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모범생 세네갈
민주주의는 쉽게 타락할 수 있다

2010-05-10     압둘 아지즈 디오

 “카림 와드의 정치적 입지 상승을 가로막는 것은 없다”, “카림 와드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카림 와데이 대통령직을 노리려면, 먼저 윌로프어부터 배워야 한다”.(1)

아프리카 지역 신문을 통해 이미 알려졌듯, 현 세네갈 대통령인 압둘라예 와데의 아들인 카림 와데가 정치적 수직 상승을 노린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친인 와데 대통령의 개인고문이자, 2008년 3월 다카르에서 제11차 정상회의가 개최된 이슬람회의기구(Anoci) 담당청장을 역임한 카림은 2009년 5월 1일 국토 관리 및 교통부 장관에 임명됐다. 이런 움직임을 두고 현 와데 대통령이 아들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정치 전략이라는 말이 분분하다.

 아들 세습 노리는 와데 대통령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겠으나, 이는 아프리카 민주주의 모범국가로 대표돼온 세네갈의 심각한 정치 위기를 드러낸다. 1960년 독립 후 세네갈은 1974년까지 단일정당제를 유지했다. 초대 대통령이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은 이후 제한적 다당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상고르가 소속된 사회당을 비롯해, 현 와데 대통령이 사회노동당 노선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향한 뒤 그의 소속당이 된 세네갈민주당,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독립아프리카당, 보수주의 정당인 세네갈공화당의 4개 정당이 정치에 참여해왔다.

독재체제가 일반화된 아프리카에서 이런 정치체제는 특징적 현상이지만, 여기에도 여러 결함이 뒤따랐다. 4개 정당 외의 정당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는 점이 특히 그렇다. 범아프리카주의(2)로 유명한 셰이크 안타 디오 교수가 이끄는 민주주의 국가연합(RND)은 다른 정당(제도권의 4개 정당)과 제휴를 거부한 채, 당시 정권에 대항하는 다른 정당처럼 그늘 속에 머물러야 했다. 1980년 12월 상고르는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후임자로 당시 총리인 아브두 디우프를 지명했다. 아브두 디우프 총리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이 공석일 경우, 국가수반으로 활동할 권한이 있었다. 상고르 대통령은 매우 예외적인 선택에 대해 “대통령직 재임 기간 제한에 대한 지지”와 “74살이라는 고령에 이르렀으니 젊은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3)라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네갈 출신 모마르 쿰바 디오 교수와 마마두 디우프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상고르의 사임은 정치적 이념과 모순되는 새 경제정책 도입에 다른 책임과 정치·사회적 압력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4) 실제로 당시 세네갈은 고통스러운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 구조조정 계획 협상(5)을 국제통화기금(IMF)와 체결할 참이었다.

1962년 상고르가 쿠데타 기도 혐의로 제거한 마마두 디아 전 총리는 상고르의 사임 결정과 후계자 지명을 일종의 술수로 보았다. “왕처럼 군림한 대통령이 후계자를 지명했다. 세네갈 역사를 통틀어 어떤 정치인도 상고르처럼 세네갈의 정치체제를 정비할 헌법 개혁을 좌지우지하며 국민의 주권을 우롱한 사례는 없었다.”(6) “소속 정당과 국가기구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한 선거에서조차 과반수를 얻지 못한 정치인이 어떻게 그런 불신 속에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할 수 있는지, 불신을 모른 척할 수 있는지, 어떻게 감히 세네갈 국민에게 자신의 후임자를 강요할 수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와데 대통령의 반대파는 디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제도 내 투명성 부재를 다음과 같이 규탄했다. “(대통령 교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 할 것이다.”(7)

