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콜롬비아에 평화가 깃드나

2017-09-28     그레고리 윌페르 | 언론인

반세기 이상 계속된 내전을 종식하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는 제1반군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제2반군인 민족해방군(ELN)과도 한시적인 정전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는 평화 분위기에 한껏 취해있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지난 9월 4일 TV 연설에서 정부와 ELN 간 정전이 10월 1일부터 내년 1월 12일까지 102일 동안 발효된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는 교황의 콜롬비아 방문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9월 6∼11일 수도 보고타와 제2도시 메데인, 비야비센시오, 카르타헤나를 방문했다.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최초의 중남미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초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반세기 넘게 계속된 내전을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에 합의하면 콜롬비아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산토스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6일 FARC 지도자 론도뇨와, 총탄을 녹여 만든 펜으로 4년 가까이 진행된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농민반란으로 시작돼 52년간 계속된 내전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0월 2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평화협정은 찬성 49.78%, 반대 50.21%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콜롬비아 평화협정의 정신을 지켜 평화를 이어가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산토스 대통령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콜롬비아 정부와 FARC는 재협상에 나섰고, 지난해 11월 24일 52년간의 내전을 끝내기 위해 310페이지로 이뤄진 새로운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평화협정 투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양측이 협상에 임하게 된 이유, 특히 협상이 이뤄진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콜롬비아는 52년간 내전으로 국가기능이 거의 마비됐기 때문에 4년간의 협상으로는 주요언론에서 다루듯 정치적 마비 상태를 타개하는 것은 충분치 않았다. 무장혁명군(FARC)과 정부가 평화협상을 시작한 것은 양측 모두 군사적 해결이 불가능함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 무장혁명군은 그간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특히 알바로 우리베(2002~2010) 전 대통령은 혁명군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이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서 높였다. 현 대통령인 후안 마누엘 산토스는 당시에 국방부 장관이었다. 정부는 공세만으로 문제 해결이 충분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세자르 가비리아 대통령(1990~1994)이 시작한 ‘경제개방’ 정책 이후 콜롬비아는 관세 인하, 규제 완화, 민영화, 무역 자유화와 수출지향 생산(2) 등 보다 ‘매력적인’ 경제를 만들어 국제교역에 더욱 참여하길 원했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 전환에 내전은 걸림돌이었다. 무장혁명군과 여타 반군세력들은 지주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명목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와 탈취를 빈번히 자행했다. 기업들은 그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큰 비용을 써야 했다. 또 다른 결정적 요인으로는 1990년대 초반 이후 결성된 콜롬비아 연합자위대(AUC)와 같은 극우 민병대다. 이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운 목표는 게릴라와 싸우는 정부를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정치 암살을 대대적으로 행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정착지에서 쫓아냈다. 농민들이 토지 기반의 과두정치와 수출을 위한 농업과 광업 확대를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민병조직과 신자유주의가 복합적으로 얽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요인은 나름 효과적이었지만 결국 그 효용 가치를 잃었다. 2010년 초반 국제 신자유주의 엘리트를 상징하는 산토스 대통령은, 당선 후 그간 콜롬비아의 묵은 체제를 ‘근대화’하길 원했다. 무장혁명군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2년 9월 하바나에서 열린 회담은 여섯 가지 야심 찬 목표(3)를 가지고 있었다. 휴전절차를 결정하는 것, 22만 명 내전 희생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 마약밀매 문제 해결, 내전 발발의 주요인 중 하나였던 농촌빈곤 및 농촌발전 추구, 반군들의 정치참여 및 이들이 평범한 국민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 마지막으로 합의 내용 전체의 이행과 후속 조처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협정의 정당성을 우려한 산토스 대통령은 최종 문서의 공식화로 국민 투표를 제안했다. 무장혁명군은 당초 주저했으나 결국 이를 수용했다. 

