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

2017-09-28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팀
혁명의 완수요건
 
20세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세 차례의 혁명을 포함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혁명에서 확인된 혁명의 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혁명이 가능하려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민중이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고 느끼며 변화를 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착취자가 예전처럼 살 수 없어야 하며, 또 지배할 수 없어야 한다. ‘하위계급’은 과거방식대로 계속 살아가길 원하지 않고, ‘상위계급’은 과거방식대로 계속 살아갈 수 없을 때만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혁명은 국가적 위기(착취자와 피착취자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위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혁명이 완수되려면, 다음의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노동자 다수(즉, 의식이 있고 생각이 깊으며 정치활동이 왕성한 노동자 다수)가 혁명의 필요성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며, 혁명을 위해 목숨 바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둘째, 정계를 시작으로 끝으로는 민중과 민중 사이를 파고드는 국가적 위기를 지배계급이 겪어야 하며(진정한 혁명의 기준은 혁명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한 채 성실히 일만 하며 억압받던 민중들 중에서 정치투쟁에 뛰어든 사람들의 수가 10배, 많게는 100배까지 급증하는 것), 이러한 위기는 정부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혁명가들이 재빠르게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이어야 한다.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1920년 4월.
 
 
미래의 당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편지
 
역사적 주요인물인 볼셰비키당의 우파 니콜라이 부하린은 1937년 스탈린의 경찰에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썼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은 사형당했고, 1988년 사후 복권됐다. 
 
나는 이제 내 남은 생과 이별한다. 고결하면서도 무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도끼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끔찍한 기계 앞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에 짓눌렸다. 그 끔찍한 기계는 중세시대에서나 볼법한 방법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대량 거짓들을 생산하는데 그 기계의 대담성은 확신과 대적하고 있다. (…) 나는 18세에 당원이 됐고, 노동계급의 이익과 사회주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최근 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에 나, 니콜라이 부하린이 10월 혁명을 이끈 사람들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한다는 엄청난 거짓기사가 실렸다. 정말 믿기 어려운, 파렴치한 일이다. 이렇게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거짓말은, 마치 니콜라이 로마노프(러시아 마지막 차르)가, 그 자신이 자본주의와 군주제에 맞서 싸우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길에서 잘못을 저지른 적도 있지만, 레닌이 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게 나를 판단하지 않길 미래 당 지도자들에게 부탁할 뿐이다. 우리 세대는 어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던 길에서 유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당시는 또 다른 관습이 있던 또 다른 시대였다.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를 놓고 우리는 토론했고, 모든 이들이 그 토론에 참여했으며 서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싸우며 화해하며 함께 앞으로 나갔다. 
(…) 동지들이여, 공산주의를 향한 승리의 행진에서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쥐고 있는 깃발에는 나의 붉은 피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 <소련의 러시아에서(Dans la Russie des Soviets)> 
 
 
프랑스 일간지 <엑셀시오르(l’Excelsior)> 소속 기자였던 알베르 롱드르는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 입국에 성공한다. 그 후 환대받은 알베르 롱드르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내용이 담긴 글을 썼다. 
 
기차에서 만난 한 여성은 라이아이오키(Raïaïoki)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옛 이름)에 간다고 하자, 그는 동정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 1917년 10월 볼셰비키파는 권력을 장악하면서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했고, 정권을 탈취했다. (…) 새벽 3시부터 4시까지 인간무리가 그곳으로 몰려든다. 각자 낡은 그릇이나 깡통을 들고 온다. 그들은 기름때 낀 배식대로 그릇을 내밀었다. 여기저기 국물이 튀며 허름한 죽 1인분이 그릇에 담긴다.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이것은 사회 타락의 마지막 단계, 인간들의 돼지우리다. 바로 제3인터내셔널이다. 제4인터내셔널에서 사람들은 네발로 기어 다니고 5차에서 울부짖을 것이다. 
 
(…) 볼셰비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군주제이자 절대군주제이며, 루이 14세나 니콜라이 2세 대신 프롤레타리아 1세라고 스스로 칭하는 군주일 뿐이다. 레닌의 실험대상은 인간이다. 이미 레닌은 수십만 명을 죽였다. (…) 아! 지평선을 뜨겁게 달군 이 아름답고 끔찍한 학살이여.
 
