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예술로 테러에 저항하다

2017-09-28     마리나 다 실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10여 명의 청년들이 아무 말 없이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무너진 건물의 파편과 잔해를 쓸어낸다. 그들이 현장을 뜨자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어둡고 적막한 침묵 속에 남겨진다. 바닥에는 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의 얼굴 위로 마지막 생명의 빛이 스쳐간다. 


누더기를 걸치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동료로 보이는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양팔을 따뜻하게 붙든다. 동료의 팔 안에서 그의 육체가 경련을 일으키며 움츠러든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동료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넓은 두 팔로 죽어가는 이를 감싸 안은 채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애쓴다. 이 강렬하고 충격적인 발레 작품은 20여 분간 밀도 있게 펼쳐진다. 이윽고 코란이 흘러나오면서, 이제 장례를 치르고 그가 사후세계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모두 기도할 시간임을 알린다.

“우리는 항상 죽음과 가까이 있다”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문타다 엘-마스레(Muntada El-Masreh)에 입장한다. 이라크 첫 정부(1920년)의 총리직을 지낸 아브드 알-라흐만 알-길라니가 살던 저택을 2009년 극장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모니움(Amonium)>에 긴 박수를 보낸다. 알리 다임은 카라다(Karrada)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이 무용 작품을 만들었다. 2016년 7월 3일 라마단 기간이 끝나갈 무렵, 다수의 시아파 교도들과 극소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하는 바그다드 중심부에 위치한 서민 구역에서,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를 실은 트럭이 폭발해 3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부분은 라마단 단식 후 가족들끼리 즐겁게 식사를 하던 이들이었다. “더없이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연출가는 말한다. 그 역시 카라다 테러로 지인들을 잃었다.

2017년 5월 29일, 또 한 건의 차량 폭탄테러가 카라다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교량 근처에서 폭탄을 실은 또 하나의 차량이 폭발했다. 그 다음날에는 약 200km 떨어진 후이(Hui)에서 테러 사건이 또 발생해 40여 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는 라마단 기간이 시작된 지 3일째였고, 이라크 북부의 모술(Mossoul)에 은신해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 IS는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1년 전인 2016년 7월의 악몽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무려 380회의 테러가 발생했었던 2015년과 비교해보면 최근 몇 개월간 바그다드의 분위기는 상당히 안정돼 보인다. 바그다드 시민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과 긴장이 드리워져 있지만, 과거처럼 격렬한 테러반대 시위를 벌이지는 않는다. 배우인 야히아는 말한다. “이곳 사람들 중 전쟁이나 테러로 가까운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죽음 곁에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숨어 지낼 수는 없습니다. 비극의 현장으로 되돌아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재건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민병대와 마피아의 폭력, 단수와 단전, 도심의 극심한 교통체증, 지속되는 통제, 도시 미관을 저해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들, 온 사방에 깔린 공권력과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1)

전쟁, 이라크 연극의 단골 소재가 되다

‘살인·질식·소음.’ 라술 아바스의 무언극 <노이즈(Noise)>의 주제다. 방독면, 각종 표지판, 빗발치는 탄환들… 그리고 자유롭고 해방된 신체들이 마치 반란을 일으키듯 삶과 분노의 춤을 춘다. 무대 위 젊은이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국가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라크에서 태어나 전쟁의 소음과 광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자란 세대다. 1990년대 금수조치의 혹독한 대가도 치렀다. 금수조치는 당시의 이라크 사회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으로, 그 여파로 나타난 빈곤과 탈구조화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젊은이들은 매일 마주하는 자신들의 일상을 파격적인 연극을 통해 표현한다. 연출자는 말한다. “리허설 중에 테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재빨리 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페크레트 살람의 <햄릿 1983>은 덴마크 왕국의 몰락과정을 이라크 현대사회에 투영시킨다.(2) 이 작품은 특히 햄릿의 복수심을 불타게 만들었던 복잡한 가정사를 설명함으로써, 이라크의 고질적인 문제인 폭력과 부정부패뿐만 아니라 이라크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억압적 분위기, ‘과부는 남편의 형제와 재혼해야 하는 현실’을 비판한다.(3)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이라크에서 흔히 있어왔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었다. 여성들은 재혼상대를 선택할 수 없고, 젊은 남성들은 어두운 미래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모두들 엄격한 관습에 묶인 보수적인 사회의 덫에 걸려서 허우적댄다. 게다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점령 이후 민족적 및 종교적 소속에 기반한 정치적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이라크 사회의 보수성은 한층 더 강화됐다.

