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약관만 고친 오바마 의료개혁
보조금 주고 가입 의무화… 의료 체계 손 못대
공공보험 설립 무산… 민간보험은 입김 더 세져
(조금이나마) 금융시장을 규제할 요량으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추진 중인 금융개혁법은, 몇 주 전과 달리 상당한 탄력을 받고 있다. 개혁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골드만삭스의 파생상품 사기 사건이 불거진 덕분이다. 하지만 의료개혁법 입법 과정이 민주당에 개혁의 자신감을 제공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의료개혁은 한때 좌초될 위기까지 갔다.
정치 공방만 1년 넘게 이어졌다. 오바마호는 거의 난파 직전이었다. 그리고 지난 3월 말, 마침내 의료보험 수급 대상자를 대폭 확대(현재 5천만 명에 달하는 의료보험 미가입자 수를 3200만 명까지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의료보험 개혁법이 공표됐다. 시간이 촉박했다. 하버드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의료보험 미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4만5천 명에 달했다.(1)
2700쪽 분량의 이 법률 규정은 당장 올해부터 어린이에게 우선 적용될 예정이다. 성인은 2014년에야 적용 대상이 된다. 법률 규정에는 전 국민의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길 땐 벌금형을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2006년 매사추세츠주 법을 모델로 한 이번 의료개혁법은 보험사의 석연치 않은 관행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동안 보험사는 피보험자의 추가 병력 ‘발견’을 이유로 보험료 지급을 거부해왔다. 앞으로는 의료보험 의무 가입에 따른 소득공제 혜택이 주어진다.
공적 의료보험 제도인 ‘메디케이드’(극빈층과 장애인에 대한 의료보험)의 수혜 대상이 확대된다. 반면 65살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메디케어’ 지원은 점진적으로 축소될 방침이다. 대신 메디케어의 ‘도넛 홀’ 조항(2006년 이래 연간 2860~6440달러의 의료 비용 보장을 금지한 조항)이 폐지된다. 마지막으로 고소득층(부부의 경우 25만 달러, 1인의 경우 20만 달러 이상)에 대한 세금 부담이 늘어난다. 이로써 오바마의 대선 공약은 실현됐다.
돈 내고도 보장 못받던 관행
미국에서는 부유층과 일반인 사이에 의료 격차가 여전히 극심하다. 각 주의 의료 격차도 마찬가지다. 2007~2008년 매사추세츠주에서는 의료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인구 비율이 5%에 불과했다. 반면 텍사스주는 25%에 육박했다. 대개 의료보험 미가입자(개인사업자, 영세기업이나 가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소득은 적지만, 그렇다고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을 만큼 빈곤하지는 않다. 이들은 10년째 이어져온 보험료 상승(평균+131%)(2) 때문에 의료보험 가입에 어려움을 겪는 한편, 직장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일반적으로 4인 가구의 한 달 보험료는 약 1200달러(약 900유로)에 달한다. 청년층 경제활동인구를 중심으로, 건강을 운에 맞기고 보험 가입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7년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개인 파산의 62%는 과도한 의료 비용이 원인이었다.(3) 놀라운 것은 이들 중 78%가 의료보험 가입자라는 사실이다. 이들조차 중병으로 인한 의료 비용은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험사가 보험료 지급을 거부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무턱대고 부적절한 치료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추가 병력이 발견돼 계약에 효력이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
가격 대비 의료 서비스의 품질이 항상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4) 의사들은 방사선 사진같이 부작용이 우려되는 검사를 과잉으로 실시한다. 검진비를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5) 때론 옷까지 벗게 하는 오진이나 ‘의료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고액의 배상금이 걸린 의료소송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배상금 상한액을 설정하기도 했다.
‘구명치료’(응급치료, 구급조치, 시술이 어렵거나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의 치료 등)에서 의료진의 서비스는 비교적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일반적 의료 서비스는 환경이 열악하다. 일반의 부족 현상은 특히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같은 일반적 질환을 겪는 환자가 꾸준한 치료를 받는 데 장애가 된다. 문제는 일반 의료 서비스가 열악한데도 미국의 의료 비용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의료비 격차 해소를 여야 간 해결에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서서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이 정책을 수립하는 난해한 임무는 의회 몫으로 돌아갔다. 정책 입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걸렸다. 우선 연방 예산 적자를 늘려서는 안 되며, 소득 25만 달러 이하 가계의 세 부담을 늘려서는 안 됐다.
