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이 프랑스 노동 인력을 수입했을 때

2017-10-31     샤를로트 그라블리 & 토마 르자프르 | 역사학 박사 &

“아파르트헤이트(1)가 뭔지 잘 알고 있었어요.” 

프랑스 로렌 지방 쉬에 철강공장의 조립공으로 일하던 장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의 이주는 중요한 문제였다. 파업에 동조하지 않던 장은 1960년대의 정치 분위기와 노조에 질려, <레퓌블리캉 로렌>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이주를 결심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현지 최대의 강철 제조회사 ‘아이언 앤 스틸 코퍼레이션(Iscor)’에서 주택과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광고였다. 

남아공에서 ‘백색 노동력’을 원했던 이유

알제리전쟁에서 낙하산 부대원으로 참전하고 귀국 후 ‘파시스트 취급을 받은’ 마르셀과 마찬가지로 장은 아프리카대륙의 최후의 ‘백인 보루’에 합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68년 5월과 6월에는 남아공행 비행기가 뜨지 않아, 이들은 7월 초에 남아공으로 향했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프랑스인들이 남아공으로 이주한 것은 정치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60~1970년대부터 철강 산업과 광산업 분야에서 고용이 불안정해졌고, 실업 문제가 대두됐다. 유럽 이주자들이 선호하던 지역인 캐나다, 호주보다 신속한 이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랑스인들은 남아공으로 몰렸다.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남아공 산업계는 숙련된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노동자들의 노하우보다는 ‘남아공 백인국가’라는 미래를 중시했다. 1960년대 초, 흑인과 백인 간 인구 불균형이 심화되는 가운데, 식민지 해방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설계자’로 유명한 페르부르트 총리는 ‘검은 위협’에 대항하고자 대대적으로 백인 노동자들을 유입하고자 했다. 페르부르트 총리는 계속되는 기계화와 더불어 백인 이주자들을 유입시키면 흑인 인력에 대한 필요가 감소할 것이며, 흑인들을 점진적으로 ‘그들만의’ 거주 지역으로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2)

프랑스 메츠의 칼튼 호텔에서 Iscor의 채용담당자들은 이주 지원자들이 산업계의 엄격한 선별기준에 부합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지원자들은 경력 외에도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배하는 남아공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지 보여줘야 했다. 비(非)가톨릭 신자에 가족 수가 많은 사람이 유리했다(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 칼뱅주의 신교도). 그러나 독신 노동자와 프랑스령 알제리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 그리고 파업에 동조하지 않는 노동자들도 환영받았다. Iscor에 선택된 이들은 남아공이라는 국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남아공 도착 후 대부분 혼란을 겪었다. 이들은 요하네스버그의 호텔에서 며칠을 지낸 후 80km 거리의 산업 신도시, 판데르바일파크(Vanderbijlpark)로 이동했다.

“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시몬느처럼 대부분의 프랑스 이주자들은 그곳의 생활환경에 충격을 받았다. Iscor가 자리한 바알(Vaal) 지역은 금광이 있는 란트(Rand) 지역의 선동적인 노조원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선택된 곳이었다. 프랑스 이주 가족들은 파이오니어 호텔에서 잠시 머물다가, 배정된 주택에 들어갔다. 판데르바일파크에는 다양한 국적의 유럽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이주자들은 과일과 채소 장사를 했고, 그리스인들은 소규모 식료품점을 열었어요. 이것저것 파는 작은 카페였죠.” 오래전부터 거주해온 그리스 공동체 사람들은 이 도시의 유일한 술집을 운영했다. “주로 프랑스인들이 주점을 드나들었죠. 12~15명이 돌아가며 술을 샀어요.” 마르셀은 회상한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오늘날 프랑스 공장에 일하러 온 이주 노동자들이 연상된다. 장은 1960년대 프랑스 북부로 이주해온 스페인인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같은 상황이었어요. 내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비교해봤어요. 그들은 프랑스어를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어요. 저도 이곳 언어를 배우려고 애썼고, 성공했죠.”

남아공에서 이주민 노동자로 산다는 것

남아공 백인사회로의 진입은 남아공 지배층의 두 주요언어인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배워야 가능하다. 아파르트헤이트 사회의 규범과 규칙에 적응하는 어려운 과정이 시작됐다. 프랑스 광산촌에서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남아공에서 ‘따로, 그러나 함께 사는 법’은 훨씬 어렵게 다가왔다. 큰 집과 정원, 하인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 이주자들은 남아공 백인사회에 적응해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머리를 밀어야 했고 형제자매들은 격리됐으며 프랑스어는 금지됐다. 일부 교육기관에서 영어로 수업이 진행됐지만, 성경 수업만은 아프리칸스어로 이뤄졌다. 프랑스 출신 남학생들이 지역 럭비팀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그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이주가정 소년들이 몰려드는 거친 축구장에서 뛰어노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백인의 집에서 일하는 흑인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없었다. 1948년 도입된 아파르트헤이트 이전부터 공간상의 분리가 존재했다. 국민당 집권 후 국가의 존재가 강화되면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장악했다. 흑인은 백인 주인의 집에서 잘 수 없었기 때문에 뒷마당 한편에 작은 오두막을 마련했다. 1952년 노동 인력의 도시 이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남아공 정부는 16세 이상 흑인 남녀의 이동을 엄격히 규제했다. 공장개방시간 이외에는 흑인은 ‘백인 지역’에 출입이 금지됐다. 매일 저녁 6시 판데르바일파크에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흑인노동자들은 흑인거주지로 사라졌다. 백인 주택에서 일하는 흑인 하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거리를 통행할 수 없었다.

