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과 차이 - 구조주의

현대철학의 개념-뿌리들: 차이(1)

2017-09-28     이정우 | 철학자

‘차이(Difference)’란, 일상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또한 철학적으로도 매우 기초적인 개념으로서, 특히 현대사상에 이르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개념이다. 엄밀히 말하면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다. 더불어 ‘Differential’은 형용사형으로서, 앞의 말들과 운을 맞춘다면 ‘차이화하는’, ‘차이생성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차이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변별적(辨別的)’이라고도 번역한다. 일본에서는 ‘시차적(示差的)’이라는 번역어도 쓴다. 요컨대 “차이를 드러내는”이라는 뜻이다.


‘차이(差異)’라는 말이 함축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식주체에게 인식대상이 공간적 분절(Spatial articulation)과 더불어 포착된다는 것이다.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주체는 어떤 공간적 분절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간적 분절만이 아니다. 색(色)에서의 차이들을 비롯해 다양한 차이들이 분절돼 나타난다. 또 차이란 시간적 분절(Temporal articulation)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시간이 분절됨으로써만 생성, 운동, 사건 등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공간적 분절과 시간적 분절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각(覺)’하는 것은 그 자체 차이생성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차이들이 생성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다. 

객관적으로는 “차이가 생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차이생성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Quality’라는 말에는 이런 맥락이 깃들어 있다. 이 말의 앞에 나오는 ‘Qu-’라는 인도-유럽어 어근은 ‘겪음'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 말은 라틴어 ‘Qualitas’에서, 다시 이 말은 희랍어 ‘Pathos’에서 유래하는데, 바로 이 ‘Pathos’라는 말이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겪음을 통해서 차이들이 나타나고, 그런 차이들의 생성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도 ‘Modification(스피노자의 용어로는 ‘Affectio’)’, 즉 변양과 그것에 따른 ‘감정(Affect)’의 변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Affect’와 ‘Affection’의 관계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다는 점에 주의하자) 우리 신체가 사물들과 부딪쳐 끝없이 ‘변양(變樣)’되고 그에 따라 우리 정신이 끝없이 ‘감응(感應)’하는 것이 ‘삶’의 원초적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차이생성은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사실들 중 하나다.

학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이런 차이생성에 민감한 사유들과 그런 차이생성을 극복하고 어떤 동일성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 사유들을 만날 수 있다. 현대사상에서 후자의 전형적인 예를 구조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고, 전자의 전형적인 예를 베르그송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을 비롯해 다양한 ‘인간과학들(Sciences humaines)’이 세계의 심층적인 ‘구조’에 주목함으로써 차이들의 체계를 밝혀냈다면, 베르그송과 그 후계자들은 그런 합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차이‘생성’에, 시간의 근원적 의미에 천착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인 것(le symbolique)의 차원

구조주의 사유의 출발점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 어떤 언어적인 공간이 있다는 점에 있다. 근대철학이 주로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도를 가지고서 사유했다면, 구조주의는 제3의 공간 즉 ‘구조’가 존재한다는 발견에서 출발한다. 

주체와 대상을 상정해 놓고서 주체의 감각작용과 대상의 외적인 현상을 그리고 주체의 순수인식(‘노에시스’)과 대상의 본질(‘노에마’)을 대응시키는 것이 고전적인 인식론, 특히 플라톤 이래의 인식론의 전통이다. 데카르트 등 17세기 형이상학자들은 인식주체의 능동성을 보다 강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구도를 취한다. 이에 비해서 순수인식과 본질의 대응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전제를 내던지고, 대상 쪽에서 주체로 오면서 표상이 성립한다고 볼 때 ‘경험주의’가 성립한다. 영국 경험론이 대표적이다. 반면 오히려 주체 쪽에서 대상으로 나아가면서 주체가 자신의 인식 틀을 대상에 투영해 그것을 구성한다고 보면 칸트적인 구성주의 ― 매우 여러 가지 버전들이 있다는 점에 주의하자 ― 가 된다. 이상의 구도들은 인식론에 있어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구도들이다. 물론 19세기 후반 이래 다른 여러 구도들도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주체와 대상의 이원 구도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그리고 언어의 삼원 구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는 현상적인 언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 차원에서 주체와 대상을 모두 정초하고 있는 심층적인 언어(구조)를 뜻한다. 

