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외교, 이데올로기에서 리얼리즘으로!

2017-10-31     가브리엘 고로데츠키 | 역사가

소련이 태동한 후 10년 동안, 소련은 외국에 혁명을 전파할 필요성과 권력의 존속을 보장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대외정책을 끊임없이 재검토했다. 


볼셰비키는 처음에 대외정책의 원칙을 신중하게 수립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서구 산업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들 국가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음에도, 서구의 제국주의적 성향이 바뀌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러시아는 당시 경제적으로 뒤처졌고,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서구 국가들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혁명군이 겨울 궁전을 점령한 다음 날 외교부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영구혁명론’의 전도자인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곧 종식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측근들이 사임하면, 과거 제국주의 국가와 러시아 간에 맺은 비밀조약을 공개할 의사가 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리고 10년 후, 강하고 근엄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당권을 잡자 영국 외무부 장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이때 영국 외무부 관계자는 “볼셰비키의 열성적인 반대당인 트로츠키 야당이 패배했으니, 전통적인 내셔널리즘 대외정책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두 가지 방향성의 차이는 소련의 대외정책이 1917년 이후 10년간 겪은 변화를 반영한다. 오랫동안 계급투쟁은 사회 구조를 결정짓는 요소였고, 중앙 유럽과 동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인 경우는 드물다. 이는 실상 전략적 후퇴인 경우가 많다. 레닌은 1920년 11월부터 이런 생각을 명백히 표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국경 너머에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다. 승리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당사자로 인정받았기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새로운 체제는 여러 조약 등을 체결하면서 성공을 맛봤다. 10월 혁명 다음 날 (합병도, 보상금도 없는) 평화에 관한 법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이 법령은 민중의 시선에서는 권력 강화로 보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1918년 5월 독일과의 전쟁을 종식했다. 라팔로 조약은 1922년 소련을 외교적 고립을 깼다.   

 그러나 실상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국제사회에서의 인정과 정치적 안정은 자칭 국제주의자이며 항시 활동 중인 (볼셰비키들의) 체제에는 모순 (또는 장애)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들의 원칙에 충실하려는 절망 어린 노력 속에서 볼셰비키들은 이원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원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 서구와 우호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적절한 상황이 생길 경우 외국에서의 혁명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일례로 이들은 1923년 10월 실패로 끝난 함부르크의 폭동을 지원했었다. 놀랍게도 1924년 영국, 미국, 이탈리아가 소련이란 국가를 인정하자 볼셰비키 권력의 이런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동시에 코민테른은 원하는 만큼 빨리 세계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영국노조에 걸었던 희망, 파업 실패로 무너져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이 국익을 해치지 않은 채 세계 혁명의 선봉자 위치를 어떻게 간직할 수 있을까? 국제주의자로서 외교관 역할을 한 코민테른은 점차 소련의 국가주의적 외교에 활용됐다. 1922년 공산당 11회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연합전략 또한 비공산당 노동자 조직과의 화해를 제시하면서 타협의 길을 보여준다. 1924~1927년 영국과의 관계는 이 두 얼굴의 정책이 지닌 모순을 극명히 드러냈다. 1924년 2월, 첫 노동당 정부의 총리 제임스 맥도널드는 다소 주저했지만 소련이란 국가를 인정했다. 선거운동 기간 노동당은 공산당의 위기에 비교됐고 11월 보수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방어태세 속에서 소련은 영국 노동자 조직과의 형제 관계를 외교적 이점으로 이용하려 애썼다. 특히 영국노동조합회의(TUC Trades Union Congress, 영국 산업별 노동조합의 상위 단체로 영국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조직-역주)와의 친목으로 1925년 소련과 영국노동조합은 공동위원회를 창설하게 됐다.  

