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철폐 10여년
남아공의 또 다른 차별

2010-05-10     패트릭 본드

아프리카의 경제 강국이자 인근의 수많은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 남아공의 국가적 존엄성이 꿈틀거리는 제노포비아와 제국주의의 망령에 휘청거리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제3의 정치 세력인 인민회의(Cope)의 모시우오아 레코타 총재는 2010년 초반 주마 대통령의 텃밭인 해안도시 더반의 한 집회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남아공인을 국제사회의 광대로 만들었다”고 했다. 더반은 이 둘이 반목하기 전인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주마 대통령이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이끌던 도시다. 레코타가 주마 대통령(1)의 성적 광대놀음과 적극적으로 짐바브웨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2)를 옹호한 태도를 질타한 것이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종식 이후(3) 집권에 성공한 ANC는 정부의 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하는 노조와 공공서비스 빈곤에 항의하는 국민 사이에서 내홍을 겪고 있다. 여러 단체는 6월 남아공 월드컵 개막행사를 방해하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어려움에 직면한 주마 대통령은 지난 2월 11일 국정연설 때, 예상한 대로 대외정책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보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다는 평을 듣던 전임자 타보 음베키 대통령(재임 1999~2008)과 대조적이다. 음베키 대통령은 남아공의 경제권력(아프리카 총생산의 40% 차지)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위엄을 토대로 국익을 아프리카 대륙의 야망에 결부하는 데 주력했다.

1994년 음베키 대통령은 ANC의 최우선 순위는 인권 확립에 있다는 이상적인 선언을 했다.(4)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만은 1994년 ANC에 2500만 달러를 선물로 주고 남아공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약속받았다.(5) 당시 음베키 대통령은 ANC의 부총재(재임 1994~99)였다. 이에 질세라 중국은 선물액수를 끌어올렸고, 결국 남아공은 태도를 번복했다. 사람들은 이 경매를 중재한 브로커가 챙긴 뇌물이 1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2009년 프리토리아는 달라이라마의 남아공 비자 발급을 거절했다. 물론 오래전부터 ANC를 금융 지원하는 중국에 변함없는 총애를 받기 위한 조치였다.

 국익만 앞세워 오락가락 외교

또 넬슨 만델라 대통령(재임 1994~ 99)은 1994년 중순 버마 군부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비난을 자초했다. 게다가 부패한 독재자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남아공 역사상 첫 민주선거인 1994년 대선 때, 캠페인 비용 명목으로 ANC에 2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만델라는 이 선거에서 65%의 득표율로 당선됐고, 그 보답으로 1997년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남아공 국가훈장인 ‘희망봉 메달’을 수여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몇 주 뒤 반정부 시위 끝에 퇴진했다.

남아공은 1994년 이후 국제사회의 세찬 압력을 받고 있다. 예컨대 세계은행의 주도하에 주택, 물, 에너지, 토지, 보건 그리고 교육 부문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사회적 차별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다. 남아공 정부는 1993년 세계은행과 체결한 협약에 의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진 채무 250억 달러(185억 유로)를 상환해야 한다. 그 결과 ANC가 처음 출범시킨 만델라 정부는 자신의 공공투자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없었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만델라 대통령에게 정권을 흑백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 시행되던 당시에 재무장관을 지낸 사람에게 이양하라고 압박했다.

그 뒤 등장한 음베키 전 대통령은 비록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의 틀 속에서 침몰했지만, 적극적 외교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남아공의 경제적 이익 증진에 힘썼다. 그는 심지어 2005년 코트디부아르의 평화 협상장에 참석해, 부정 당선으로 논란을 빚던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로랑 그바그보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다. 코트디부아르의 야당은 “그바그보가 남아공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신 남아공의 거대자본에 경제적 혜택을 주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도 음베키 대통령은 콩고민주공화국이 민주공화국으로 전환(2005~2006)(6)할 때 후원한 것처럼,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위기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요청받고 후원했다. 남아공 국제관계연구소(국가기록원)에서 일하는 팀 휴스는 “음베키는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정치제도 개혁을 주도해, 우리에게 아프리카연합(AU) 건설이란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고 했다.(7) 그러나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가 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지금, AU가 얼마나 오래 버티겠는가? 또 다른 주요 개혁 인사, 올루세군 오바산조(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존 쿠푸오르(전 가나 대통령), 벤저민 음카파(전 탄자니아 대통령) 등이 줄줄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강대국에 붙어 약소국 입장 외면

휴스는 “주마 대통령 시대가 남아공의 야망과 외교력이 약화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새 대통령의 개인 성향은 위대한 지도자의 외교 스타일과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 2008~2009년 남아공 대표단은 워싱턴, 런던, 피츠버그에서 잇따라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 세 번 모두 참석했지만 침묵했다. 분명 오는 6월 토론토 정상회담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마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의 기후피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코펜하겐기후협정에 서명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공 대외정책 공백이 빚은 가장 비참한 결과는 가난한 노동자의 이민자에 대한 적개심 확산이다. 그래서 AU가 인권보호 차원에서 창설한 감시기구인 ‘아프리카 상호 감시체계’(African Peer Review Mechanism)는 2007년 12월 음베키 대통령에게 “확산되는 적개심의 싹부터 잘라야 한다”(8)는 의미심장한 말로 남아공 사회의 인종차별 성향을 지적했다. 이에 음베키 대통령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5개월 뒤, 외국인혐오증에 의한 폭동이 발생해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피신하고 60명 이상이 사망했다.