야구장에서 우리는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등을 본다. 그리고 배트, 공, 글러브 등도 본다. 이런 존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실체들’이다. ‘실재적인 것(Le réel)’이다. 그러나 이 외에 정신적인 것, 의식적인 것도 존재한다. 사람들의 지각과 감정이 그렇다. 사람들은 경기를 지켜보고 기뻐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용어로는 ‘The mental’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구조주의자들은 ‘l'Imaginaire’(상상적인 것. ‘이미지적인 것’이라는 번역이 원의에 더 가깝다)를 많이 쓴다. 이 두 차원, 근대철학적으로 말해 주관적인 차원과 객관적인 차원이 관계 맺으면서 세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거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또 한 차원이 존재한다. 물리적인 실체도 아니고 정신적인 차원도 아닌 어떤 것, 그럼에도 바로 야구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지배하는 것, 이 제3의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야구의 룰이다. 투수가 세 번 스트라이크를 잡으면 하나의 아웃이다, 타자가 친 공이 담장을 넘어가면 홈런이다 등등의 이 룰, 이 야구 규칙은 보이지고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조차 없지만, 사실 그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 룰에 입각해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제3의 차원을 구조주의에서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 상징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과 이미지적인 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철학에서 주로 논의됐던 것은 실재적인 것 즉 ‘객관적인 것(The objective)’과 정신적인 것/‘이미지적인 것’ 즉 ‘주관적인 것(The subjective)’이다. 정신적인 것은 자주 ‘관념적인 것(l’Idéel)’이라고도 쓰였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바로 ‘상징적인 것’이라는 제3의 차원이 존재하며, 오히려 이 차원이 물리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지배한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야구의 예는 편의상 든 예다. 야구는 인간이 자의적으로(Arbitrarily) 고안한 룰일 뿐이기에. 구조주의는 이런 문화적으로 창조된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그에 따라 살고 있는 그런 구조를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무의식’ 개념을 그 근간에 깔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데카르트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주체’의 철학과 대비된다.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이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근대철학은 ‘주체성’ ―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선험적 주체’라는 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 ― 개념을 다듬어 왔으나, 구조주의는 주체성을 ‘상징적인 것’ 안에 포함시켜 논한다고 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가 잘 보여줬듯이, 우리가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집을 짓고 하는 것, 신화를 얘기하는 것 등등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정신’/‘주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즉 ‘상상적인 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에서, 상징적인 것의 체계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이 ‘상징적인 것’은 일차적으로는 언어적인 차원이다. 언어는 그것이 대상을 전제한다. 즉,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을 전제한다. 이 차원은 실재적인 것의 차원이다. 또 하나, 언어는 정신적인 것, 우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곧 ‘상상적인 것’에 해당한다. 이 두 차원 외에 또 하나의 차원이 언어 자체의 차원이다. ‘사물’의 차원, ‘의미’의 차원과 더불어 ‘언어’의 차원이다. 물론 이 언어의 차원 자체도 물리적 차원을 포함한다. 소리나 글씨는 물리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언어의 핵심은 이 차원 즉 ‘기표’의 차원이 아니라 그 기표의 차원을 지배하는 법칙성에 존재한다. 곧 ‘문법’의 차원이다. 언어는 기표라는 물리적 차원과 기의라는 정신적 차원 외에 문법이라는 구조의 차원을 포함한다. 이 차원이 바로 ‘상징적인 것’에 해당한다. 

