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 ‘튤립 혁명’ 5년
최고 권력이 꺾어버린 꽃대

2010-05-10     비켄 체테리안

민중 봉기로 쫓겨나 카자흐스탄에 피신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는 여전히 자신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한다. 과도정부는 정치 개혁을 선포하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정국을 안정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코카서스 지역의 ‘민주주의 오아시스’로 소개되던 키르기스스탄이 10년이 채 못 돼 분열과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월 6일 공공 에너지 요금 인상과 정부 고위층의 만성적인 부패에 지친 북서부 탈라스시 시민들이 분노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날 시민들은 도시의 주요 행정기관을 점령했고, 부총리와 내무부 장관을 인질로 잡았다. 이튿날 봉기군은 5천 명의 군이 지키던 대통령 관저가 있는 수도 비슈케크를 점령했다. 이 충돌로 84명이 숨졌고 수천 명이 다쳤다.

이런 폭력 사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심각했던 사건은 2002년 아스키에서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6명이 숨진 일이었다. 우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잘랄라바드로 피신했고, 이곳에서 지지자를 포섭하려 했다. 그가 키르기스스탄의 두 번째 도시인 오슈에서 결성한 친위 조직은 겨우 몇백 명을 모으는 데 그쳤고, 지난 4월 15일 그는 카자흐스탄에 머물고 있다.

전 외무부 장관인 로자 오툰바예바가 만든 과도정부가 과연 정권을 다시 쥐고 가난에 지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바키예프 시대는 이제 민주화 과정의 퇴보기로 기록될 것이다. 2005년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 체제를 전복시킨 ‘튤립 혁명’ 덕에 정권을 잡은 바키예프는 민주주의와 청렴을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임자들처럼 족벌주의와 억압의 관행을 답습했다. 그는 친족을 정보부와 외교부의 요직에 앉히고 국영기업을 장악했다.(1)

심지어 키르기스스탄에서 ‘민영화’라는 단어는 사익을 노리고 국가 재산을 전용하는 것을 뜻하는 농담거리가 되었다. 대통령의 아들인 막심 바키예프를 위해 최고 수익을 내는 공공기업을 민영화한 예는 측근이 어떤 비리든 주저 없이 행할 수 있게 조성된 체제를 극명히 보여준다. 지난 몇 개월간 야당과 언론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졌다.

바키예프 정권은 이탈리아에서 막심 바키예프의 사업 동료인 예브게니 구레비치가 마피아와 결탁하고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뉴스가 국내에 유포되지 않게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구레비치는 이탈리아의 여러 정보통신회사에서 20억 유로를 사취한 혐의가 있다.(2)

 민중봉기에 쫓겨 급기야 피신

비판 여론을 입막음하려고 바키예프 일족이 쓴 방법을 보면 마피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006년 야당 지도자인 오무르베크 테케바이예프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체포됐다. 그의 짐에서 헤로인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통령의 형제인 자니베크 바키예프가 지휘한 키르기스스탄 정보부의 음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 12월, 바키예프 정권에 비판을 가해온 언론인 겐나디 바브리유크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의 한 건물 꼭대기에서 내던져졌다. 야권은 당시 이 사건의 주범으로 정보부를 의심했다.

사회문제가 심각해지는 것도 체제 전복이 일어난 또 하나의 요인이다. 국가의 주요 수출 자원인 쿰토르 금광 개발 이익이 감소하고 있는데다, 2008년 9월 경제위기 이후 러시아에 거주하는 자국민(경제활동 인구의 3분의 1이 러시아에서 일한다)이 보내는 수입이 크게 줄고 있다.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키르기스스탄의 외채는 약 30억 달러에 육박하는데,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48%에 해당한다.(3) 현재 전체 인구의 40%가 빈곤층이며 한 달 50유로 미만의 수입으로 버틴다. 과도정부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인 에딜 바이살로프는 최근 국가부도를 선포했다. 국가의 잔고는 1600만 유로(약 184억원) 정도다.(4)

국제정치 전문가 대부분은 일련의 사태를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영향력 다툼의 결과로 보았다. 키르기스스탄은 유일하게 자국 영토에 미국과 러시아 군부대가 공존하는 나라다. 러시아는 과도정부를 즉각 인정하고 나섬으로써 얼마나 바키예프 대통령의 축출을 만족스러워하는지를 내비쳤다. 양국 관계는 2009년 2월 키르기스스탄에 21억 달러 규모의 경제 원조에 서명한 뒤부터 악화됐다. 협정 체결을 위해 러시아 쪽이 방문했을 때 바키예프 대통령은 미군 시설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약속한 원조 금액의 4분의 1을 받은 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미국과 미군 기지를 유지하는 협정을 맺었다. 러시아는 원조를 중단했다.

