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 쳐다보는 야권연대, 실패의 의지

2010-05-10     정병기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권 연대가 끝내 실패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를 다시 촉진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민주주의 후퇴의 장본인인 한나라당의 독주를 막는 일이 매우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보수 진영보다 진보 진영이 더 분열된 상황에서는 진보적 유권자의 표가 분산되어 이들의 염원을 정치적으로 형성해낼 수 없다. 한나라당의 반민주적 정치가 덜 심각해서인가, 아니면 야당의 민주의식과 연합정치력이 약해서인가? 정책 연합이든 집권 연합이든 구체적 형태는 다르지만 적어도 연합의 묘미는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실질적 정책교환을 하면서 선거에서 집권 연합을 이루는 것이 연합정치의 묘미다. 그런데 야권 연대의 주도 정당은 민주주의의 재촉진이나 정책교환을 통한 정치 발전보다 후보 자리에 더 연연함으로써 소중한 기회가 날아가버릴 공산이 커졌다.

한국 민주주의가 과거보다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하지만 이미 민주화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여전히 부족한 민주주의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사회복지 체계를 이룩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환경이나 성(性)평등 같은 일상성의 민주주의가 요원한 실정이다. 가장 기본인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완성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민주적인 대통령을 탄핵한, 세계 정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후퇴했다는 것은 국민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여서 다시 시시콜콜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권의 민주 회복 의지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재론할 필요 없다.

국가기구와 정치사회, 시민사회라는 삼분법을 적용해 좀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에 관심을 돌려보자. 행정부와 사법부, 입법부 같은 국가권력 기관을 국가기구라 보고, 정당과 그에 준하는 정치단체를 정치사회라 하며, 여론과 사회단체 등 정치적 견해와 활동에 참가하는 비정치권 사회영역을 시민사회라 분류할 수 있다.

권력 추구와 정치혐오증의 함수

현재 한국에서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 심각하게 파편되어 있다. 그러나 다양성 인정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보듯이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넓고 이들이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이른바 ‘정치적 관용’은 정치 발전의 중요한 덕목이며, 정치학에서 민주주의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이 파편화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최근 야권 연대의 실패가 이런 현상 중 하나지만 그 뿌리는 민주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국가권력 혹은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과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 주도층이 타협해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 사회는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분열되어왔다. 그중에서도 국가권력에 좀더 가까이 있는 정치사회의 분열은 권력 추구에 민감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시민사회 또한 권력과 유착된 경우가 아니라면 지속적으로 ‘독재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여전히 정치적 민주주의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라 우리 국민 중에는 시민사회 영역에서조차 이탈해 정치혐오층이 되는 사람이 적지않다. ‘투표는 해서 뭣하느냐’는 무기력증이 늘어나면서 투표율이 갈수록 떨어진다. 오히려 지킬 것이 많은 기득권층이 더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가해 보수 정권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는 상황이다.

비례대표제라는 투명한 거울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정치사회의 행태와 국민의 정치혐오증은 정당정치가 발전한 유럽과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제도적 차이가 뚜렷이 자리한다는 사실에서 유익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하면 대륙 유럽의 모든 국가는 한결같이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 비례대표제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존재할 때 사표를 방지해 투표율을 제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 간 연합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다. 다양한 정당이 각자 선거에 참여해 비록 소수의 유권자 집단일지라도 의원을 배출할 수 있으며, 선거 이후에 이 정당들은 다수 형성을 위해 연합정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권자 의사와 무관하게 정당 간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할 우려가 있다. 제1공화국 이탈리아가 대표적 예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단순다수대표제(상대적 다수를 얻은 1위 후보를 당선자로 확정)를 대폭 도입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의 문제점은 비례대표제 자체가 아니라 몇몇 보스 정치인에 의해 좌우되는 명부 작성의 비민주성이었으며,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넓은 현실을 반영해 몇 년 후에는 다시 비례대표제로 회귀했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도 다수대표제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다른 제도를 통해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영국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 의회다수당을 구성한 정당이 행정부를 운영하는 내각책임제를 통해 보완했으며, 프랑스는 결선투표를 거치는 절대다수대표제를 채택했다.