(…) 
 
그리고 우리는 상냥한 치체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위원회 복도에는 유대인 20명, 40명, 60명이 우리들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뱀장어처럼 문 사이를 빠져나오는 유대인 대표자 로젠베르크가 우리에게 숙박을 제공하길 기다렸다. 그때 러시아 군복차림의 한 남성이 웃는 얼굴로 우리를 향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부드러운 눈빛과 함께 행복한 어조로 말했다.
- 드디어 프랑스 사람을 만나는군요! 당신들을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했다.
- 저는 파스칼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이라니! 그는 세련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눈동자는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고 빛났다. 거리낌 없이 악수를 청하는 그는, 위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붉은색 군복차림의, 이런 남자를 만나면 어떤 즐거움을 느끼게 될지 당신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볼셰비즘의 어두운 물에서 항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
 
사람들은 그가 걸을 때마다 굶주릴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밑에서 옥살이를 하며 그의 창문 밑에서 총살당하고 거대한 국가의 광대함 속에서 나온 거친 숨소리가 웃음으로 바뀌는 것을 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공산주의’라는 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등사범학교 학생이었고 프랑스 군대의 보병대 중위였던 파스칼은 더 이상 인간도, 세련된 사람도, 프랑스인도 아니다. 그는 공산당원이다. (…) 그는 자신의 가족, 행복, 학교를 버렸다.
 
(…)
 
우리가 프랑스 정부라면 어떤 행동을 할지 잘 알고 있다. 노동조합 사무소와 공장에 발언자를 대표로 보내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 중에 볼셰비키파는 누구입니까? 저기 계신 분들? 좋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는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지금 집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당연히 우리는 가족을 잊으면 안 되죠) 데리고 오세요, 공화국 정부가 여러분에게 비자를 발급해 여행경비를 지원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떠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6개월간 일하며 살아보세요. 6개월 후 돌아와서 여러분들이 본 것들을 그대로 전하세요. 행운을 빕니다, 동지들이여!”
 
(…)
 
칩거 중인 레닌은 자신의 무릎 위에 고양이를 앉힌다. 그리고 아시아인의 눈처럼 반쯤 눈을 뜬 채 꿈을 꾼다.
 
- 알베르 롱드르, <소련의 러시아에서(Dans la Russie des Soviets)> Aléa, Paris, 2008(초판:1920년)  
 
 
러시아혁명 관련용어
 
볼셰비키: 볼셰비키(러시아어로 ‘다수’를 의미)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POSDR*)이 두 파로 분열됐을 때, 레닌을 따르는 다수파를 일컬으며, 1912년 조직적으로 독립한 정당이 된다. ‘다수’라는 용어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당 조직과 전략을 두고 대립하던 중 치른 투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때 레닌파가 다수였으므로 볼셰비키라 하게 됐다. 1917년 10월 집권에 성공한 볼셰비키파는 1918년 3월 제7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을 창당하며 이후 소련의 당이 된다.
 
멘셰비키: ‘소수파’(러시아어)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POSDR*) 내 분열 당시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 해석을 놓고 대립했다. 10월 혁명 이후, 이들은 ‘볼셰비키파의 쿠데타’를 규탄했고, 1918년에는 지하모임만 가질 수 있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POSDR): 1898년 3월 민스크 지역에서 창당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초창기에는 산업 프롤레타리아에 잠재적 혁명가가 있음을 확신한 노동자들과 여러 마르크스주의 조직이 은밀히 모여 활동했다. 1903년 2회 대회에서 발생한 내부 분열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인민의 의지당: 인민의 의지당은 19세기 말 러시아 무정부주의 조직으로 여러 폭탄 테러를 일으켰고, 1881년 3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다.
 
사회혁명당(SR): 1901년 베를린에서 창당된 사회혁명당은 초창기에는 러시아혁명 운동의 민중주의 전통을 외쳤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활동하던 사회혁명당은 임시정부에 자신들의 당원 여러 명을 뒀고, 임시정부 내에서도 자유주의자들과 연합을 맺었다. 그러나 9월 사회혁명당 내부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사회혁명당 우파로 분열된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부에서 나와 7월 볼셰비키파 권력에 반대하는 봉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면서 결국 1918년 해산됐다.
 
입헌민주당(KD): 입헌민주당은 1905년에 창당된 자유주의 당이다. 당원을 당의 이니셜에서 따온 말인 ‘카데트’라 불렀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카데트는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던 경제개혁에 반대했으며 전쟁을 찬성하고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를 지지했다. 1917년 12월 볼셰비키파에 의해 입헌민주당은 해산 조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