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여성 혐오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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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앙리 텡크 | 종교전문가

종교를 뒤흔드는 여성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 종교란 달갑지 않은 존재다. 여성혐오증이 종교에서 시작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리들도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反)종교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확대된 경우도 많다. 반면 여성 신도들은 오래전부터 종교체제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들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평등주의 관점에서 경전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과연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에 변화를 가져왔는가? 종교적 페미니즘과 비종교적 페미니즘은 양립할 수 있을까?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그저 멸시하려고 만든 것일까?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일신교들의 경전이 남성적 헤게모니와 조직적인 여성 혐오의 온상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국의 문 앞에 사람들이 두 줄로 서 있다. 이 중 긴 줄에는 수백 명의 남자들이 몰려있다(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신 앞에 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평생을 아내한테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또 다른 줄에는 딱 한 명의 남자가 있다. 신이 그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아내가 시켜서 이 줄에 섰을 뿐입니다.” 이는 유대인들끼리 하는 오래된 농담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듯 보이는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런 유머와 조롱이 일신교들의 성차별에 맞설 마지막 무기인 것인가? 지난 한 세기 동안 페미니스트들이 외친 분노의 목소리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전통 유대교인들은 여전히 “주님, 저를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는 아침기도를 한다. 사실 유대교에는 613개의 율법이 있는데, 남자들은 ‘운 좋게도’ 이 모든 율법을 따라야 하는 반면, 여자들은 이 의무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다! 면제라는 말로 결국 여성을 배제시킨 것이니 말이다. 일례로, 여성은 유대교 예배의식에서 발언할 권리가 없다. 탈무드 연구학자 릴리안느 바나에 따르면, 이는 할라카(유대교 법)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공적 세계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유대교의 ‘남성 우월적이고 성차별적인 비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톨릭교의 상황은 이보다 나을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 생피에르 성당의 벨기에 출신 추기경이 “도대체 인류의 절반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라워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교회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자리에 온통 남자들만 줄지어 앉아있었던 것이다. 물론, 1960년대부터 여성 평신도들의 교육 및 학력 수준이 높아지면서 본당 평의회와 주교 평의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됐고, 더 나아가 로마 교황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여성들은 교리교육에서 핵심적 임무를 수행하며, 사제들에게 은퇴를 권고하고 신학을 가르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미사에서 설교를 할 수는 없다. 

결국 ‘교회당’ 안에서의 권리는 얻었지만, ‘교회’ 안에서의 권리는 얻지 못했다. 개혁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사제·부사제 서품과 대부분의 결정기관에서 소외되고 있다. 여신도들은 성례에 참석할 신도들을 준비시키지만, 성례 자체는 남사제들만 집전할 수 있다(정교분리 이전의 교회는 여성 혐오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 ‘해방’이 시작되고 공의회를 통해 평신도의 역할이 확대되자, 정치·산업·언론업계의 남녀평등 수준이 개선된 것을 모른 체하던 교회도 더는 귀를 닫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안느 수파의 표현을 빌리면, 교회 내에 ‘진정한 여성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카멜 다우드의 글을 보면, 가톨릭 여신도들보다 더 상황이 어려운 이들이 있다. 바로 이슬람교의 여성들이다. 그에 따르면, “알라의 세계에서 여자는 부정, 거부, 살인, 은폐, 유폐, 소유의 대상이다.” 사실상 코란은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또한, 여성에게 혼전순결을 강요하며, 생리 중인 여성은 ‘불결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남자의 법정 증언은 여자의 증언보다 가치가 두 배 더 높으며, 상속문제에 있어서도 아들이 딸보다 두 배 더 많은 재산을 물려받도록 돼 있다. 코란 4장 34절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신이 부여한 특권에 따라 남자는 여자에 대한 권위를 가진다. 여자의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는 훈계하라. 여자를 가두고 매질을 하라.”

 

인류를 위한 두 개의 성별

 

그렇다면 일신교들은 여성에게 재앙과도 같은 존재인가? 이들이 여성에게 재갈을 물린 것인가? 우리는 이 명백함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일신교들의 경전은 특정 시기에 작성돼 여러 문화권을 거쳐 전승됐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규율들이 초기 문명, 즉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문명을 거치면서 ‘조작’됐다는 것이다. 랍비인 델핀느 오르빌뢰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경전이 어떤 사실이나, 그와는 정반대되는 사실을 전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일이면서도 상당히 쉬운 일이다. 구절이 삽입되는 문화적·역사적 맥락도 고려치 않고, 그것을 말하고 또 받아들이는 이가 누군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설명이 뒤따른다. 첫째, 수많은 성차별적 내용을 정당화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천지창조(창세기) 이야기에서 여성이 하등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은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1장 27절) 이들에게 아담이라는 남성형이자 여성형인 속명(屬名)을 붙이셨다. 이후 성적 이원성이 생겨나긴 하지만(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태어났다),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이 남성형으로 식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여자와 남자에게 육체와 영혼을 주셨다. 염색체 구성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다시 말해 인류는 남성이자 동시에 여성인 것이다. 

