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마크롱의 노동법 개악, 1953년 8월 파업의 데자뷔
2017-09-28 미셸 피쥬네 | 파리 1대학 명예 교수
한 여름의 ‘악몽’이 되풀이 되다
국회로부터 행정명령을 통해 법 제정의 권한을 얻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여름 바캉스 시즌을 맞아 노동법 개혁을 완결 짓기를 원했으나, 바캉스를 떠난 근로자들이 예상을 뒤엎고 강한 결집력을 보였다. 프랑스 노동조합 중 두 번째로 큰 노동총동맹(CGT)이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앵수미즈)’와 연대해 9월 12일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이는 CGT가 지난 8월, 마크롱 정부가 노동법 개정 최종안을 발표한 직후 ‘노동자 권리를 축소하는 개악’이라는 성명을 내고 대규모 파업을 예고한 데 따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인 1953년, 조제프 라니엘 총리도 이미 바캉스 전략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반응은 그의 모든 예측을 빗나가 유례없는 한여름의 무질서를 일으켰다.
한 해의 달력 스케줄을 잘 활용하는 것은 정치권력의 오래된 법칙이다. 특히 인기 없는 조처를 취할 때 그렇다. 권력은 여름 바캉스 시즌에 ‘그것들을’ 깜짝 발표 한 후, 찬반토론을 피하면서 시행령이나 행정명령 절차를 발표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몇몇 실패 사례도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전례 없던 사건이 바로 1953년 여름, 임금노동자 4백만여 명이 참여했던 파업이다.
1951년 총선 이후, 제4공화국의 정치 저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있었다. 1953년 6월 26일 임명된 조제프 라니엘 총리는 긴축예산을 주장했다. 물가상승이 억제되기는 했으나, 성장은 완전고용을 위협할 수준으로 제자리걸음을 쳤다. 라니엘은 개의치 않았다. 기업경영자 출신답게 강인한 성격의 그는 단호히 행동했다. 냉혹한 그의 행동에 대해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은 “황소고집의 독재권력”이라고 기록했다. 7월 11일, 국회의원들은 그에게 한시적으로 3개월간 시행법령을 통해 경제·사회 분야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의원들은 또한 정부에 공무원과 공공부문 직원들의 승진 및 퇴직 조건을 임의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런 밀어붙이기 정책이 몇 주간 계속됐다. 임금동결, 임시직 해고, 퇴직연금의 ‘특별조정’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공무원들이나 공공부문 직원들의 퇴직 연령을 2년 단축했을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으나, 라니엘 내각은 개의치 않았다. 프랑스 국유철도(SNCF) 및 우편·전신·전화국(PTT) 직원과 광부, 비행조종사, 선박 분야의 직원들에게도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들은 국회심의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내각과 의견을 달리하는 노조들이 이에 반발했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 프랑스 기독교노동자연합(CFTC) 소속의 공무원 및 공공 부문 연대 측에서는 8월 4일을 ‘행동의 날’로 정해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보르도에서는 우체국 직원들이 지역 내 노조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 ‘행동의 날’을 무기한 파업으로 연장했다.
지롱드파(프랑스혁명 당시에 나온 정치파벌의 하나로, 명확한 당파가 아니라 중산층 부르주아, 개신교 등 이어지는 온건 공화파 계열 각종 파벌의 집합체-역주)의 반대 시위는 통신발달에 힘입어 더욱 확산됐다. 우편·전신·전화국의 ‘노동자의 힘 연합’(FO)과 프랑스 기독교노동자연합(CFTC)이 ‘행동의 날’을 결의 한 다음 날인 5일, 즉각적인 파업에 나섰다. 7일, 공무원 연맹은 친정부적인 고등 공무원 위원회 회의를 보이콧한 뒤 전면적인 24시간 파업을 촉구하고 나섰다. 1947년의 대파업과 같은 과거의 열광에 취한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산하의 조직들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정한 행동을 따를 것을 권했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노조에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정부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아 뒤늦게 사태수습에 나섰다. 정부는 9일, 이전에 공표했던 계획의 후퇴를 담은 유화책을 발표했으나 시민과 노동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정부는 2주간의 유급휴가로 노동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교사들을 제외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노동권의 현실화가 기본적인 가치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노동권의 가치는 날로 더 확산됐다. 우편·전신·전화국, 프랑스 국유철도, 프랑스 전기공사 및 가스 공사(EDF-GDF)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파리교통공단(RATP), 에어프랑스 등의 동참시위가 뒤따랐다. 24시간, 48시간 또는 무기한으로 파업기간의 지침이 점차 길어졌지만, 7일에는 200만 명이, 그리고 13일에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수의 많은 사람들이 파업에 나섰다. 철도 종사원들은 파리-툴루즈 간 열차를 브리브에서 정지시켰다. 이른 아침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공권력에 둘러싸인 기차역을 볼 수 있었다.