 소련의 이런 희망, 즉 영국노동조합이 소련을 받아들이게끔 영국 보수당 정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놀랍다. 굳이 이해하자면, 1918~1920년의 경험이 이런 희망을 심어줬다. 이 기간 영국 좌파는 러시아 내전의 군사개입을 비판했다. “Hands off Russia(러시아에 손대지 마라)”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영국 좌파는 러시아 내전에 군수품과 군대를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일반 당원들의 압력 하에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는 ‘러시아에 파견한 영국 군대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조치를 가능한 한 빨리 취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이는 좌파가 원외 수단으로 대외정책을 바꾸도록 정부를 압박한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소련은 외교적인 면에서 영국과 합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동위원회의 활동에는 다소 무관심했다. 

그러나 1926년 초, 영국 광산업계에서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자 소련은 공동위원회를 해체하지 않기로 했다. 트로츠키 야당은 이를 기회주의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 중 하나는 공산당 내부의 좌익에 밀리지 않으려는 지도부의 바람이었다. 좀 더 실질적인 이유는 소련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협에 처해 있었기에 공동위원회의 외교적 잠재력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강경한 영국 보수파는 소련과 외교적 관계를 끊으라고 압력을 넣었다. 독일과의 화해를 위해 영국이 이끈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은 라팔로 조약을 파기시켰고 소련을 고립시킬 위협적인 조약이었다. 소련은 이를 소련에 반대하는 십자군의 선봉 부대처럼 여겼다.  

 겨울부터 파업 중인 광산노조와의 연대를 위해 1926년 5월 영국노동조합회의가 주도한 총파업의 일례가 보여주듯이 이런 양날의 전략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허를 찔렸지만 세계 혁명의 선동자 역할에 집착하는 소련은 파업 초기부터 전적으로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업이 실패하자 소련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변질했다고 비난하며 노동조합회의에 소련의 경제적 지원을 떠넘겼다. 상징적이든 실질적이든 이런 지원에 대한 언급은, 즉시 영국 영토 내에서의 러시아인 추방을 촉구했다.

 연속된 사건들로 정책 재검토가 처음으로 이뤄졌다. 1926년 가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보수파 외교관인, 이반 마이스카와 레오니트 크라시네를 영국으로 파견했다. 동시에 코민테른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런 긴급조치는 너무 늦게 이뤄졌고 1927년, 일련의 외교적 패배를 막는 데 충분치 못했다. 독일은 서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4월, 영국의 요구로 중국 공안은 북경 내 소련 대표의 소재지에 들이닥쳤다. 장제스는 과거 공산당 동지였던 소련인들을 학살했다. 5월에 영국 정부는 소련의 내정간섭을 증명하는 서류를 찾았다는 구실로, 런던 내 소련 무역 대표단의 사무실을 조사하고 외교관계를 끊었다. 9월 소련은 프랑스와의 경제협상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파리 주재 소련 대사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는 주재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외교관이 돼버렸다. 

 이 암울한 해에 소련은 깊은 염세주의와 전쟁의 공포에 빠져서 대외정책이 실패했음을 자각했다. 게오르기 치체린은 막심 리트비노프에게 외무부장관직을 내줬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소련이 유럽체제에 동화할 것과 좀 더 관례적으로 접근할 것을 항상 주장했었다. 그가 취임한 후 상호 간의 편의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적인 공존 덕택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적의는 호의적인 노선으로 점차 바뀌었다. 소련체제 동안 반복됐던 이 ‘유예기간’은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혁명의 열망을 서서히 잠식시켰다. 소련의 외교는 이전 체제 속에서 누렸던 명성을 일부 되찾으며 마침내 서구 국가들과 닮아갔다.  


글·가브리엘 고로데츠키 Gabriel Gorodetsky
역사가, 옥스퍼드의 올 소울스 전문대학 명예교수, 작가 ‘이반 마이스키, 다이어리(1932-1943).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의 전례없는 폭로’, Les Belles Lettres, 파리, 2017. 

번역·김영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공역서로는 <22세기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