크렘린이 키르기스스탄에서 일어난 ‘체제 변화’를 반기는 데 반해 워싱턴은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이다. 마나스 공군기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을 수행하는 데 핵심 부분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기지가 과거 정부 비리의 요체라는 점이다. 이 지역에서 입지를 강화하려고 미 국방부는 아카예프 대통령 때처럼 ‘친족’과 계약을 맺었을 것이고, 막심 바키예프에게 이제껏 없던 최고 이익의 계약을 보장했을 것으로 보인다.(5)

또한 러시아에서 특혜 가격에 사들인 원유를 국제시장 가격으로 미국에 되파는 것도 이들 친족의 축재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기업 가로채고 언론 탄압하더니

지난 4월 1일 러시아는 이런 변칙을 문제 삼아 제3국으로 재수출되는 석유에 대한 새로운 관세 규정을 도입해, 키르기스스탄에 판매 세금을 내도록 요구했다. 현재 과도정부는 마나스 원유 스캔들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6) 미국은 지역 내 입지를 유지하려고 바키예프 일족이 민주화 약속을 저버리고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두 눈감아주었다.

오툰바예바가 처음으로 국내 정치의 각축장에서 중요 인물로 떠오른 것은 2005년 봄 아카예프 대통령에게서 선거권을 박탈당한 뒤 야권에 합류하면서부터다. 과거 동구권의 최고 명문학교 출신인 그녀는 소련 외교부에서 경력을 쌓았고, 소련 붕괴 이후 키르기스스탄 신생공화국의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4년 그녀는 ‘장미 혁명’ 당시 유엔 특사로 그루지야에 있었는데, 2005년 3월 24일 아카예프 체제가 종식되던 날 바키예프 편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군중 향해 발포, 그리고 몰락

그러나 튤립 혁명 이후 1년이 채 안 돼 그녀는 전국에서 온 젊은 투사들 앞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카예프 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개탄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시민은 여당과 야당의 차이도 모른다.” 그러나 확고하게 희망에 차서 말했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할 일이 많다. 이제 정당을 만들 시기가 왔다.” 이어 오툰바예바는 서방국가에 대한 불만, 특히 유럽의 무관심에 일갈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융자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당 정치 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지난 4월의 사태는 또다시 키르기스스탄의 취약점을 드러냈다. 2005년에 시위대 1만~1만5천 명만으로 하루 만에 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다. 악명 높은 독재자 아카예프 대통령은 진압 병기를 갖추고 있을 필요까지 없다고 믿었다. 바키예프 군대는 군중을 향해 주저 없이 총을 쐈다. 그러나 이 체제도 무너졌다. 얼마 전까지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로 자랑하던 이 나라에 불길함과 높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치력이 필요한 상황에 놓인 키르기스스탄에서 정부를 설립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툰바예바와 그녀의 조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당제가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효과적인 정부를 만들고, 국회를 설립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힘든 경제적 여건에서 이뤄져야 한다. 빚은 늘기만 하고 러시아 같은 주요 경제 파트너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도도 문화도 갖추지 못한 어려운 경제 침체기에 한 혁명가가 순수한 자발적 의지만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시킬 수 있을까?

매우 우려되는 점은 지역의 분열이다. 고도 3천m 이상의 거대한 산악 장벽이 북쪽에는 비슈케크, 남쪽에는 오슈 등 주요 거점 도시를 나눈다. 남쪽 도시에서 발생한 튤립 혁명은 북쪽 출신의 아카예프 대통령을 축출한 바 있다. 최근 북쪽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사태는 남쪽 출신 바키예프 체제를 전복했다. 남과 북의 분열은 정치적이고 지역적인 현실이다.

이처럼 이 나라를 구성하는 지역, 조직 또는 종족이 모자이크처럼 분열돼 있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처럼 진정한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민주화운동 넘어 사회운동으로 진화

세계경제 위기와 함께, 옛 소련 해체 이후 자유주의 정치의 실패로 촉발된 키르기스스탄 사태는 중앙아시아 공화국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1992년 러시아 신연방 지도자들은 자유주의로 선회하기 시작하면서 공적 지원금을 줄이고 대대적인 민영화를 단행했다. 이들은 당시 민중의 반발이 거세질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가격 자유화와 그로 인해 국민의 삶의 질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당시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 지역을 뒤흔든 주요 위기는 정치적 또는 민족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고, 주로 선거 조작이나 정치 부패와 관련돼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 탈라스와 비슈케크에서 시민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한 것은 에너지 요금 상승이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새로운 혁명은 옛 소련 이후 최초의 사회운동으로 역사 속에 기록될 것이다.

글•비켄 체테리안 Vicken Cheteria
전쟁과 분쟁 문제를 주로 취재해왔으며, 주요 저서로 <코카서스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the Caucasus·Columbia University Press·2009) 등이 있다.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국제단체 남극보호연합 한국지부 담당관. 주요 역서로 <녹색희망> 등이 있다.

<각주>
(1) ‘키르기스스탄의 무소불위 친족법’, <Ferghana.ru>, 2009년 11월 6일.
(2) ‘키르기스스탄: 이탈리아 마피아의 조직원이 바키예프 일족의 재정 컨설턴트인가?’ <Ferghana.ru>, 2010년 3월 10일.
(3) www.worldbank.org.kg.
(4) 매트 시겔, ‘비참한 경제 상황,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의 원조를 기다린다’, <AFP>, 2010년 4월 11일.
(5) 막심 바키예프는 마나스 미 공군기지에 석유를 팔아 월 600만 유로(약 69억 원)의 이익을 챙겼다. ‘키르기스스탄, 미국에 원유 판매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뉴욕타임스> 2010년 4월 11일.
(6) ‘키르기스스탄의 지도자는 미국이 독재체제를 키웠다고 말한다’, <월스트리트저널>, 2010년 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