 관한 형사법 협약, 1999년 11월 4일 부패에 관한 민사법 협약)와 유럽연합 차원에서 다양한 협정에 가입했다. 예로 1995년 7월 26일 유럽공동체의 금융권익 보호에 관한 더블린 협약과 1997년 5월 26일 유럽공동체 및 유럽연합 회원국의 공무원 부패 방지에 관한 브뤼셀 협약이 있다.

게다가 2003년 7월 22일 민간 분야 부패 방지에 관한 기본 결정를 통해 유럽 27개국 기소와 처벌에 관한 형사법 통일에 나섰다.

하지만 수많은 국제협약을 채택했음에도 프랑스 내 은닉된 ‘부정 이득’ 환수 작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한 예로 사담 후세인의 재산 중 이라크 정부에 반환된 것은 그가 소유한 요트가 고작이었다. 몰락 정권의 재산 환수를 골자로 한 유엔 안정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483호가 채택됐지만, 여전히 프랑스 은행에 예치된 부정 자산은 2300만 유로에 이른다.
 


[박스기사2] 관련서적

 

[박스기사2] 관련서적<범죄와 글로벌 정치경제>(Crime and The Global Political Economy), H. 리처드 프리먼 외 공저(린 리너 출판사, 볼더(콜로라도주), 2009, p.215, 55달러) 

어쩌면 세계화가 온갖 범죄 성행에 유리한 토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나날이 진화하는 기술, 구멍이 숭숭 뚫린 국경, 약화된 국가주권이야말로 전례 없는 범죄 기승의 원인이다. 이런 시각을 견지하는 서적은 수없이 많다. 1923년 인터폴의 전신인 국제형사경찰위원회 창설 이전에도 이미 비슷한 논란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 공동 저서는 정반대 시각을 취해 국가를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이제는 더 이상 절대권력의 범죄조직과, 그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주권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국가와 범죄조직의 긴밀한 결탁을 얘기한다. 우선 국가는 불법 여부를 가르는 ‘범죄화 권력’을 갖고, 국가 대책의 강도나 성격을 결정한다. 국가는 범죄자를 단속하고 동시에 일정 지역의 정치 통제나 사회적 안정 도모를 목적으로 불법 밀매조직의 활동에 가담한다. 멕시코처럼 아예 범죄조직과 ‘암묵적 합의’를 맺기도 한다. 금융계를 비롯해 민간 분야의 통제 강화를 위해 ‘범죄를 정부 활동의 일환으로’ 이용하는 국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