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내부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

2017-09-28     가에탕 쉬페르티노 | 기자

본래 페미니즘 투쟁은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19세기부터는 교계 내부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의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토록 거룩한 종교와 이토록 대담한 파격 사이에 접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가능했던 것은 놀라운 용기와 재능을 바탕으로 독보적 위상을 차지했던 일부 특별한 여성들의 노력 덕분이다.”

1902년 샤를르 튀르종은 저서 『프랑스의 페미니즘』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서 역사학자인 필자가 말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운동, 즉 가톨릭 종교 내부에서 발현된 페미니즘을 의미한다.

본래 페미니즘 운동은 태동 당시 반종교적인 성격을 지녔다. 튀르종이 “두 영역의 접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19세기 페미니즘을 창시한 주요 인물들은 주로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부르주아나 사회주의자들로, 종교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그들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남성 지배』에 썼던 표현을 빌려 “철저히 가부장적 가치가 중심을 이루는 가족 윤리관을 주입한다”는 이유로 종교를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봤다.

183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인 외제니 니부아예와 제니 데리쿠르 등 개신교 지식인들이 1세대 페미니즘 물결을 형성했다. 그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교육권을 확대하며, 가족이나 사회 내 여성의 역할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했다. 19세기 중후반, 여러 여성 개신교 자선단체도 행렬에 동참했다. 20세기 초 프랑스 페미니즘의 첨병 역할을 하던 일명 ‘개신교를 위한 여성자선운동 및 단체 세계대회’를 주관한 것도 바로 이 개신교 여성들이었다. 역사학자 마틸드 뒤베세는 “개신교는 개혁을 통해 그동안 사제의 특권으로 간주되던 성경을 모든 이들이 읽을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를 내걸며, 여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세기 초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는 개신교의 청년교육이 가톨릭보다 더 활발히 이뤄졌다”고 분석했다.(1)

많은 유대교 여성도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 가세했다. “19세기 후반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유럽의 유대교 여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했다. (…) 유대교 여성의 참여는 이미 페미니즘 운동 초기부터 활발히 이뤄졌다”고 역사학자 뱅상 빌맹(2)이 설명했다. 특히 그는 여성 유대교도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난관을 지적했다. “빈이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많은 반유대주의 여성단체는 페미니즘이 유대교 교리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를 들며 페미니즘을 공격했다. 여성 유대교도는 프리메이슨단이나 사회주의 운동에도 따라붙는 지긋지긋한 꼬리표에 익숙해져야 했다.”

19세기 말, 유대교도나 개신교도가 이끄는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대립적으로, ‘가톨릭 페미니즘’이 탄생했다. 샤를르 튀르종은 가톨릭 페미니즘이 ‘사도’로 삼은 것은 마리 모주레 기자라고 기술했다. 1898년 ‘기독페미니스트협회’를 창설한 마리 모주레는 “기독교에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에 기독교를 접목”하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마리 모주레가 ‘프랑스여성민족주의연맹’의 창설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프랑스여성민족주의연맹’은 “유대인의 위험에 맞서 싸우는” 반드레퓌스파 성격을 지닌 단체였다.
각종 ‘여성자유노조’, ‘교회 내 여성과 남성’ 그룹, ‘국제잔다르크연맹’, 몬트리올의 ‘성 요한 세례자 연맹’ 등 가톨릭과 페미니즘을 동시에 표방하는 단체가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1932년 마리 게랭라주아 캐나다 수녀는 저서 〈가정으로 돌아온 어머니〉에 이렇게 썼다. “자유로운 이혼, 산아제한, 여성 개인의 삶 존중 등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항해, 교계는 기독 페미니즘을 꺼내 들었다. 기독 페미니즘은 일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그 전에 먼저 여성이 모든 의무를 충실히 다할 것을 강조했다.”

가톨릭 페미니즘 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령 1930년대 ‘여성정신연맹’을 비롯한 단체들은 여성의 사제서품을 요구하기까지 했으며, ‘부권’을 ‘친권’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거나, ‘출산의 의무’에 반대하며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반면 다른 가톨릭 페미니스트들은 오로지 시민이나 노동자 권리에 관한 문제만을 다루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교단 내부로부터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들은 여성이 신학 관련 논쟁과 교육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기를, 공동체 운영에 더 많은 중책을 맡을 수 있기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마리 에드몽과 프랑수아즈 방데르메에르슈 수녀였다.(3)

