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내부의 시선으로 보면 교육부는 나름 선방해왔다. 군부독재가 문민화 되고, 이른바 보수와 진보가 정권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교육부가 통폐합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음이 이를 반증해준다. 과학기술이 지난 70년대 이래 우리나라의 발달을 실질적으로 추동해왔건만, 과학기술부가 도리어 교육부로 통폐합된 적은 있었어도 말이다.
게다가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급이다. 예산 비중도 결코 낮지 않다. 올해 교육예산은 전체예산의 1/8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국방 예산보다도 비중이 높다. 규모면에서는 적어도 21세기 이래로는 대체로 그랬으니, 이래저래 교육부는 선방을 거듭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교육부가 이렇게 줄곧 선전하는 동안 우리 교육도 선전을 거듭해왔을까.
답은 명약관화하다. 우리 교육은 여전히 악전고투 중이다. 그럼에도 교육부가 선전할 수 있었음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지니는 절대적 위상 덕분이지, 교육부가 잘해왔기 때문은 아니다. 그랬다면 교육부 폐지 목소리는 벌써 수그러들었을 것이며, 교육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민을 ‘개돼지’ 쯤으로 여긴 이가 고위관료가 된다거나 반교육적 처사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여한 고위직이 훈장을 받고 하위직은 승진과 해외파견 같은 이익을 누리는 적폐도 없었을 것이다. 교육부가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교육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평가도 당연히 널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다수 국민의 주요 관심사인 교육이, 누군가에게는 개인적 영달의 밑천으로 오용된 셈이다.
일각에선 교육부가 관료주의에 물든 건 아니라고, 그리 말하면 교육부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고 두둔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교육적으로 옳지 않다는 소신 하에 타당치 않은 정책을 요구한 장관에 끝까지 맞섰던 팀장 일화를 들곤 한다.(1) 그러나 이런 일들이 ‘미담’처럼 인용된다는 점 자체가 ‘교육부를 위한 교육부’란 초상을 역설적이지만 너무도 잘 드러내준다. 미담 속 주인공의 태도와 정신이 교육부의 기본이자 일상이었다면, 그 일이 가끔 있는 미덕처럼 운위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부는 스스로의 존재이유 입증에 실패한 셈이다. 교육부의 자기 정당화는 응당 자신의 본령인 교육 자체의 성과가 바탕이 됐어야 했기에 그렇다.
철학‘하기’의 외면이 부른 중등교육의 실종
이는 교육부가 그간 자기 조직의 생존과 성장에는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교육의 성장과 성숙, 자립 등에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시사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교육은 정치나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이고 자율적 생태계를 벌써 구축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부를 당장 없애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대선 때 있었던 정치권의 제안처럼 그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국가교육위원회’를 신설, 이를 교육행정의 중추로 삼자는 뜻도 아니다. 교육부를 현행처럼 존속시키거나 교육처 쯤으로 강등시키든, 국가교육위원회를 독립적 헌법기관으로 마련하든지 간에, 교육행정의 본령에 대한 철학이 실현되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기에 그렇다. 기구의 존폐나 신설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 아니라 관건은 어디까지나 그런 철학의 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의 수행이라 함은 교육에 대한 고차원적 사유와 속 깊은 통찰을 담은 철학을 구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철학을 생산하는 활동으로, 교육행정이 굳이 이를 행할 필요는 없다. 교육행정이 갖춰야 하는 철학은, 무엇을 하든 늘 교육의 차원에서 참교육의 구현만을 도모한다는 정신 하나로도 충분하다. 교육행정에 필요한 것은 이런 가장 기본적 철학을 실천하는 것, 곧 ‘철학하기’다. 이를테면 교육부에겐 교육이 기본이니 항상 교육의 본령을 가장 앞세우며 일상적으로 구현해감이 교육부가 했어야 할 철학하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행정의 골수이니, 이를 외면하면 교육은 뼛속까지 중병에 걸려 신음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 중등교육이 바로 대표적 사례다. 우리는 중등교육이 고등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종속적 자리로 밀려나 적잖은 세월동안 대학 진학용 소모품 정도로 소비돼도 크게 문제 삼아오지 않았다. 고등교육 이수자를 비유컨대 메이저리거로, 중등교육 이수자를 마이너리거로 여겨지는 상황을 그러려니 하며 애써 눈 감아왔다. 인문적 소양을 쌓고 창의적 역량을 길러 자율적이고 자족적 삶을 펼쳐낼 줄 아는 시민의 양성이 중등교육 목표로 설정됐음에도, 하여 그 지향대로라면 중등교육과정만 이수해도 누구나 다 자기 삶의 1군이자 우리 사회의 주전이 됐어야 함에도, 우리 사회에서 중등교육은 불구인 채로 장기간 방치돼 왔다.
물론 이를 교육부만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사뭇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서의 교육은 국가 발전에도 기여하고 개인적 성공도 보장해주는 출세의 통로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부의 교육부 수장마저 아무렇지 않게 ‘교육 사다리’를 운운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더욱 높은 위치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소비됐기에 그렇다. 게다가 고등교육 위주의 교육체계가 보인 효율성은 가히 대단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일궈낸,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우리 현대사의 성취는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교육, ‘자족적 생태계’를 요구받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앞서 나가는 선진국을 모방하며 추격하는 단계에 처했을 때의 이야기임에 유의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경제규모와 군사력 모두 세계 10위권 언저리를 꾸준히 유지해왔기에 그렇다.