 평화협정은 경제구조의 변화나 인구의 1%가 전체 토지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토지 불평등과 같은 문제 해소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내전의 근본 원인들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단지 현상을 유지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내전 이전 상황으로 복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전으로 대거 이주해야 했던 수많은 콜롬비아인들을 고려해볼 때 협상자들은 토지 회수가 민감한 문제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당장 평화협정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매우 짧은 시간에 300페이지가 넘는 서류를 완성해야 했다. ‘찬성’ 진영에는 약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국가 경제와 관련, 산토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낮다는 점이다. 실업률은 9%, 인플레이션은 7%에 달했다. 투표가 이뤄지기 몇 주 전, 대통령 지지율은 겨우 20%를 넘기는 데 그쳤다. 결국 ‘찬성’이 우세했던 국민 여론조사만 보고 지지자들은 승리한 것으로 믿었고 반대의견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 반대파의 캠페인은 아주 쉬웠다. 투표를 며칠 앞둔 시점, 반대진영 수장 후안 카를로스 벨레즈는 일간지 <La República>와의 인터뷰 도중 예기치 않게 협상의 내막을 매우 상세하게 폭로했다.(4) 허위정보들을 유포하면서 ‘분노’를 촉발하는 것이 주요전략이었다. 예를 들어 반대파는 다른 수입원이 없는 무장혁명군 일원들이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이 끊임없이 지적한 보조금 규모는 월 212달러로 최저임금의 90%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더욱 위험한 주장은 협정내용 중에 전체 인구의 30%가 가톨릭인 콜롬비아에서 동성 간 결혼을 합법화하는(5) 조항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협정문은 그 어떤 결혼이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와 같은 허위 사실 유포자들은 평화협정이 콜롬비아를 쿠바나 베네수엘라와 같은 ‘아류 카스트로’ 국가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가장 강력한 주장은 임시 사법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무장혁명군들이 자백한 죄에 대한 감형이나 면제를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항은 언론을 통해 내전 소식을 편향적으로 접한 국민을 동요시켰다. 

 알렉산드라 가르시아 연구자가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주요 매체(El Tiempo, El Colombiano, El Heraldo, etc.)에 실린 500개 기사를 조사해 보니 극우조직들로 인한 폭력사태를 다룬 기사의 75%에서 극우 단체명은 등장하지 않고, 대신 ‘무장한 사람들’ 또는 ‘복면을 한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게릴라가 연루된 폭력사태의 경우 기사의 60%가 게릴라 반군세력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따라서 국민의 32%는 무장혁명군을 콜롬비아 폭력사태의 주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연구에서 콜롬비아 내전의 책임비중은 정부가 가장 높으며 일반 국민, 극우 민병대, 마약 밀매자, 마지막으로 게릴라(6) 순임에 이견이 없다. 

 캠페인 내내 반대진영 대표 인사인 우리베 전 대통령은 임시 사법 프로그램 조항과 관련해 끈질기게 반대를 표명했다.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같은 이유로 반대파를 지지했다. 그들은 내전 동안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시인한 무장혁명군 일원들에 대해 징역을 대신해 단순 노역이나 거주지정으로 감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살바도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체결된 것과 같이 평화협정 대부분은 이와 같은 속죄 사법 조치들을 고려한다. 

 평화협정에 대한 우리베의 적대감은 아마 인권감시 단체와는 다른 동기일 것이다. 우리베가 안티오키아 주지사에 이어 대통령 재직 시 인권과 관련한 그의 성과를 따져보면, 그에게 정의는 주요 관심 사안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게다가 2005년 대통령일 때 지금의 무장혁명군에 대한 조처보다 더욱 관용적인 임시 사법 체제를 우파 민병대에 베풀지 않았는가? 