전국 1일 철도 통행량은 1만 5천 편에서 100편 남짓으로 급감했다. 대규모 송전중단과 가스공급 감소는 일상생활에 혼란을 가져왔다. 버스와 지하철이 부족해 자전거와 도보, 히치하이크를 할 수 밖에 없는 이들, 부모님이나 지인의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생겼다. 거리에는 쓰레기들이 넘쳐나 무더위의 대기 속에 악취를 더했다. 집배원의 부재로 인해, 신문은 휴가지에 ‘잘 도착한’ 여행객들의 짤막한 메시지로 채워졌다. 파업자들은 도시 간 전화 연결을 통제하며, 심지어 장관들의 통신까지도 표적으로 삼았다. 부하직원들과의 소통이 겨우 ‘허락됐던’ 에드가 포르 재무부 장관은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앙티브로 휴가를 떠난 부인에게 전화를 시도했다가 차단당한 일에 대해 기록했다.
“내가 경솔하게도 ‘여보’라고 말해버렸고, 즉시 연결이 끊겼다.”
그런데도 파업의 큰 규모와 달리, 1947~1948년 프랑스 노동총동맹이 분열하면서 ‘노동자의 힘’이 새로 창설되는 등 노동계 내부에 변화가 일었다. 반공산주의 입장을 보인 ‘노동자의 힘’ 연맹 사무소는 8월 12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에 동조할 수 없다.” 개혁주의를 지향한 ‘노동자의 힘’ 조합원들은 프랑스 노동총동맹 조합원들의 과격한 이미지와 차별화하려 했다.
반면, 한때 3백만 조합원을 거느렸던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지나치게 강한 공격태세를 보인 끝에 일련의 가택수색, 범죄혐의, 체포사건 등으로 사무총장 2명이 연달아 고초를 당했다. 그중 한 명인 알랭 르레아프는 수감됐고, 나머지 한 명인 브누아 프라숑은 지하활동을 감내해야 했다. 하부조직의 상황도 악화됐는데, 일례로 빌랑쿠르에 위치한 르노의 경우, 수백 명이 해고됐으나, 노조는 기업운영위원회의 통제권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런 흐름에서 1953년 여름의 동맹파업은 프랑스 노동총동맹 측에 사회문제에 다시 개입할 적절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라니엘 총리는 8월 12일, 3차례나 국영 라디오에 출연해 “파업 반대!”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와 관련해, 뱅상 오리올 대통령은 개인 기록에 “라니엘은 현명한 것인가 아니면 위선적인가? 아니면 너무 교활한 것인가? 난 차라리 현명하다고 믿겠다!”라고 언급했다.