인종차별적인 정권이 마르셀에게 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독신이었던 그의 상황은 인종 분리와 대립하게 됐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문제는 흑인 여성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카페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었다. 인종차별법 중 1950년에 제정된 부도덕법(Immorality Act)에서는, 흑인과 백인 간의 성관계를 같은 인종 간의 불륜보다 더 위중한 범죄로 규정했다. 백인 독신자들은 타인종 간 매춘이 성행했던 이웃 나라, 레소토를 찾아가곤 했다. 이후 요하네스버그에 백인전용 매춘업소가 개업했고, 매주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가족이 있어야 이주자의 삶이 안정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의 배우자가 함께 남아공으로 이주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해 남아공 정부는 1963년 ‘남아공 이주가정의 여성’이라는 제목의 홍보 책자를 만들었다. 매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프랑스 이주자들에게 인종분리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Iscor에서 근무한 마리는 “여기 살면서 그다지 인종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당시 부엌문을 열어두곤 했는데 아무도 침입하지 않더군요. 저녁 6시가 되면 흑인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어요.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거리에서 흑인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빈곤으로 인한 분노, 이주자들을 향하다

정부가 인종분리정책을 펴는 사회에서 동화와 통합은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스 이주자들은 어정쩡한 평판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모잠비크나 앙골라, 마디라(포르투칼령 섬-역주)에서 갓 이주한 포르투갈사람들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이들은 ‘백인 위선자’로 통했다. 마리는 아프리칸스 공동체와의 관계를 떠올려본다. “불편한 관계였죠.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아이들은 집에서 듣던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어요.”

백인 이주자들이 ‘진정한 아프리카너(Afrika ner:(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백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남아공 엘리트층의 아파르트헤이트 논리와는 달리, 남아공 노동자들은 일관성 있게 프랑스인 이주자들에게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상기시켰다. 장은 “‘지긋지긋한 이주자들!’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아프리카너들에게 그들 자신도 네덜란드인 혹은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역주)의 후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저는 화가 날 때 아프리카너들에게 ‘당신들도 누군가의 후손’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프랑스 여인들도 일상적인 비난의 대상이 됐다. “우리가 아프리카너 남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너들은 프랑스 여인들을 경박함을 연상시키는 별명으로 부르며 조롱했다.

이렇게 백인 이주자들은, 아프리카너들에게 화풀이 대상이었다. 아프리카너들이 20세기 초부터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품게 된 분노를 푸는 대상이 됐던 것이다. 빈곤해진 지방 출신 아프리카너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오면, 대개 이주자들과 마주쳤다. 자신들보다 더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며, 광산이나 산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이주자들과 말이다. 또한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이주자들에게는 또 다른 낙인이 찍혔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는 순간까지 프랑스 이주민들이 ‘해외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스파이노릇을 한다는 소문이 프랑스인 공동체를 짓눌렀다. 공장 간부진은 선임자들에게 새로운 직원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전에 불안한 상황을 겪었던 소작농의 후손이나 대가족 출신인 프랑스 이주자들은 원하는 바를 이뤘다. “우리는 캅(Cap)으로 휴가를 떠났어요. 사부아 지방의 친척집으로요.” 아이들은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었고, 집안일은 하인들이 도맡았다. 3년간의 계약이 끝나고 Iscor에서의 노동이 별로라고 판단한 이들은 금광으로 떠나거나 신규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백인지배체제 종말 분위기가 백인사회를 휩쓸었다.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들은 편집증에 시달리게 됐다. “우리는 모두 두려웠어요. 만델라 때문이 아니라, 흑인 모두가 무서웠어요.” 마리가 고백한다. 많은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셀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1994년(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선출된 해) 우리 가족은 만반의 준비를 했어요. 한 달 치 식량과 함께 흑인들이 방화봉을 던질 경우에 대비해 커튼을 걷어낼 갈퀴까지 준비했죠. 호신용으로 권총 두 자루, 총알 250발도 준비했어요.” 하지만 이 무기들을 쓸 일은 없었고, 2000년대가 되자 결국 치워졌다.

그렇지만 당시의 표현들 중 몇 가지는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가장 흔히 쓰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이제는 법에 저촉되는 Kafir도 마찬가지다. 아랍어로 ‘신의가 없는, 부정한, 불성실한’을 뜻하는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를 거치며 프랑스어로는 Cafard(위선자, 밀고자, 간첩-역주)가 됐다. 프랑스 이주민 중 한 명이 새로운 이웃을, 그리고 TV5Monde 채널에 등장하는 흑인들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프랑스 이주자들이 남아공에 발을 디딘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들은 현장에서 은퇴했다. 가장 오래된 이주 노동자들은 흑인 노동자에게 자리를 내주며 조기퇴직 혜택을 누렸다. 여전히 활동하는 젊은 세대는 새로운 동료들에게 적응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아공 제철공장으로 그들을 이끈 사상적 바탕을 버리지는 않았다.  


글·샤를로트 그라블리 Charlotte Grabli 
& 토마 르자프르 Thomas Lesaffre 
각각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요하네스버그 소재 비트바터스란트 대학 공공문제연구소 정치학자
※인용문들은 공동연구 목적으로 시행된 인터뷰에서 따온 것임.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 - 역주
(2) Deborah Posel, The Making of Apartheid, 1948-1961: Conflict and Compromise, Clarendon Press, coll. <Oxford Studies in African Affairs>, Oxford, 19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