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해진 TV, 예능 불방의 ‘정치적 예능’

[특집] 천안함 진실을 덮은 장막들

2010-05-10     김성윤

돌이켜보면 예전의 <진실게임> 같은 프로그램이 지금의 현상을 압축적으로 예견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누구누구를 찾는 이 프로그램에서 진짜 재미는 ‘진실’ 자체보다 진실을 가리는 과정에 있었다. 게스트들은 어설프거나 진실스러운 이중삼중의 연기를 하고, 고정 패널들은 온갖 이성과 감각을 동원해 추리해나가는 실천 형식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프로그램 종반부에 마침내 진짜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진실의 종’이 울리는 순간은 곧이은 TV 광고를 통해 단절되는 반면, 패널과 시청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게임의 수행 과정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실종자는 더 찾았다니?” 밖에 나갔다가 귀가하는 어머니가 요즘 내게 건네는 첫마디는 대개 이런 식이다. “함미를 건져 올리면 북한 짓이라는 게 밝혀진다니깐.” 한가로운 시간 식당 홀에 나와 쉬고 있는 아줌마들은 천안함 사건으로 수다가 한창이다. “북한 애들한테 뒤통수 맞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택시기사는 반공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도로를 질주한다. 시민들은 이렇게 ‘진실게임’의 패널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의 기획인지 종잡을 수야 없지만, 우리는 미디어의 진행에 따라 군과 청와대의 연기를 보고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

 

주말 황금시간대에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사람들에겐 볼 것이 없어졌는지 몰라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화법에 익숙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모처럼 공적인 사안을 가지고 이야기할 소재가 생긴 게 분명하다. 걱정하고 애태우고 염려하고 울먹인다. 그런가 하면 의심하고 추리하고 분노하고 전파한다. 아들에 대한 보살핌과 외부 적에 대한 공포가 하나의 감각으로 엮이면서 이 ‘진실게임’의 극적인 효과는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이렇게 진짜 진실게임이 상영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공중파 TV의 예능 프로그램은 결방되고 있다. 시작은 문화방송 파업으로 <무한도전> 등이 결방한 것이지만, 천안함 침몰 사건을 계기로 공중파 3사의 예능 전체가 시민 애도 물결 속에서 거의 한 달 넘게 자취를 감췄다.(1)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어느 시대에나 문화는 과잉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경제, 정치 등에 비추어봤을 때 문화는 속칭 ‘잉여짓’에 속한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인권을 보장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문화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문화는 잉여이기 때문이다.

<진실게임>, 현실서 절찬 상영 중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 마찬가지 논리가 발견된다. 도덕적 엄숙함과 정치적 심각함이 조성된 마당에 문화, 그중에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예능 프로그램이 억제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엔터테인먼트의 우리말 번역이 ‘여흥’(餘興), 즉 ‘남는 흥’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부언할 필요 없다. 예술적 능력이라는 ‘예능’의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대한민국에서 예능은 언제나 잉여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이런 상식에 의문을 품게 한다.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한 달 이상 결방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게다가 예능 프로그램이 완전 결방되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에 <7급 공무원>이나 프로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지난 방영분을 모아 ‘스페셜’ 등의 명목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진심으로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는 것일까. 의심은 더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상식은 요상한 외설스러움에 한창 분열하고 있지 않은가.

기현상은 그뿐만이 아니다. 조·중·동은 난데없이 ‘인간어뢰’를 등장시키고, 천안함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을 ‘영웅’, ‘용사’라 칭한다. 과잉도 이런 과잉이 없다. ‘장렬히 전사….’ 익숙한 논리와 전혀 동떨어진 방식으로 영웅이 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에서는 성금 모금이 한창이라 곧 200억 원을 돌파할 기세라고 한다. TV 화면 오른쪽 위에는 ARS 전화번호가 떠 있고, 길거리 모금 행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이게 무슨 ‘평화의 댐’ 건설 비용 충당도 아니고, 대체 왜 시민에게 돈을 걷는 것일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실로 가득하다. 요는 이렇다. 문화(라는 잉여)는 과연 억제되고 있는 것일까. 비록 유재석과 강호동의 ‘오버액션’, 그리고 박명수와 조권의 ‘깨방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에 필적할 만한 과잉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 결국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추도 분위기를 조성한다 해도 문화라는 잉여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억압이라기보다는 문화(정치)의 여전한 과잉 상태다.