한편, 이슬람교에는 여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유혹과 타락에 관한 장면이 코란에 나오긴 한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아담을 타락시키게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신은 이 둘 모두를 용서하신다.(코란 35장 18절) 게다가 코란은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행동에 따라 동등한 판결을 받는다. 코란 33장 35절의 “무슬림 남자와 무슬림 여자는, 남신도와 여신도는, (…) 신께 많은 기도를 드리는 남자와 여자는”이라는 구절에서도 종교상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 성경, 탈무드, 복음서, 코란은 수 세기 동안 남성적 헤게모니, 독단적이고 차별적인 구조, 조직적인 여성 혐오, 여성에 대한 반감 등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을 존중하라고 권장하는 구절들도 발견된다. 창세기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2장 18절)라는 구절이 나온다. 유대교에서는 사랑을 찬양하고, 성욕과 성행위를 찬미하고, 결혼을 권장한다. 탈무드는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긴 하다. “여자에게 토라(모세5경)를 맡기느니 차라리 태워버리는 게 낫다”며, 여성을 가볍고, 수다스럽고, 게으르고, 질투가 많은 존재로 그린다. 그러나 그런 탈무드에서도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 그 유명한 에베소서 5장 22절에 나오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라는 구절을 확대해석해, 윤리적으로 기혼여성에게 순종의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스러운 예식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하게 권하며(에베소서 5장 28절), 남편은 아내를 버려선 안 되고(고린도전서 7장 11절),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갈라디아서 3장 28절). 사실이 이러할진대 어찌 이 모든 것을 망각해버렸단 말인가?

이슬람교에서도 여성을 가혹하게 대할 때가 있다. “아내는 너희를 위한 경작지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너희의 경작지로 가라.”(코란 2장 223절) 그러나 가혹함을 누그러뜨리고, 사랑과 관대함을 권유하며, 남편에게 아내를 잘 돌보라고 요구하는 구절들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무함마드도 이렇게 말했다. “밤에는 아내와 부부관계를 맺을 터인데 어찌 너희가 노예를 때리듯 아내를 때릴 수 있단 말인가?” 

셋째, 일신교들의 경전을 보면, 여자들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창세기 21장)고 말씀하셨다. 유대교에서도 세계를 바꿀만한 능력을 가장 많이 증명해 보인 이들도 사라, 레아, 라헬과 같은 “훌륭한 여자”, 여왕, 여자 선지자, 여족장들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랍비 하임 코르시아는 “여자들이 없었다면 유대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보완적 역할이 무엇인지 증명해 보였고, 유대교의 정체성도 여자들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주변 여자들이 어떤 위치였는지도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죄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발을 씻어줬다. 그리고 십자가 바로 앞까지 예수와 동행한 것도, 예수가 부활한 날에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모두 그의 여제자들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마리아를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놓았고, 복음서의 여성 인물들을 세상의 무대의 여배우처럼 등장시켰다. 참고로 그는 1994년에 여성의 사제 서품을 ‘최종적’으로 금지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의 아내들은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대우를 받는다. 첫째 부인이었던 카디자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배우자이자 어머니였으며, 하프사는 코란을 맡아 보관한 인물이었고, 아이샤는 무슬림들의 ‘기억’이라고 불린다. 이슬람교의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나의 최고의 기쁨인 여자, 향수, 기도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이 여성 혐오적이라든지 또는 ‘페미니스트’라고 비꼬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한 시기에만 통했던 시대착오적 발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신교들의 경전은 종교적 폭력 등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위상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일종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성경과 코란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여성에게 긍정적인, 혁신적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명백히 차별적인 태도를 취한 부분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에 고착되지 않고 필요한 만큼의 임계거리를 두고 경전을 대할 때, 종교집단이 가지게 될(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다.

 
 

앙리 텡크| 종교전문가

<르몽드>의 종교담당 기자(1985~2008)로 활동했으며, <카톨릭주의; 교조주의자들의 귀환(Catholicisme ; le retour des intégristes)>(2009), <카톨릭교도들(Les Catholiques)>(2008), <이슬람을 살려라(Vivre l’islam)>(2003) 등 10여 권의 종교서적을 저술했다.

 
번역 | 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