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의 개념-뿌리들: 차이(2) 차이에서 차이생성으로

철학자 이정우의 특별연재 (6)

2017-10-31     이정우 | 철학자
흔히 ‘후기구조주의’로 불리는 사유들은 ‘차이들의 체계’에서 ‘차이생성’으로 그 존재론적 주안점을 이동시켰다. 사실, ‘후기구조주의’라는 ‘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길을 걸어간 일군의 사상가들을 편의상 묶어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다시 말해, ‘후기구조주의’라는 말은 “구조주의 이후 그것의 성과를 수용하되 그것과 대결하면서 사유를 펼친 일군의 사상가들의 사유”의 준말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차이생성’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차이들의 ‘체계’에 대한 정적인 사유로부터 차이들의 ‘생성의 장’에 대한 동적인 사유로의 변환이라는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것과는 아예 다른 존재론적 단위(Entity)를 도입하는 맥락, 앞에서 상징적인 것 이전에 언급했던 실재적인 것과는 다른 뉘앙스에서의 ‘실재적인 것(le Réel)’의 도입이다. 이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제압되는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에 구멍을 내면서 새롭게 귀환하는 타자로서의 실재다. 

구조를 정적인 장, 차이들의 체계가 아니라 보다 역동적인 장, 차이생성의 체계로 사유하게 된 계기는 사실 구조주의의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왔다. 사실 가장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라 할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탐구 과정에서 “떠다니는 기표”를 발견했다. 그러나 구조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된 실마리인 이 존재를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그것을 그저 비정상적인,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오히려 레비-스트로스는 말년에 구조의 바깥을 인정하게 된다. 구조‘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고 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대담집인 <가까이에서 그리고 멀리에서>에 이런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오히려 이 예외적인 것이 구조 전체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그런 역동성을 통해서 구조가 잘 작동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차이들‘의 체계’만이 아니라 차이들‘의 놀이’를 언급했을 때 이 측면이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고 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놀이가 배구공의 토스에서처럼 단순한 순환성이 아니라 ‘떠다니는 기표’라는 매우 특이한 존재, 특이성(Singularité) 또는 ‘우발점(le point aléatoire)’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의 발견에 있다. 

이 예외적인 것은 일종의 무(無)다. 그러나 이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없음’이다. 구조 전체, 즉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일정하게 모양 짓는 것은 바로 이 무다. 그것은 바퀴 한가운데의 비어-있음이 바퀴살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파했던 노자의 ‘무’와 통하는, 일종의 빈칸으로서의 무다.(노자, <도덕경>, 왕필본, 44장) 요컨대 무의 자리 - 계속 자리바꿈(déplacement)하는 자리, 즉 돌아다니는 무 - 가 체계 전체의 구도를 좌우한다. 무의 이런 작동은 존재와 무 사이의 단적인 대조의 경우(예컨대 반지의 가운데 구멍이 반지가 반지임을 가능하게 하듯)와는 다르다(이런 경우는 헤겔, 사르트르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무의 작동은 반드시 계열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구조는 상징적 요소들(앞에서 언급했던 ‘~素’들)이 이루는 계열들의 그물이기 때문이다. 구조의 위치들은 밋밋하게 분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계열들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무’는 바로 이 네트워크를 돌아다닌다.

사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본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분석이 이미 기존의 정적 구조주의 사유를 넘어 동적 구조주의를 잘 보여준다. 라캉의 분석은 단지 구조만이 아니라 그 구조에서의 어떤 빈칸, 더구나 돌아다니는 빈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 또 그 구조를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독특한 기표로서의 편지다. 편지의 내용이 끝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편지가 일종의 ‘무’라는 사실을 인상 깊게 보여주는 설정이다. 그러나 내용이 ‘무’임에도 편지는 일정한 자리에 위치함으로써, 더 중요하게는 그 자리를 계속 옮겨 다님으로써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느 곳이 ‘무’인지가, 즉 어느 장소에서 편지의 내용-모름이 작동하고 있는가에 따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계속 달라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캉은 이 구조에서의 자리바꿈을 특히 중요하게 여겨 분석하고 있으며, 대신의 자리바꿈(과 소거) 역시 구조를 보다 역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이 자리바꿈은 구조주의 이전에 프로이트의 꿈 분석에 이미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꿈-작업’의 네 핵심요소들 중 처음 둘은 ‘압축(Verdichtung)’과 ‘전치(Verschiebung)’였다. 여기에서 전치는 곧 우리가 논하고 있는 자리바꿈 개념에 해당한다). 