바그다드 국립극장 소속 연출가이자 다수의 국제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아나스 압에사마드는 최근에 <Taubek(비난)>을 선보였다. 대사가 없는 이미지 연극으로, 각종 지표, 기호, 그림들이 등장한다. 종교적 갈등, 지하디스트 게릴라, 시민들의 분노와 복수심을 부채질한 미국의 개입 등으로 분열되면서 폭력성과 잔인함이 일상화된 이라크 사회에의 우려를 나타낸다. 이란/이라크전쟁(1980~1988), 걸프전쟁(1990~1991), 금수조치(1990~2003), 영미군의 침공 및 점령(2003~2011), 그리고 최근 알카에다와 IS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이라크의 모든 연출가들은 경력이 길든 짧든 1990년대부터 쉴 새 없이 이어진 온갖 전쟁들을 작품의 단골 소재로 삼는다.

 
 
히잡 대신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오르는 여성들

2017년 4월부터 여성 최초로 문화부의 연극 및 영화 총괄직을 맡게 된 이크발 나임이 기획한 축제에서 우리는 6개의 작품들을 관람했지만, 여성이 배우로 등장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국립극장 벽면을 가득 채운 빛바랜 사진들 속에는 여성들이 많이 있어, 이라크 연극계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임은 이라크의 국민 여배우로, 이제껏 망명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는 순수미술대학의 연극과 총괄자이자 연출가인 하이뎀 압델라자크와 함께 일종의 연극훈련학교인 파다 아탐린 알모스타미르 회사(Training Space Workshop)를 세웠다. 이 연구소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으며, 예술가들을 모아서 교육시킨다.

“2003~2010년에는 바그다드에서 연극다운 연극이 상연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극장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약탈당하고, 점령당했지요. 그러나 폭발과 테러 속에서도 예술가들은 후손들에게 연극작품과 연극공간을 물려주겠다는 일념 하에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2013년 이후부터 수준 높은 작품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고, 극단들도 재조직되고 있습니다.”

젊은 극단들의 주요활동 지역은 문타다 엘-마스레흐에 집중돼 있다. 나임은 이 지역을 창작과 공연의 공간으로 만들고, 필요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연극은 집단적 열망을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입니다. 유럽인들은 이라크의 젊은이들이, 이민을 꿈꾸거나 군인이나 극단주의자가 돼 이라크에 남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여기, 이라크에서 미래를 펼치기를 원합니다.” 

최근 동료들과 팀을 결성하고 작업실까지 마련한 25세의 배우, 압달라의 소망도 그렇다. “저의 생활터전은 이곳입니다. 프랑스나 그리스 등지로 떠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최근에는 거리 공연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접해보지 못한 문화를 맛보여 신기해하고 무척 즐거워합니다.”

젊은 여성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듯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여성들은 점차 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바스마와 레드하브는 선구자다. 바스마는 평생 히잡을 착용해 왔지만,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그가 히잡을 쓰고 연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대학교 4학년생으로 이미 배우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바스마의 언니 레드하브는 말한다. “공공 장소에서 여성이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행위는 이슬람 사회에서는 “저항”과 “투쟁”의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여성은 이슬람 보수주의자들과 민병대의 가장 손쉬운 타깃이었습니다. 납치와 강간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요.”

테러의 잔해 속에 감춰진 보석들

사실 ‘저항과 투쟁’의 흔적들은 바그다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토록 많은 테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꿋꿋하게 다시 일어섰던 바그다드 자체만 봐도 그렇다. 또한,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바그다드 시민들과 젊은이들이 2015년 경비가 삼엄한 바그다드의 중심구역 ‘그린존’에 진입해 부정부패의 척결과 족벌체제의 타파를 외쳤던 것도 그렇다.