제프 빙거먼 뉴멕시코주 민주당 상원의원은 “처음부터 세부 목표가 정립됐더라면 작업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정치권과 언론의 무분별한 행위는 1993~1994년과 유사한 사태를 몰고 올 뻔했다. 하원과 상원은 개정안과 특별 조항을 남발했다. 연방국가가 지원하는 의료보험 보장 대상에 낙태를 포함시키는 문제를 두고 연일 격한 토론이 이어졌다. 1976년 이후 하이드 개정안에 따라 임신중절에 대한 의료보험 보장이 금지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개인 파산의 62%는 의료 비용 탓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당장 해결에 나서지 않고 몇 달을 기다렸다. 그는 2009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야 무대 전면에 나섰고, 2010년 2월이 되어서야 최초의 정부 계획안을 발표했다. 오바마가 공공연히 표방하던 양당 체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떠한 공화당 의원도 그의 의료개혁에 동조하지 않았다. 야당은 ‘거대 정부’(Big Government)가 민간경제의 많은 부분을 빼앗고, ‘연로하신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뗄’ 결정권까지 사취함으로써 재정 적자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의회예산국(CBO)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의료개혁이 단기적 측면에서 국가재정 지출을 상당 부분 축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강한 저항에 맞닥뜨린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의 관심사를 보험사의 횡포 쪽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보험료 인하를 목적으로 민간보험과 경쟁할 공공보험을 설립하자는 제안은 상원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여기에는 이익단체의 입김이 적잖게 작용했다. 이익단체는 미국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액수(2008년 이래 4억8600만 달러, 2009년에는 5440만 달러)를 로비자금에 쏟아부으며 입법 과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6)
의약업계는 미국제약협회(PhRMA)를 내세워 의료개혁 지지를 담보로 이익을 챙겼다. 의약업계는 의약품 가격 인하(10년에 걸쳐 800억 유로)를 약속하는 대신, 일부 의약품 수입 금지 조처 연장과 지적재산권 보호 확대를 보장받았다. 미국의 주요 직업단체 중 하나인 미국의학협회(AMA)는 모든 국가 규제에 반대했다. 하지만 정작 보험사의 관행에 불만을 품던 의사들은 정부의 의료개혁안을 지지했다. 반대로 보험사는 거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보험사로서는 특정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미리 존재했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의료개혁법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결국 미국의 의료개혁법은 근본적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과 급진 자유주의자의 성토에도 불구하고, 의료 접근권은 앞으로 계속해서 시장법칙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동일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극심한 가격 격차 문제(보험사 및 의료센터 종류, 의료보험 가입 여부에 따른 격차)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한 예로 노스캐롤라이나주 듀크대 부속병원의 1일 입원비는 보험 미가입자와 가입자 간에 8배가량 차이가 난다.
의료 접근권은 계속 시장이 지배
매사추세츠주에서 시행된 의료제도와 마찬가지로, 연방법은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보조해주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민간보험 시장이 더욱 확대되게 했다. 이를 위한 추가 재원은 이미 막대한 의료비 지출의 주범인 보험사의 권력만 강화해줄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의료개혁법은 의료비 지출 관리 부문에서 미흡하다. 경제학자는 의료비의 3분의 1이 부적절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본다. 각 주에 소비자에게 더욱 경쟁력 있는 보험상품을 제공하기 위한 ‘의료보험상품거래소’(NHIE)를 개설하는 문제에서, 미국 정부는 매사추세츠주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주는 의료보험 가입률이 97%에 이르지만 치료비나 보험료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4월 매사추세츠주의 보험상품거래소 ‘커넥터’는 8~32%의 보험료 인상을 시도한 보험사의 상품 등재를 거절했다(투표가 있기 몇 주 전, 미국 전역의 보험사가 40% 이상 보험료 인상을 발표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반 시민은 의료 시스템이란 정글 속을 헤매야 할 듯하다. 의료 접근성에 관한 평등은 어느 정도 개선됐지만, 가격 대비 낮은 효율이라는 지금의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올리비에 아펙스 Olivier Appaix
부르키나파소에 거주하며, 세계은행에서 에이즈·말라리아 등 아프리카 의료 문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앤드루 윌퍼 외, ‘의료보험과 미국 성인 사망률’, <미공공보건저널>, 버밍햄, 2009년 12월.
(2) 카이저 패밀리 파운데이션, 2009년 9월.
(3) <비즈니스위크>에 인용된 하버드대 연구 결과, 뉴욕, 2009년 6월 4일.
(4) 커먼웰스 트러스트사가 실시한 2008년 연구(<영국의학저널>에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의료 서비스 품질 면에서 조사 대상이 된 선진국 1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5) 브뤼노 팔리에, <의료 시스템 개혁>, 크세주, 파리, 2009.
(6) ‘Federal lobbying climbs in 2009 as lawmakers execute aggressive congressional agneda’, 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 2010년 2월 12일, www.opensecret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