 우리베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토지반환 문제였다. 우리베는 강제이주를 당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줘야 할까 전전긍긍하는 과두정치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 부결 후 우리베는 이 주제와 관련한 핵심조항 변경을 발표했다. “평화협정은 대규모의 상업적 토지생산과 농업발전 및 국가 경제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하며 이를 국가가 의무적으로 진흥시킬 의무가 있다.”(7) 우리베에 따르면 쫓겨난 농민들의 소유였던 방치된 개인 토지 몰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전 토지 주인들이 민병대의 침입이나 내전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이런 토지를 ‘선의’를 갖고 매입한 이들이 토지를 되돌려주도록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평화협정 인준이 부결된 것은 낮은 투표 참여율도 한몫했다. 전체 투표권자의 63%가 투표에 불참했고, 18%만이 ‘반대’를 택했다. 10월 2일 해안지방을 강타한 악천후도 이와 같은 대규모 불참의 한 원인이었다. 막달레나 주는 75%, 과히라는 80%나 투표에 불참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사회가 탈정치화됐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최근 역사에 점철된 폭압과 언론 통제의 결과인 것이다. 극우파 민병대들이 쌓아 올린 ‘죽음의 탑’은 인권 수호와 저항 세대를 전멸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콜롬비아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저조한 투표율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대진영의 승리로 양 진영은 편치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됐다. 무장혁명군은 협상에 다시 임할 준비가 돼 있지만 반대자들의 핵심 사안인 임시 사법 사안과 관련해 재논의하지는 않을 것을 분명히 천명했다. 반대자들도 역시 살얼음 걷듯 신중했다. 우리베는 임시 사법에 대해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실은 토지반환을 반대하는 것이다. 산토스 대통령은 사법 관련 부분을 미미하게 수정하고 농업 문제에서 무장혁명군의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면서 협정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게릴라들은 2011년 가결된 토지반환에 관한 법 이행에 더 크게 노력하는 방향으로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콜롬비아 전역에서 시민사회 진영은 원래 서명한 대로 정부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평화협정 이행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보고타 주요 광장을 점거하고 ‘반대파’들의 캠페인을 비난하면서 평화협정안에 대한 국민투표 부결을 대법원에 소원할 것을 요구했다. 201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정당성을 한층 부여받은 산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재협상에 나서 새로운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평화 프로세스를 마무리 지었다. 또한, 이번엔 제2반군 게릴라 단체인 민족해방군 (ELN)과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102일간의 정전에 합의함으로써 평화정착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4년 시작된 좌파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으로 지금까지 사망자 20만 명 이상, 이재민 8백만 명, 그리고 실종자 4만5천 명이 발생한 콜롬비아. 이 콜롬비아에, 마침내 평화가 깃들 수 있을 것인가?  


글·그레고리 윌페르 Gregory Wilpert 
<Real News Network>(www.therealnews.com)의 제작자. 주요 저서로 <Changing Venezuela by Taking Power>, <The History and Policies of the Chávez Government>(Verso, Londres, 2007) 등이 있다. 

번역·박지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본지 편집위원  

(1) ‘왜 콜롬비아는 평화를 믿게 됐나(Pourquoi la Colombie peut croire à la pai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10월호.
(2) Forrest Hylton, ‘Peace in Colombia: A new growth strategy’, NACLA Report on the Americas, vol. 48, n° 3, New York, 2016.
(3) Maurice Lemoine, ‘콜롬비아, 정의도 평화도 없다(En Colombie, pas de justice, pas de pai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3년 2월호.
(4) ‘El No ha sido la campaña más barata y más efectiva de la historia’, <La República>, Bogotá, 2016.10.5.
(5) 2016년 4월 콜롬비아 대법원은 결혼을 이성커플에게만 한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6) Adriaan Alsema, ‘How Colombia’s newspapers consistently misinformed the public on the armed conflict’, <Colombia Reports>, 2016.10.18 www.colombiareports.com
(7) Adriaan Alsema, ‘Uribe formally presents proposals to revive Colombia peace deal’, <Colombia Reports>, 201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