이렇게 역동화된 구조를 우리는 다른 작품들(예컨대 <오델로>에 등장하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에서 이 우발점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을 남기고 있다.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소재로 분석했던 ‘왕의 자리’는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푸코, <말과 사물>)

근원적 차이생성으로서의 실재의 귀환

그러나 차이생성의 보다 급진적인 맥락은, 구조의 역동화를 넘어 구조 자체의 바깥을 사유하는 흐름으로 나아간다. 구조주의 이후 사상가들은 구조주의의 과도한 기표중심주의를 비판하고 그 바깥에서  ‘실재’를 다시 찾았다.
구조주의 사유는 매우 다양한 인물, 분야, 방법 등을 포괄하고 있거니와, 그 철학적 함축에 관련해서는 경험과학의 성격을 보완한 플라톤주의에서 다원적으로/상대주의적으로 변형된 칸트주의에 이르기까지 긴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을 비롯한 주요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실재를 상징적인 것 너머에서 찾았고, 이 점에서 이들이 기표중심주의를 벗어나 실재의 귀환을 사유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상징적인 것이 온전히 포획할 수 없는 어떤 ‘실재’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이 실재의 차원은 ‘욕동’으로서 존재한다. 라캉의 욕동(프로이드는 Trieb라고 표기했으나, 라캉은 이를 Pulsion로 번역했다)은 인간/문화 안에 들어온 자연이자, 코스모스 속에 들어온 카오스다. 인간은 이 욕동에 의해 시달린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욕동(Appétit, 국내 번역에서는 프로이드의 Trieb와 라캉의 Pulsio까지도 욕동이라고 부른다)을 인간의 본질로서, 의식을 동반하지 않은 욕망으로 이해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용법은 이를 잇고 있다. 이 욕동은 인간이 상징계로 들어갈 때 억압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언제라도 분출할 수 있는 활화산으로서 무의식을 지배한다. 상징계는 불완전하며 늘 이 실재계의 귀환을 통해서 구멍이 나곤 한다. 
라캉에게 삶의 본질은 욕동이다. 상징계는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며, 주체가 상상계에 진입하면서 그의 무의식으로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욕동은 주체에게 애초에 주어진 것, 삶/생명의 본질 자체다. 정신분석학에서 삶/생명의 본질은 본능이 아니라 욕동이다. 본능은 특정한 대상과 특정한 행동을 전제한다(예컨대 벌집을 짓는 벌의 본능). 반면 욕동은 특정한 대상을 전제하지 않으며 특정한 행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욕동은 인간이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억압됐으나, 무의식에 여전히 남아 끝없이 우리를 어디에론가 몰아가는 힘이다. 이 ‘어디에론가’를 라캉은 소타자, 대상 a로 파악한다. 그러나 욕동의 대상인 대상 a는 영원히 상실된 대상이고 잡을 수 없는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외적 대상을 향하는, 그 대상과 꼭 합치하는 본능과는 구분된다. 대상 a는 ‘공허의 현존’이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결여’다(이 내용은 라캉의 세미나 <정신분석학의 네 근본 개념>에 수록돼 있는 <주체와 대타자>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욕동에 대한 만족은 ‘도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회’를 통해서 이뤄진다. “욕동은 대상 a 주위를 선회한다.”

‘향유(주이상스, Jouissance)’는 이 실재를 지향한다. 욕망의 문제에 천착하던 라캉은 말년에 이르러 향유의 문제에 전념한다. 향유는 욕망과 다르다. 욕망은 대상 a에 의해 촉발되지만 그것들을 대체하는 부분대상들(차라리 기표들)을 찾아 선회한다. 반면 향유는 잃어버린 전체, 그러나 사실은 존재한 적도 없는 환상으로서의 전체에 도달해 완벽한 합치를 느끼려 한다. 물론 이런 향유는 불가능하다(라캉은 이를 “a”로 표시한다). 대상 a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 a는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향유를 유발한다는 뜻에서 ‘잉여향유(Plus-de-jouir)’이기도 하다. 

욕동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향유는 상징계 아래로 내려가 그것이 억압하고 있는 욕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로 그 ‘실재적인 것’이란 오래전에 사라진, 나아가 어떤 면에서는 존재한 적도 없는 어떤 것, 환상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상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향유라는 개념에는 이렇게 실재적인 것에의 지향과 상상적인 것에의 지향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깃들이 있다. 이것은 곧 라캉에게서 ‘실재적인 것’이란 즉자적으로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거쳐져 다시 지향하게 되는 상상적인 것(이미지적인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 점에서 라캉의 실재(프로이트의 ‘그것=das Ding’)는 철저하게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이런 식의 실재의 귀환은 다른 여러 사상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차이생성’의 또 다른 의미를 천착한 경우는 특히 들뢰즈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들뢰즈에게 차이생성이란 상징계의 그물을 찢으면서 등장하는 어떤 것, 어떤 존재가 아니다. 그의 차이생성은 어떤 ‘것’, 어떤 ‘존재’라는 개별화된 무엇이 아니라 모든 개별화 이전에 존재=생성하는 ‘차이 그 자체’, ‘순수 차이’다. 이는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에 뿌리를 둔 존재론적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사유가 아니라 ‘생성에서 존재자들로’의 사유다. 이를 그는 3단계로 설명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자(Entity)’들은 x가 아니라 dx다. 즉, 오직 생성만이 존재한다. 