 IMF 체제,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

한편 상고르 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명한 디우프를 과소평가한 와데와 군부 내 지지 세력은 선거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달리, 디우프의 집권은 (1980년 말에서 2000년 초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디우프는 1983년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 1988년과 1993년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디우프의 소속당인 사회당도 1983년, 1988년, 1993년, 1998년 총선에서 잇따라 승리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야당 세력과 정부가 자진해 추진한 정치 참여 확대로 세네갈은 아프리카 대륙 내 처음으로 다당제를 수용한 국가가 되었다. 1982년 4대 정당 중심의 제한적 다당제가 폐지됨에 따라 38개 정당에 정치 참여가 허용됐다. 또한 1992년 국가선거감독위원회가 창설되고, ‘교체(Alternance) 2000’과 ‘코드(Code) 2000’, ‘교체를 위한 전선(Front pour l’alternance)’ 등 3개 야당이 연합한 끝에(비록 미래가 없는 연합당이었으나) 2000년 3월 정권이 교체되었다.

세네갈의 민주주의 모델은 새로운 정치적 추세에 맞춘 제도 변화, 상황에 따른 유연한 정치동맹 구성, 선거 결과에 대한 평화로운 승복, (공영방송의 후보자별 토론과 영상편집의 공정한 시간 배분에 비춰볼 때) 다원주의에 대한 존중, 흠잡을 데 없는 선거 준비, 선거법 위반에 대한 즉각적 비난이 가능한 시민사회단체와 민간 라디오 방송의 철저한 감시 활동에 기초해 있다. 2000년 2~3월 선거 기간에 선거 과정을 감시하고 상황을 속속들이 전하며 공권력을 견제한 것도 대중매체였다. 디우프의 사회당과 와데의 세네갈민주당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는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향한 이런 움직임은 정권 교체가 되자마자 즉각 해체되고 말았다. 의원내각제 실시, 사법부 독립성 강화, 20년 가까운 구조조정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한 사회정책의 즉각적 이행 등 새 집권당이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러했듯, 새로 집권한 와데 대통령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IMF의 호평을 받으며 민영화를 확대하는 등 자유주의 정책을 심화해갔다.

와데 대통령의 독재체제 굳히기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2001년 1월 7일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로 채택되면서 대통령 임기는 7년에서 5년으로 단축됐다. 그러나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을 쥐면서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됐고, 이후 상황은 명약관화해졌다. 의회는 대통령이 좌지우지했고, 사법부의 독립은 유명무실이었다. 또 국제 금융기관의 입맛에 따라 세네갈 내부 전문가의 목소리는 소외됐다.

이런 변칙적 정치의 가장 최근 사례로 ‘허위 후보자’의 선거 참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선거 후보자 등록을 위한 예치금을 급격하게 상향 조정한 것을 들 수 있다. 대선 후보 등록을 위한 예치금은 600만 CFA프랑(9천 유로)에서 2007년 2500만 CFA프랑(3만8천 유로)으로 뛰었다. 총선 후보자 등록 예치금은 2001년 200만 CFA프랑(3천 유로)이던 것이 1500만 CFA프랑(2만3천 유로)으로 상승했다. 국세청에 예치금을 납부하려면 고등학교 초임 교사가 납세 후 실수령액을 최소 3년간 한 푼도 쓰지 않아야 한다.

 2000년 봄 꽃핀 선거 민주주의

어느 누구도 와데 대통령이 검토했던 납세 기준의 투표 제도 부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는 대도시 거주 중산층이 급속히 빈곤화되고, 농촌 지역의 위기가 심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차기 대선 승리를 확신하던 야당에 2007년 대선에서 와데의 승리는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15명에 이르는 경쟁자를 제치고 1차 투표만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것은 충격이었다. 사실인즉, 2000년 2월에서 2007년 2월까지 7년이라는 기간은 와데 대통령이 국가선거감독위원회를 독립선거위원회로, 시청각고등위원회를 시청각감독국가위원회로 교체하는 한편,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 일방적으로 유권자 명단을 재작성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대통령 선거 부정을 의심한 야당은 그해 6월 총선을 보이콧했다. 대선 당시 투표율은 71%였으나, 공식적 집계에 따르면 총선 투표율은 30%에 머물렀고, 야당 집계에 따르면 25%에 지나지 않았다.