엄숙하다 못해 외설스럽다

일시적으로 예능은 사라졌지만 그 기능은 다른 형태의 유행 형식을 통해 대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일간신문의 정치면이 정책대결 같은 진지한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니라, A가 B를 배신하고 C가 D의 가신이고 E가 F를… 등 형식으로 극적 요소를 활용한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치가 이미 외설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사실이 그렇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이야기 삼아 사실상 즐긴다. <제○공화국> 같은 정치드라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정치란 애초부터 예능 프로그램만큼 경박했다. 단지 지금은 예능이 아닌 북한 개입 의혹같이 정치의 가면을 쓴 외설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망자에 대한 도덕적 엄숙함과 더불어 진실게임이라는 외설적 향락이 작동하는 가운데, 이 독특한 과잉에 대해 권태와 의혹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의도된 정답을 맞히는 패널이 있는가 하면, 문제를 풀어내는 중에 그럴듯한 오답을 제출하는 패널도 있기 마련이다. 이 궤변적 추리의 첫 출발점은 때때로 이해 불가능한 지점을 문제 삼는 것에서 나온다. 왜 하필 그때 예능 프로그램은 결방된 것일까. 우리는 왜 필요 이상의, 그것도 의도되고 획일된 애도와 추모를 해야 하는 것일까. 혹시 작가와 PD가 우리의 오판을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일종의 정치적 질문과 답변이 동기화된다. 그때 하필 한명숙의 비리 혐의 공판이 있었다는 점, 그때 하필 종교계에서 4대강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 무엇보다 그때 하필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북풍’이라는 익숙한 어떤 것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서해에서 때마침 공격적인 독수리훈련이 진행 중이었고, 침몰 사건 이후 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으며, 군이 사활을 걸고 정보를 통제했다는 사실 등은 이 매력적인 오답의 정답 가능성을 보충해준다.

의도된 정답과 매력적인 오답

그렇지만 본격적인 진실게임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진실게임이 진정한 게임이기 위해서는 게임에 ‘매력적 오답’이라는 갈등적 요소가 체계적으로 내부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게임은 게임을 즐기는 것뿐 아니라 진실 여부를 가리는 것을 허용한다. 다만, 게임의 형식 자체에 대한 의심만 금지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의도된 정답이나 매력적인 오답은,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실상 같은 몸통을 지닌 단지 다른 두 얼굴에 불과하지 않은가.

무엇이 진실인지 물으며 게임에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우리 중 일부는 자신이 지닌 공적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로 대체하려 한다. 이는 북한이나 다른 외부 적에 대한 적대감으로 귀결하고 그 사이에 지방선거를 앞둔 북풍에 휘말린다. 따라서 그 사람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줘야 한다. 이런 절차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무지한 대중에 대한 계몽주의라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부정적 함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작 우리 자신조차 그 진실이 무엇인지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군사정보 접근권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내가 제안하는 논점은 ‘무엇이 진실인가’가 아니라, 이 진실게임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에 있다. 진실이 북한에 있다고 믿는 대다수 사람들이 있고, 진짜 진실은 북한이 아니라 남쪽(이나 미국)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둘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과연 어느 쪽의 공작인지를 입증하려는 프레임이 형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북한의 개입을 수긍하거나 부정하(고 예능 결방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진실게임 와중에 이 프레임 밖으로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쟁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 단적으로 예능 결방의 시발점이 문화방송 파업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왜 논하지 않게 된 것일까. 만약 우리가 공적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한다면, 이 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힘을 실어줄 것인지 토론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공작 정치의 현실을 파헤치려 하지만 결국에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진실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정치 전선이 어떤 과오 속에서 획정된 바람에 정말로 중요한 정치로부터 물러난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다. 가까운 예로 노무현의 자살과 그에 대한 시민의 애도 속에서 용산 참사나 쌍용차 옥쇄파업투쟁은 현대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나 계급관계의 문제보다는 친MB냐 친노냐를 따지는 문제로 축소되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국면에서는 성적 도덕과 인권에 관한 논란을 거듭하는 와중에 성매매 집결지 대부분을 재개발 지구로 변경하려는 건설·투기자본과 도시정부의 이해관계는 은폐되었다(지난해 용산 참사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진실게임이 덮은 더 많은 진실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소홀히 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허구적 논리를 동원해 북한이라는 사실로 우리를 유도하는 게 지금의 지배적 흐름이라면, 그에 맞대응하려면 당연히 허구가 아닌 진정한 사실에 근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의혹과 음모만으로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에 휘말리는 것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또 하나의 환상을 제거해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모두가 어떤 실제적인 뇌관을 봉인하기 위해 쳐놓은 그물 말이다. 우리는 종종 환상의 장막을 겉에 보이는 하나만 벗겨내려고 하는데, 실제 현실은 이중삼중으로 체계화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곧 있으면 게임이 종료되고 ‘진실의 종’이 울릴 것이다. 여기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TV 광고가 시작되고 시청자는 채널을 돌릴 것이다. 할 만큼의 애도는, 즉 공적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했으니 말이다. 덧붙여 진실게임이라는 의무까지 다했고…. 그렇게 우리 시대의 정치는 소실되어간다. 북풍에 의해서든 남풍에 의해서든.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글•김성윤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 중앙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계원예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각주>
(1) 지난 4월 29일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영결식이 끝난 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이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