문법은 바로 야구에서의 룰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야구의 룰과는 달리 언어의 문법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을 할 적에 문법을 생각하면서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문법을 생각하면서 말하려면 말이 잘 안 나올 것이다. 지네한테 너는 다리가 많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걷느냐 하고 묻자, 지네가 “이렇게 걷지!” 하면서 그에 답하려 했지만 막상 잘 안 되더라 하는 이야기와 같다. 물론 우리는 문법을 배운다. 그 점에서 인위적인 구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법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존재하는 문법을 정리해서 가르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구조, 상징적인 것의 차원을 강조하고 언어, 요리법, 친족체계, 인간의 욕망, 사회 구조, 인식의 방식 등등에서 구조들을 발견한 것이 구조주의 인간과학의 빛나는 성과다. 

왜 탁자는 꼭 탁자라 불러야 하는가?

이제 이 ‘구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기초 개념들 중 하나는 ‘자의성’이다. 예컨대 이 탁자를 의자라고 부르고, 이 의자를 탁자라고 불러서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1)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부르든, 이 둘 사이의 차이가 확보되는 것이다. 지금의 여자를 남자라고 하고 남자를 여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배돌석, 곽오주 등 <임꺽정>의 우락부락한 장정들이 임꺽정을 “언니”라고 부른 것을 상기해 보자. 언어의 본질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과 필연적인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기보다, 기호들 사이의 차이, 기호들의 전체의 체계, 즉 차이들의 체계에 있다는 것이다. 의미는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호들의 차이들의 체계에 있어 성립한다는 것이다. ‘차이들의 관계’, ‘차이들의 관계망’ 같은 표현들도 있다. 기호들 사이의 ‘변별적(Differential)’ 관계가 중요하다. 