버스 대신 군용 트럭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군대가 수도를 향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19일자 <뤼마니테>는 낙하산 부대원들의 전력 발전소 점거 소식을 전했다. “손에 쥔 경기관총의 탄약은 발사 준비가 됐다.” 군부대는 우편물 선별 작업에 투입됐고 800대의 군용 트럭이 버스와 지하철을 대체했다. 정부는 전쟁 시 국가 조직의 요청에 따라 재산을 징용하고 인력을 동원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1950년 법에 따라 평화 시에도 확대될 수 있었다. 8월 7일부터 바로 철도종사원들과 관련된 첫 번째 법령이, 그리고 9일에는 우체국직원들에 대한 법령이 나왔다. 당국은 또한 개인들에 대한 수만 건의 명령을 서둘러 작성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징용과 징집이 실행된 예는 매우 적었다. 처음부터 법적으로 무리였던 사법권 남용은 변호사들의 변론과 반발에 부딪혀 처벌 대상의 약 90%가 무혐의로 피해갈 터였다.
이로 인해 불편을 겪은 것은 국민이었다. 비아리츠에서는 상인들이 “파업으로 인한 막대한 손해를 이유로” 공무원 손님들을 받지 않겠다고 안내문을 써 붙이기도 했다. 상공회의소들에서는 “파업권 통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파업에 대한 여론의 동향을 말하자면, 일반 상인들은 파업발생 시의 상황을 잘 몰랐기에, 우선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곧 정부의 완강함에 짜증을 내는 식이었다.
고용자인 국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은 정치적인 의미를 얻었으나 내부분열도 뒤따랐다. 국회 임시소집을 통한 사회주의자들의 발의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지만, 급진사회당원인 에두아르 에리오 국회의장의 무성의함에 가로막혔다. 어쨌든, 프랑스 공산당(PCF)과 연대를 거부한 사회주의자들은 상황을 좌파 쪽으로 얼어붙게 했다. 또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는 대중 공화주의 운동(MRP) 쪽으로 돌아섰다.
엘리제궁에서는 뱅상 오리올 대통령이 사회주의자인 동료들의 무능함에 화를 내고 있었다. 6월에 의회로부터 의원직을 거부당한(1)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급진당 회의를 앞두고 “우리는 (프랑스혁명 직전의) 1788년에 살고 있다!”며, “시위대는 도로를 봉쇄한 농부들과 (당국의 일방적인) 세무조사에 반대하는 상점주인들과 합세하여 세상을 바꿔야 한다. 더는 이런 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뒤편에서는 다양한 중재자들이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전념하고 있었다. 개별적인 협상 끝에 8월 21일 이른 아침, 간결한 공식성명을 통해 논쟁적인 법령 적용에 대한 협의 개시, 급여 인상 그리고 노사단체협약 고등위원회 소집 등 ‘노동자의 힘’과 ‘프랑스 기독교 노동자연합’이 받아들인 큰 틀이 정해졌다. 파업자들 사이에서는 안도감과 불신이 서로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날림으로 이뤄진 ‘협약’의 결함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정부에서는 긴급하게 모든 역풍을 방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25일, 기소된 동료들의 석방과 더불어 노동자들에 대한 “일괄적인 노동 재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9월, 공무원들에게 지급된 특별 수당은 약속된 봉급 조정을 구체화했다. 정부쪽에서는, 1953년 여름의 긴축재정으로 인해 둔해진 프랑스 경제를 깨우기 위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1954년 2월부터 에드가 포르는 “안정 속의 성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 후 2년간, 공무원들의 봉급은 14% 인상됐다. 정치 및 행정 엘리트들이 작성한 공동보고서에서 언급된 퇴직연금에 관한 특별 조정안은 그로부터 40년 넘게 줄곧 쟁점으로 이어졌다.
글·미셸 피쥬네 Michel Pigenet
팡테옹-소르본 파리 1대학 명예 교수. 다니엘 타르타코프스키와 함께 <Histoire des mouvements sociaux en France. De 1814 à nos jours(프랑스 사회 운동의 역사. 1814년부터 오늘날까지)>(La Découverte, Paris, 2012.)를 공저했다. 본 기사에 이용된 자료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953년 8월의 파업들>을 참고한 것이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본 기사에 삽입된 사진들은 1953년 8월 파리에서 촬영된 것임.
(1) 1953년 6월 3일, 르네 마예르 정부 사임 2주 후, 국회에서는 314표 대 301표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의회대표 입후보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