널리 퍼진 불만을 반영하듯, 2009년 3월 22일 실시된 지방선거 결과, 수도 다카르에서는 ‘세네갈 회복을 위한 모임’(Bennoo Siggil Sénégal)이 카림 와데를 누르고 승리했다. 부친인 와데 대통령이 카림을 국무장관 자리에 앉힌 것이 바로 이때다. 와데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의회에서 승인을 받아낸 뒤, 대통령 공석시 국가수반을 대행할 부통령직을 신설했다. 현재까지 공석으로 남은 부통령직은 와데 대통령이 추진 중인 ‘와데 왕조 건설’ 계획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선거 뒤 다시 민주주의 불모지로

2007년 선거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2009년 지방선거의 승리로 다시금 힘을 얻은 야당은 2012년 대선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 2009년 6월 정당대회에서 야당은 ‘신세네갈을 위한 민주주의 거버넌스 선언’을 채택했다.(8) 위원회가 부처별 검토를 걸쳐 1년간 추진한 과업의 결과물인 선언문은 ‘신식민주의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거 상고르 집권 당시 장관을 역임한 91살 압둘라예 리는 세네갈의 정치체제를 빗대어, 국제 금융기관과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지배로 빚은 혼란이 바탕이 된 ‘특수한 체제’라고 규정했다.(9) 그는 “세네갈의 이러한 (대외) 의존성이 자본주의식 착취에 의한 모순이 표면화되는 것을 봉쇄하고, 현 계급구조의 원인이 된 사유재산제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의 왕조 설립 프로젝트 때문에 (얼마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세네갈자유민주당으로 개명한) 세네갈민주당의 운영체제가 우스운 상황에 처했다. 대통령 가족이 전례 없이 국정에 개입하면서, 와데 대통령이 주장한 자유주의는 족벌주의로 변질됐다. 세네갈이 처한 새로운 형태의 친인척 등용 정치는 무엇보다 정부조달 협정 때 드러난 문제점(10)과 (270억 CFA프랑이 소요된) ‘아프리카 르네상스 조형물’ 설립을 둘러싼 논란에서 드러난 세습문화에 가장 잘 나타난다.(11)

 신식민지주의부터 극복해야

정권 교체 이후 심각한 민주주의의 퇴행은 1990년대 아프리카 국가를 휩쓴 ‘국민회의’ 물결이 지나간 뒤 정치권에 자리잡은 ‘정치 흥정 문화’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국민의회는 좌파적 이념 대신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 기회였고, 국제 금융기관이 허용한 범주 안에서 정치적 거래가 활성화되는 여건을 조성했다. 그 결과 정당은 당파 분쟁으로 변질됐고, 노조는 정치적 반향에 동조하는 파벌 조직으로 타락했다. 지식인의 목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져 지리멸렬해졌고, 대중매체 역시 목표도 노선도 없는 집합체가 되었다. 정치권력은 사법부와 의회를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상품과 서비스 시장은 폐쇄적 공간이 되어 시민이 자유롭게 개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금전적 자율성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은 것은 다카르의 수도권 변두리 지역으로 내몰려 어렵사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마련하고, 옷을 구하고, 배우고, 병을 치료하는 대다수의 국민과 미래 없는 사회뿐이다.