달리 말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생성하는 것이다. 철수는 d(철수)이고, 저 소나무는 d(저-소나무)이며, 민주주의는 d(민주주의)다. 여기에서 d는 말할 필요도 없이 ‘differentiation’의 d이며, 수학적으로는 dx에서의 d다. 모든 존재자들은 생성하는 dx들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들은 미-결정된(Undetermined) 존재들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dx와 dy가 비율관계(Rapport)를 이루면 특정한 결정된 양이 나오듯, 모든 dx들은 서로 비율관계를 맺음으로써 어떤 특정한 결정된 존재를 낳는다고 본다. 생성하는 노란색과 생성하는 빨간색이 주황색이라는 일정한 색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극소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 사이에서 무수한 층차를 이루면서 성립한다.(이 점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4장에서 전개된다. 들뢰즈 사유의 중추를 이루는 부분이다) 들뢰즈의 사유는 이 차이생성에 근간을 두고 있다.

후기구조주의에서의 우발점의 차이생성에 해당하는 내용은 <의미의 논리>에 등장한다. <차이의 반복>이 실재 자체를 다룬다면, 이 저작은 사건들 사이의 관계, 그 장을 다룬다. 이 점에서 구조주의를 잇고 있지만, 여기에서 구조(이 말을 여전히 쓴다면)를 채우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위치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사건들의 계열화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되며(이정우, <사건의 철학>, 그린비, 2011, 4장), 이 계열들의 장이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적 뉘앙스에서의 구조라 할 수 있다. 논의의 앞부분에서 연극의 예를 들었거니와, 이 맥락에서 연극을 볼 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인자들은 인물, 감정, 구조가 아니라 바로 사건들이다. 구조주의적 사유는 이 사건들의 장으로 대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도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우발점으로 등장함으로써 사건들의 장 전체가 변화해 가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들뢰즈에게서의 우발점은 빈칸, 무(無)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적 차이생성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이생성을 둘러싸고서,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 식의 정신분석학 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실재’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실재란 반복강박을 통해서 드러나는 죽음욕동(Pulsion de mort)이다(이 점은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에 수록돼 있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 잘 나타나 있다). 반면 들뢰즈에게 실재란 곧 존재의 잠재성으로서의 생명에 다름 아니다. 위에서 말한 생성존재론의 보다 내용적인 측면이 바로 생명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실재는 베르그송의 생명약동(élan vital)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 모두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고 상징계를 변화시키는 차이생성이다. 그러나 이 차이생성의 성격과 작동방식은 크게 다르다. 프로이트-라캉(-지젝)의 죽음욕동과 베르그송-들뢰즈의 생명약동은 실재에 대한 대조적인 두 개념화이며, 앞으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한 흥미로운 주제라 하겠다.

결론: 생명을 사유하기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돼 온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사유의 존재론적 핵을 차이와 차이생성으로 잡아서 논했다. 오늘날 이런 흐름을 이어 행할 수 있고 또 행해야 할 작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을 사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사회생물학 등 조악한 환원주의의 폐단을 언급했거니와, 그럼에도 이런 유형의 작업은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런 작업은 특정한 분야에서 이뤄진 성과를 다른 분야들에 일방적으로 투사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이런 유형의 작업을 하는 자연과학자들의 저작들을 들여다 볼 때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거의 제로에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다. 하물며 (후기)구조주의가 인간과학/인문사회과학의 전부도 아니다. 방대한 영역의 한 부분/갈래일 뿐이다. 이런 종합적인 작업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균형 잡힌 지식과 그것을 통합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철학적 지성이 담보됐을 때에만 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과제가 이런 종합적인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재사유를 수행하고 그 바탕 위에서 (자연과 문화를 포괄하는) 생태학적 삶을 모색하는데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구조주의의 한계가 밝혀지고 새로운 실재 개념이 등장해 오늘날까지도 재사유되고 있는 이 흐름이 이런 작업을 가능케 하는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차이생성을 보다 근본적으로 개념화하고, 그 위에서 차이들(관계들의 생성)을 사유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