2016년부터 문화·관광·고고학부 장관으로 있는 페리야드 라웬두리는 최우선 과제가 국가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라크의 바닥난 재정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모든 프로젝트는 중단됐습니다.” 문화 분야에 할당되는 연간예산은 총 국가예산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 중 76%는 인건비, 16%는 기타 경비로 지출된다. 순수하게 예술발전에 쓰이는 금액은 4백만 달러 정도다. 비록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는 없고, 스스로가 시시포스(영원히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음)처럼 느껴질 때도 많지만, 라웬두리 장관은 이라크 내 문화활동의 활성화, 그리고 해외교류 재개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는 문화적 개방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미래의 열쇠는 젊은이들이 쥐고 있고, 우리 모두는 교육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연출가들은 금수조치와 해외여행 금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지만, 새로운 기술의 습득이나 장비 사용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게다가 현재 이라크 정부는 영화 제작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각자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는 인구 7백만 명의 대도시 바그다드에, 영화관이라고는 세미나리스 단 하나 뿐이다. 그리고 최근 개관한 아동용 상영관이 하나 있다.
만남과 영화 상영을 위한 공간 아트 시티(Art City)에서 제작자이자 연출가로 일하는 히크마트 알비단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최근 단편 및 초단편 영화제를 기획했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영화제에 참여한 관객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았다. 알비단은 이라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 뛰어난 창의력을 보여준 감독들과 영화들을 발굴해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4) 메즈드 하미드의 무언극 <바그다드의 사진사>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뿐만 아니라 모든 저항과 사랑의 몸짓들을 탐구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손가락들의 가벼운 스침 등 섬세한 시를 닮아있는 이 영화는, 따뜻한 감동을 제공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삶에 대한 고집을 전달해주는 듯하다. 루에이 파드힐 아바스는 처음으로 성적 및 실존적 욕구가 깨어나는 유년기 시절을 은유적인 성격의 두 작품 <솜(Cotton)>과 <립스틱(Lipstick)>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낸다. 2013년에 바그다드의 아랍문화수도 선정 기념 지원금을 받았었던 영화감독 이남 압델하미드는 <Shuruk(자각)>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고단한 삶을 밝혀주는 두 여인들 간의 사랑과 우정을 은밀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선으로 뒤쫓는다. 
화가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자기 집 마당 또는 18~25세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이라크 조형예술협회(Iraki Plastic Arts Society) 등 공동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연다. 열악한 작업환경에도 불구하고 회화, 소묘, 캘리그라피, 판화, 조각, 저부조, 도자기 등을 통해 다양한 표현력과 스타일, 화려하고 강렬한 컬러, 구상파와 추상파, 강력한 힘을 선보인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역동성도 빼놓을 수 없다. 바그다드 시내의 삭막한 회색 벽을 고통과 분노, 웃음과 조롱으로 뒤덮는다.

2007년에는 지성인들과 다양한 독서 취향을 가진 애독자들이 즐겨 찾는 알-문타나비 거리의 북마켓에서 테러가 발생해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바그다드 시민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테러가 일어났던 현장에 모여, 시간이 멈춘 듯한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이반 아라비(Iban Arabi), 마흐무드 다르위치(Mahmoud Darwich), 나지크 알말이카(Nâzik Al-Malâïka), 샤커 아스사얍(Châker As-Sayyâb), 알 자와히리(Al Jawâhiri)의 시를 낭송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나 르네 지라르의 작품을 읽기도 하고, 편집과 번역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바그다드의 역설입니다.” 바그다드를 떠나자마자 바그다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하이뎀 압델자라크가 말한다. “바그다드는 테러의 잔해들 속에 반짝이는 보석을 감춰놓고 있습니다. 바그다드에서의 삶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그는 프랑슈콩테주 브장송의 국립연극센터를 이끌고 있는 셀리 포트와 함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Oresteia) 프랑스-이라크 버전을 연출하고 있다.(5) 바그다드와 프랑스를 오가며 만들어진 ‘오레스테이아를 찾아서(Looking for Oresteia)’에는 이라크 배우들과 프랑스 배우들이 등장해 각각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대사를 한다.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비극적인 흐름과, 이라크와 프랑스가 동시에 겪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Siwa’ 덕분에 실현이 가능했다. Siwa는 현대 아랍세계를 위한 일종의 예술 연구소다.(6) 야구타 벨가셈이 2007년 설립한 이 예술 플랫폼은 튀니스와 바그다드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아랍세계 예술가들과 프랑스 예술가들 간의 교류 활성화가 주목적이다. “유럽인들에게 이라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테러와 공포로 대변되는, 유령 같은 나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과 달리, 이라크인들은 여전히 모든 분야에서 높은 지적 열정과 성숙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문화와 창의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이라크 국민들은 아랍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8년에는 <오레스테이아를 찾아서>의 다음 공연을 브장송 국립연극센터에서 보다 이라크에 초점을 맞춘 형태로 상연될 계획이다.(7)  


글·마리나 다 실바 Marina Da Silva
사회학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피터 할링, <이라크, 모래성을 쌓았나>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9월호·프랑스어판 2016년 8월호.  
(2) 본 연극 작품은 Arras-Douai의 Tandem scène nationale에서 2017년 말에 상영될 예정이다. 
(3) 왕이었던 햄릿의 아버지는 동생에게 암살당했고, 그 동생은 자신의 형수인 햄릿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4) Akram Belkaïd, <Homeland, de l’attente à l’effroi(다큐멘터리 영화 홈랜드[Homeland], 기다림에서 공포까지)>, Horizons arabes, 2016년 4월 19일, http://blog.mondediplo.net
(5) 튀니지 출신의 철학자, 인류학자, 고대 그리스 전문가 유세프 세딕의 새로운 번역본(직전 번역본은 1936년 출판) Dans une nouvelle traduction -la dernière datait de 1936- de Youssef Seddik, philosophe et anthropologue tunisien, spécialiste de la Grèce antique.
(6) www.siwa-plateforme.org
(7) 2018년 9월의 마지막 주, www.cdn-besancon.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