글•압둘 아지즈 디오 Abdoul Aziz Diop
주요 저서로 <민주주의에서의 권력승계: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한 세네갈 국민>(아마르탕·아프리카 철학시리즈 중·파리·2009) 등이 있다.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쥔 아프리크>, 파리, 2502~2503호, 2008년 12월 21일~2009년 1월 3일.
(2) 파브리스 에르비유 웨인, ‘셰이크 안타 디오, 아프리카 정신의 재건자’, <마니에르 드브와>, 51호, mai-juin 2000년 5~6월호.
(3) 르솔레이, <다카르>, 1981년 1월 2일.
(4) 앙트완 틴, ‘범아프리카주의에 맞선 레오폴 상고르와 셰이크 안타 디오: 같은 전쟁이나 사상은 다르다?’, <코데스리아>, 다카르, 2005.
(5) 안 세실 로베르, ‘변화를 기다리는 세네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2월.
(6) 마마두 디아, <옛 정치운동가의 편지>, 콩트도퇴르, 다카르, 1979~91.
(7) 압둘라예 와데, <아프리카의 숙명>, 미셸라퐁, 파리, 2005.
(8)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인 아마두 마타음보의 주최로 2008년 6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실시된 세네갈 총회에는 야당, 노조 및 고용주 모임, 시민사회 대표와 지식인, 대학교수 및 종교 지도자가 참여했다. 와데는 자신의 소속당과 연계 조직에 회의 불참을 요청했다.
(9) 압둘라예 리, <세네갈 대통령제의 기원>, Editions Xamal, 생루이 뒤 세네갈, 1997.
(10) 정부조달 감사보고서에 수의협약 같은 부정거래 등 신정부조달법 위반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됐다.
(11) 압둘 아지즈 디오, ‘홍수 피해는 뒷전, 조형물만 호강’, <라가제트>, 다카르, 38호, 2009년 12월 17~24일.



[박스기사] 세네갈의 왜곡된 민주주의 역사

1960년 4월 4일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 8월 31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초대 대통령 취임

1962년 상고르 대통령에 의해 마마두 디아 총리가 국가반역죄로 투옥됨

1963년 국민투표 결과 대통령중심제 채택. 상고르 대통령 소속당인 세네갈진보연합이 사실상 유일한 정당이 됨

1968년 상고르 대통령 재선 성공. 학생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됨

1970년 2월 26일 신헌법에 따라 총리직 부활. 아브두 디우프가 총리직에 임명됨

1974년 민주화가 진행됨. 마마두 디아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범들이 사면되고, 4대 정당이 참여하는 제한적 다당제가 실시됨. 압둘라예 와데가 자유주의 진영인 세네갈민주당을 창당함

1978년 민주주의 방식의 대통령선거와 총선이 실시됨. 상고르 대통령 3선 성공

1980년~1979년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과 체결한 ‘경제재건계획’이 실시됨

1980년 12월 31일 상고르 대통령 퇴임. 상고르가 디우프 총리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함

1982년 4대 정당 중심의 제한적 다당제가 폐지됨

1983년 2월 27일 세네갈사회당의 아브두 디우프가 79.92%의 표를 얻어 대통령 재선에 성공함

1984년 1985~92년 구조조정계획을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세네갈의 채무 상환이 연기됨

1988년 2월 28일 디우프 대통령 재선. 야당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함. 와데를 포함한 야당 유력인사들이 수감됨

1993년 2월 21일 디우프가 득표율 58.4%로 대통령 3선에 성공

1994년 1월 11일 프랑스가 CFA프랑의 50% 평가절하를 요구함

1994~98년 신구조조정계획이 채택됨. 민영화가 전 산업 분야로

확대됨(에너지, 통신, 교통 및 물산업 등)

2000년 유엔경제사회위원회가 세네갈을 저개발국가로 분류함

2000년 3월 19일 연합정당을 구성한 와데가 58.5%를 얻어, 디우프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됨

2007년 2월 25일 와데가 14명의 후보가 참여한 대선에서 55.79 %를 얻어, 1차 투표만으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함. 야당이 그해 6월 실시된 총선을 보이콧함

2009년 3월 22일 지방선거 실시. 야당이 세네갈민주당을 제치고 다카르에서 승리함



[박스기사2] 주요 지표

수도
다카르 

인구 1100만 명(다카르 인구: 250만 명)

통화단위 CFA프랑

국경일 4월 4일(독립기념일)

연평균 경제성장률 2.55%

1인당 국민소득 1100유로

취학률 39.2%

실업률 49%

물가상승률 5.8%

인간개발지수 177국가 중 166위.

(출처: 세계은행, 세네갈 인구통계청, 유엔개발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