이는, 우리가 벌써 어엿한 선진국이 됐어야 했음을, 더는 ‘개도국 코스프레’ 놀음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됨을, 필요에 따라서는 ‘제국적 스탠스’를 취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우리 문화를 보편문명에 걸맞게 주조해가면서 문화로 이런 성장을 선도하고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달리 말해 문화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주저앉게 되는 기로에 서 있기에 그렇다.
더구나 우리를 둘러싼 문명조건의 변동이 자못 획기적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말로 호도되기도 하지만, ‘빛의 속도로 연결되고 있고 고도로 지능화돼 가는’ 기계의 도움을 일상적으로 받는 시대를 살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아니,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이 그런 기계들에 의존하는 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간다움의 핵질인 정신, 심리와 생명 현상도 공학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지난 세기 말부터 강조되던 세계화는 당위나 목표가 아닌 일상의 기본으로 주어져 있으며, 대한민국 시민이자 세계 시민이란 정체성을 동시에 구비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도 부여받고 있다. 디지털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이룩된 ‘초연결(Hyper-connection)’ 네트워크 사회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작동되고 있으며, 생명공학과 나노공학 등의 진전에 힘입어 ‘100세 시대’의 본격 실현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식이 일상적 삶의 영위에 주요 밑천이 되는 지식기반시대가 전개된 지도 꽤 됐다. 중장년, 노년이 됐다고 해 ‘디지털 문맹’이 별 문제되지 않았던 시절이 저물고 있듯이, ‘평생 학습’ 해야 비로소 최소한일지라도 인간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게 됐다. 이것이 주변서 펼쳐지고 있는 우리 삶터의 실상이다. 이런 변화를 기존교육으로 선도할 수 있을까. 유아교육부터 초등, 중등교육 일반이 대학 입시로 수렴되는 기존 패러다임을 혁파하지 않고서도 이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해갈 수 있을까.
기존의 선진국이나 한창 변이 중인 문명조건은 소수 엘리트가 이끌고 다수 대중이 뒤따르는 패러다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상대적 소수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국민 다수가 자기 삶의 창의적이고 자율적 주인이 되지 못하면 뒤처지게 된다고 경고하기에 그렇다. 이제는 추격과 모방에 최적화된 국민(Nation)이 아니라 자유롭고 창의적인 세계시민(Cosmopolitan)을 양성해야 한다. 주어진 매뉴얼을 잘 따르고 조직에 자신을 맞춰갈 줄 아는 윤리학으로 무장된 인재보다는, 매뉴얼을 갱신하고 제작하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줄 알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윤리학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유아교육부터 초등, 중등교육 모두가 자율적이고 자족적이어야 하며 결코 다른 무엇을 위해 종속돼서는 안 된다. 특히 교육 생태계의 허리 격인 중등교육은 더욱 그래야만 한다. 그랬을 때 민주적이고 행복한 교육 생태계 건설을 목표로 한 새 정부의 교육정책도 온전히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의 당면한 과업이, 또 문명조건의 변이가 바야흐로 ‘자족적 생태계’로서의 교육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외면과 무능, 군림의 비기(祕技)
문제는 새 정부 출범 직후 있었던 수능개편안 사례에서도 목도되듯이, 사안이 이리 중차대함에도 교육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교육단계가 자족적 생태계로 우뚝 서는 일이, 외면과 짝패를 이루는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의 실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령을 실현코자 하는 ‘철학하기’가 교육부에서 ‘의도적’으로 외면돼온 이유다.
그간 교육부가 교육차원에서 보인 무능도 ‘계산된’ 무능이었다. 얼마 전 발표된 최근 5년 간(2013~2017년) 교육부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자 분석결과(2)가 밝히 말해주듯이 교육부를 위한 일에는 늘 그랬듯이 결코 무능하지 않았기에 그렇다. 적잖은 재원이 투입되는 2기 인문한국사업(HK+)도 마찬가지다. ‘일몰사업’이란 반인문적 구실 아래 지난 10년간 대규모 재원을 쏟아 부어 양성한 기존 인문한국 사업단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는 신규사업단만 선정한다는 방침 아래 정당한 평가과정도 없이 사업을 강제 종료시켜 빼어난 연구자마저 거리로 내모는 계산된 무능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받은 신청 현황을 보니 2개 이상의 과제를 신청해 신청 사업비 규모가 상위 1위부터 5위에 오른 대학 모두가 공교롭게도 사학이다.
하여 절로 깨달아진다. 교육이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인문적 삶과 사회구현에 주축이 돼야 할 지금,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교육부 영혼에 교육, 그리고 이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연구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고, 철학하기가 한결 같이 방기돼도 교육관료가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까닭을 말이다. 겉으론 의도된 외면과 계산된 무능으로 보신하며, 속으론 교육과 국민 위에 군림하며 교육부를 살찌우는 것이 대대로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교육부의 남다른 ‘비기(秘技)’였던 것이다. 교육부가 정말로 무능해 교육의 본령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면, 교육부는 한참 전에 이미 과학기술부 등 다른 부처로 통폐합됐을 테니 말이다.
글·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20세기 전환기 중국의 문화민족주의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고대와 근대 중국의 학술사상과 중국문학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인문적 시민사회’ 구현을 위한 교양 교육과 인문 교육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1)관련 내용은 “교육부 국민 신뢰 회복하려면”(<세계일보> 2017. 9. 15일 자) 참조.
(2)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송기석 의원에 따르면 4급 이상 공무원 23명 중 96%가 유관단체나 사학에 낙하산으로 재취업하였다고 한다. 구체적 내용은 “산하기관 자리 꿰차는 교육부 퇴직 공무원들”(<세계일보> 2017. 9. 9일 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