대통령은 외국인혐오증의 씨앗이 되는 경제난에 솔직히 대응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특히 짐바브웨,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 등에서 굶주린 노동자가 남아공으로 몰려왔다. 남아공 기업의 팽창이 이 나라들의 탈공업화를 부추겼고, 이 기업들의 저가 품목 공세로 이 나라들의 현지 생산은 고사됐다.(9) 남아공은 부메랑 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외국 이주노동자가 조직과 동원력이 뛰어난 남아공의 프롤레타리아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스트내셔널뱅크’의 수석 경제학자 시스 부르거먼은 남아공 일간지 <비즈니스리포트>의 기자들 앞에서 “이민자 덕택에 지속적으로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번 돈을 본국으로 송금하지 않고 모두 쓴다”며 이민정책이 이익의 원천임을 강조했다. 사실 많은 이민자가 본국으로 돈을 송금하지 않는 것은 박봉에다 남아공의 생활비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예전에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흑인 영지에 거주하던 주민을 착취할 때 쓰던 방식을 상기시킨다. 여러 해 동안, 여성은 아무 보수 없이 일을 하며 어린아이와 병든 퇴직자, 노인을 돌봐야 했고, 자식을 광산·공장·농장의 일꾼으로 키워야 했다.

 제노포비아와 여성노동 착취

공산당 노조와 몇 안 되는 독립 시민활동가가 여성 노동 착취를 정기적으로 규탄하고 있지만, 주마 대통령은 그런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진출해 자원전쟁(콜탄과 금 채굴)을 벌이는 남아공의 광산회사가 벌써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남아공의 거대 광산회사인 ‘앵글로 아메리칸 코퍼레이션’이 현지 군벌과 불건전한 관계에 있으며, 짐바브웨의 다이아몬드 밀수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런 작태는 다이아몬드 업계의 관행을 법률로 규정하기 위해 제정된 ‘킴벌리 프로세스’(피 묻은 다이아몬드의 생산·거래를 금지한 국제협약-역자)를 약화하고 있다. 남아공의 지원을 받는 무가베 정권의 장군들은 다이아몬드로 한몫 챙기며 짐바브웨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10)

남아공의 권력을 콩고 난민이나 짐바브웨 민주 야당을 위해 쓰기를 거부한 주마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음베키 전 대통령의 ‘제국주의 논리’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남아공의 자본주의 확장은 모순을 안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는 사람들이 백인 과두정치에 의해 착취당했다면, 현재는 엘리트 갑부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이 엘리트 중에는 흑인 기업가, 특히 백인처럼 국익엔 별로 관심이 없는 광산 부문 흑인 기업가가 포함됐다.

남아공의 다국적기업은 자국에서 기업 활동을 접고 런던과 멜버른에 더 많은 사무소를 설치하고 있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09년 초반, 남아공의 경상수지 적자가 엄청난 점을 들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개발도상국으로 남아공을 꼽았다.

글•패트릭 본드 Patrick Bond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주마 대통령은 여러 미풍양속 저해 사건에 연루됐다.
(2) ‘국제사회’는 무가베 대통령이 주도하는 독재정권에 압박을 가해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 9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기사 ‘하라레 독재정권의 종식’ 참조.
(3) 아킬레 음벰베, ‘주마 대통령의 룸펜 근본주의’, <마니에르 드부아> 108호.
(4) 1994년 6월 5일,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튀니지 수도 튀니스 정상회담 때 한 선언.
(5) www.info.gov.za/issues/poa/irps.htm 참조.
(6) 1997년 육군 참모총장 조제프 모부투의 사망 이후, 자이레는 로랑 카빌라 대통령 재임(1997~2001) 때 콩고민주공화국(DRC)으로 국명을 바꾼다. 이후 콩고는 지역분쟁 같은 내전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맞는다.
(7) 2002년 아프리카통일기구는 아프리카연합으로 탈바꿈한다. 이 기구는 전쟁과 독재에 대항하는 체계를 강화해 아프리카 대륙의 통합을 준비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9월호 참조.
(8) www.aprm.org.za/ 참조.
(9)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2월호 참조.
(10) Josée Létourneau, <Partnership Africa Canada>, note n°18, Ottawa, 2009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