그러나 피임이나 낙태에 반대하는 교단의 입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누구든 교단 밖으로 영원히 쫓겨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톨릭 페미니즘이 일부 사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교단의 입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페미니스트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슬람 페미니즘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페미니스트들의 열망은 결코 서구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1848년 시인이자 신학자였던 이란여성 파테메 Fatemeh(국내에는 ‘타헤레’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음-역주)가 이슬람 머리두건을 쓰지 않은 채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관중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페미니스트로서의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그녀는 그로부터 4년 후, 암살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처형 직전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너희들은 원한다면 나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여성해방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 스테파니 라트 압달라에 의하면, 정작 이슬람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세월이 흐른 1990년대였다. 스테파니 라트 압달라는 저서 『종교적 규범과 젠더, 변이, 저항, 재형성』(201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경을 초월한 운동이 서서히 형성됐다. 가정 내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단체 ‘무사와’와 여성 지식인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초국적 협의체인 ‘세계여성자문위원회’, 바르셀로나 소재 ‘준타 이슬라미카’가 2005 ~ 2010년 개최한 각종 컨퍼런스 등 글로벌 조직망이 하나둘 구축됐다. 더욱이 이슬람 국가 안에서도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교계 내부에서부터 길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결국 이슬람 페미니즘은 나라별로 다양한 방식을 띠며, 시민사회, 사회운동, 정치운동 등으로 점차 확산됐다.”

이슬람 페미니즘은 각각의 운동이 처음 탄생한 국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어떤 이들은 종종 이슬람형제단과 가까운 매우 보수적인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 그들은 시민의 평등권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남녀차별은 문제 삼지 않았다. 반면 조금 더 진취적인 페미니스트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권리가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종류의 양성 불평등에 반대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적 페미니즘은 나름의 교리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70 ~ 80년대, 진정한 ‘여성 신학’이 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이어 1990년대에는 이슬람 페미니스트가 여성신학을 이끌었다. 그들의 목표는 여성에게 긍정적인 내용으로 성서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이 남성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물론 사도들이 전부 남성인 것은 맞지만, 예수의 사도들은 훨씬 더 “포용적이고 비위계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개신교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지적했다. 그렇다면 코란은 정말 가정의 권위, ‘키와마Qiwama’를 남편에게만 부여한 것일까? 이슬람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남성과 여성 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키와마’는 부부 중 가정을 건사할 능력이 나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종교적 페미니즘은 신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이라는 이론을 표방한다. 시카고 로욜라대학 신학과 부교수 수잔 A. 로스는 “오늘날 성서나 전례나 일상 속에 등장하는 남성화된 신의 이미지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페미니즘 여성 신학자들은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훨씬 절대적인 신비를 구현하시는 존재다”라고 설명했다.(4)

모든 교단의 페미니스트들은 투표권, 교육권, 노동권, 자립권 등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가령 마그레브 지역을 비롯한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조금씩 사라지는 추세이며, 여성의 법적혼인 연령도 점차 남성과 비슷한 수준으로 차츰 올라가고 있다. 교계 내부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감지된다. 1930년대 이후로 랍비와 사제(심지어 북유럽 국가에서는 주교까지)의 자리는 여성에게도 허락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수녀는 남성 수도사에 버금가는 권리를 누리게 됐고, 여성도 신학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남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유럽 등지에서는 여성 이맘(이슬람교 교단의 지도자 혹은 뛰어난 학자를 가리키는 직명 중 하나-역주)이 남녀가 동석하는 기도회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성이 이슬람교리 해석(파트와)을 내놓을 수 있는 무프티(이슬람 율법전문가)직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종교적 페미니스트에게는 여전히 수많은 장벽이 남아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여전히 남성 사제에게만 주어지며, 유대교에서의 ‘종교적 이혼 Guett’은 남편의 의사에 의해서만 성사된다. 또한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상속법은 남성에게 훨씬 유리하며,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과는 혼인이 금지돼 있다.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들이 있다. 종교역사학자 필립 포르티에는 말했다.

“중심부를 보면, 교계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변화에 심각한 저항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주변부’에서는 자유로운 교리 해석, 수평적인 삶의 규범 등을 기초로 한 비정통 교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흐름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에탕 쉬페르티노 | 종교담당 기자

종교적 사건들에게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서, 세상에 배제되고 소외된 사안에 대한 심도 있는 글을 주로 쓰고 있다. 유럽종교학연구소(IESR)와 프랑스 고등연구원(EPHE)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Lavie.fr, 2016년 3월 2일.

(2) Vincent Vilmain, Nelly Las, 〈Voix juives dans la féminisme. Résonnances françaises et anglo-américaines(페미니즘 속 유대교 여성들의 목소리. 프랑스와 영미권의 울림)〉, Honoré Champion Editions, 2011년.

(3) Anthony Favier, ‘Des religieuses féministes dans les années 68?(68년대 페미니스트 수녀라고?)’, 〈Clio. Histoire, femmes et so ciétés(클리오. 역사, 여성 그리고 사회)〉(온라인 게재), 59‒77쪽.

(4) ‘Féminisme et théologie(페미니즘과 신학)’, 〈Raisons politiques〉, 제4권,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