(후기)구조주의에 관련된 저작들을 읽다보면 ‘차이들의 놀이(Jeu des différences)’라는 개념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놀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이런 표현들을 만나면 단지 ‘수사’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이런 표현 하나하나가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차이들이 단지 공간적으로 고정돼 있으면 곤란하고, 하나의 차이에서 다른 차이로 계속 옮겨가야만 의미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배구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배구를 할 때 누군가가 공을 꽉 쥐고 있다면 배구경기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토스를 해서 A, B, C 등 선수들 사이를 돌아다녀야, 즉 A에서 B로, B에서 C로, C에서 A로 차이가 계속 옮겨 다녀야(때때로 “미끄러진다”는 표현도 쓴다) 의미가 생성한다는 것이다. ‘차이들의 관계(망)’라든가 ‘차이들의 체계’보다 ‘차이들의 놀이’가 더 적절한 표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조의 이런 성격은 결국 구조의 구성 요소들이 기표들은 단지 사물들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들을 지시하는 기호들이 아님을,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작위로 만들어 사용하는 기호들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에서의 기표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기호들이 아니라 구조를 구성하는 장소들/위치들로서의 기표들이다. 구조란 이 기표들이 체계, 나아가 기표들의 놀이의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조, 상징적인 것이 무의식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주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주의의 사유를 잘 보여주는 예가 인류학에서 논하는 토테미즘이다. 토템이라는 현상을 해명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 ‘현실적/실재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전형적인 예를 기능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토템은 해당 부족에게 실질적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 토템이 해당 부족의 중요한 먹을거리일 수 있으며, 반대로 그 부족이 기피해야 할 먹을거리일 수도 있다. 이때 그 먹을거리는 해당 부족의 생존에 관련된다. 이와 달리 ‘이미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전형적인 예를 레비-브륄의 ‘신비적 융합의 법칙’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각 부족의 토템은 해당 부족의 지각과 상상 속에서 그 부족과 일치한다. 현대식으로 말해 ‘상상적 동일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구조주의 사유는 토템들을 일종의 기표체계로 간주한다. 즉 토템의 의미를 물질적-신체적 차원이나 심리적-관념적 차원이 아닌 차원, 현실적/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에 비해 쉽게 나타나지 않는(그래서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포착해야 할) 제3의 차원, 즉 상징적인 것에서 찾는다. 이 경우 첫째, 기표와 사물 사이에는 자의적 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토템과 해당 부족 사이에는 사실상 실질적인/내용적인/필연적인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토템과 해당 부족 사이에서 무엇인가 실질적인 연관성을 찾고자 한 기존 이론들과 혁명적인 단절을 이룬다. 둘째, 기표들의 의미는 변별적 관계, 차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성립하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은 각 토템과 해당 부족의 관계가 아니라 토템들 사이의 관계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각 토템이 아니라 밀접히 연관되는 토템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토템과 해당 부족 사이에는 실질적 인과나 상상적 동일시보다는 기표 특유의 자의적 관계만이 존재할 뿐임을 지적한다. 곰, 독수리, 거북의 세 토템 체계(세 부족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세 토템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 세 항들 사이의 변별적 체계다. 곰 토템을 가진 부족이 곰을 잡아먹고, 독수리 토템을 가진 부족이 독수리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또, 거북 토템의 부족이 스스로를 거북이와 동일시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 토템 사이의 차이들의 놀이(곰-독수리, 독수리-거북, 거북-곰 사이에서 이뤄지는 놀이)이며, 각 토템의 의미는 그것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변별체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리/위치에 의해 성립한다. 곰 토템 부족이 갈라져 각각 백곰과 흑곰을 토템으로 하게 됐을 때에도, 백곰과 흑곰을 어떻게 배당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흼과 검음이 변별되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문명세계에서의 토템, 예컨대 스포츠 팀들의 토템을 생각해 보아도 좋다.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토템들(한화의 독수리, 두산의 곰, 기아의 호랑이 등) 역시 각 구단과 실질적 인과를 가지지 않는다. 한화 선수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두산 선수들이 곰처럼 미련한 것도 아니다(오히려 성적을 보면 반대가 아닌가!). 한화가 곰을, 두산이 독수리를 토템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10개 구단의 체계, 그 차이들의 놀이가 중요한 것이다. 미개사회에서의 토템과 문명사회에서의 토템이 모두 구조주의적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분석 또한 구조주의 사유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두 개의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 편지를 읽다가 왕이 나타나자 당황하는 왕비, 아무것도 모르는 왕, 그리고 이 상황을 이용해 편지를 가로채는 대신. 두 번째 장면: 편지를 교묘하게 ‘숨긴’ 대신, 계속 허탕만 치는 경찰총감, 가지로 편지를 가로챈 뒤팽. 여기에는 복잡한 상호주관성의 놀이가 있다. 라캉은 여기에서 상호주관적 반복 구조에서의 ‘자리바꿈(Déplacement)’=‘전치(轉置)’에 주목한다. 왕비-왕-대신 계열과 대신-경찰총감-뒤팽의 계열에서 대신의 자리는 특히 중요하다. 마치 삼단논법에서의 매개념처럼, 대신은 첫 번째 계열과 두 번째 계열에서 모두 등장하며 두 번째 계열에서는 전치된 역할을 맡는다. 결국 “이들의 자리바꿈은 삼각구도에서 순수기표 [도둑맞은 편지]가 차지하게 된 자리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서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각 주체들이 놓여 있는 자리들, 특히 그 자리들에서의 차이들의 놀이를 가져오는 구조를 통해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주인공은 현실적인 인간들도 또 그들의 의식, 이미지, 관념의 차원도 아니다. 자리/위치들, 그것들 사이의 차이들의 놀이, 차이들이 형성하는 전체 체계/구조, 그리고 편지라는 ‘순수’기표, 즉 그 기의가 무엇인지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 기표로서의 편지가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계열들의 전체 구도, 즉 구조다.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전체 구조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 분석과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 독해라는 두 가지 예만을 봤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구조주의 사유에서 ‘차이’의 역할, 더 구체적으로는 차이들의 체계(의 운동)로서의 구조의 역할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의 분석, ‘에피스테메’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비롯해 20세기 중엽을 수놓은 사상가들은 무의식, 상징적인 것, 차이(생성)에 대한 참신한 분석들을 내놓았고, 이런 성과가 오늘날에는 현대 사상의 기초로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 

(1) 이와 같은 의문을 흥미롭게 전개한 책으로 페터 빅셀(Peter Bichsel)의 <책상은 책상이다(Kindergeschichten)>, 앤드루 클레먼츠(Andrew Clements)의 <프린들 주세요(Frindle)>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