지역주의만 탓하지 마라

비례대표제는 지역주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근의 여러 선거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는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만일 지역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도 현행 제도처럼 1위 후보가 당선되는 1구1인 단순다수대표제를 유지한다면 다수당 일당 독식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지역에서 고른 지지를 받는 4개 정당이 있고, 각 당에서 1명씩 출마해 4명이 경쟁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세 정당이 25%를 넘지 않는 지지율을 얻고 한 정당만이 25%+1표를 얻으며 이것이 전국의 모든 선거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면, 25%+1표를 얻은 정당이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하게 된다. 이것이 지역주의가 사라짐에 따라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절실해지는 이유다.

지역주의를 약화시키는 데도 비례대표제가 유용하다. 지역주의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특정 지역에서 모든 주민이 한 정당만 지지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소수 의견을 반영해 이들의 입장이 의회에 반영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제 정치혐오증 문제를 정당정치의 차원에서 논의해보자. 유럽도 정치혐오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만큼 정당혐오증과 함께 나타나 큰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 주요 원인은 우선 과거 이념정당이 집권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선거 승리에 매몰되는 선거전문가정당 혹은 포괄정당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포괄정당화는 득표율 제고에 도움이 된다면 당의 이념과 정체성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슈를 공약으로 내거는 정당으로 바뀌는 현상으로서, 정당정치가 유권자의 이해보다 정치인의 이해를 추구하는 정치로 퇴락하는 주된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이념을 상실한 정당은 다시 의원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원내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이 정당들이 카르텔 정당 체제를 형성해나간다는 점에 있다. 곧 입법기관인 의회를 장악한 정당과 그 중심인 원내정당 구성원은 특히 정당법 및 선거법과 관련해 자신과 소속 당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온 것이다. 거대정당과 기성정당에 유리한 봉쇄조항 신설이나 공영방송 접근권 혹은 국고보조금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보수주의 계승형 카르텔 깨려면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유럽의 정당혐오증과 정치혐오증은 19세기형 정당이 수행하는 정당정치 혹은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증을 말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구분되어 나타난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정당혐오증은 여전히 부정부패와 권위주의 정치에 책임 있는 기성정당에 대한 혐오증으로서, 정치혐오증과 중복된 면이 더 크다. 타협에 의한 민주화에 의해 과거 권위주의 정당이 정치사회를 다시 장악하면서 우리나라 정당 체제는 이른바 보수주의 기성정당 체제를 이어받은 이른바 ‘계승형 카르텔 정당 체제’로 발전해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치혐오증은 적어도 아직은 보수주의 카르텔 정당 체제에 대한 정당혐오증의 다른 표현이다. 최근 야권 연대의 실패는 이미 기성정당의 범주에 들어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계열의 정당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기성정당 전체의 카르텔화와 무관하지 않다. 곧 국가권력 추구에 지나치게 민감한 정치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도 개혁 통해 정치사회 바꿔야

국가기구의 개혁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역량과 움직임에 좌우된다고 볼 때, 우리 문제의 해소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각자의 노력과 두 부문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 달려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새로운 정치참여 형태의 등장은 특히 시민사회 역량 강화와 적극적 행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충분히 발전해가고 있고, 전망도 밝다. 문제는 정치사회의 행태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관계 설정에 있다.

무엇보다 정치사회는 시민사회의 역할 강화와 새로운 참여 유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특히 보수주의 카르텔 정당 체제는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거꾸로 읽어내면 정치혐오증과 정당혐오증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와 있기 때문에 이에 위기를 느낀 기성정당의 힘겨운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정당법과 선거법의 개혁을 통해 정당의 기득권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시킨다면 시민·사회 단체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나고, 그에 대한 국민 호응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정치는 이제 정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직접 정치참여가 증가하고, 새로운 참여 유형이 더욱 다양하게 생겨날 것이다.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권력의 정치를 일상성의 정치로 전환하는 것이며, 진정한 민주적 관계 설정이다.

야권 연대의 난맥에서 우리는 롤모델과 반면교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가시화했음에도 정치사회의 권력정치로 인해 연대가 무산된다면, 이를 계기로 정치사회의 변화 및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제도적 개혁 요구가 강하게 제기될 것이다.

글•정병기
베를린자유대 정치학 석·박사. <이탈리아 노동운동사>(2000),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공저·2006)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