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권에서 저작권까지
무형 자산을 둘러싼 밀실협정

2010-05-10     플로랑 라트리브

지적재산권은 21세기의 검은 황금인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지재권은 때때로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고, 빈국의 환자를 위태롭게 한다. 3년간의 밀실협상 끝에 윤곽을 드러낸 ‘위조방지협정’(ACTA)이 제국주의적 통상체제를 비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유럽연합(EU) 쪽 협상 대표는 철저한 익명성 보장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허락했다. 반면에 미국 로비스트는 비밀누설금지 서약을 이유로 교섭 초안 공개를 거절했다. 취재진의 공식적인 자료 요청을 거부하기는 EU 집행위원회도 마찬가지였다. “국제 통상 무대에서 EU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른바 다국적 제약사와 문화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국제협정은 이렇듯 짙은 베일 속에 가려 있다. ‘위조방지협정’(ACTA·Anti-Counterfeiting Trade Agreement)이 그것이다. 이 협정을 둘러싸고 벌써 3년째 공식적인 다자간 협의체 밖에서 협상이 한창이다.(1) 표현의 자유, 의료, 인터넷 통신 감시, 세계무역기구 등이 주요 의제라지만, 실제 교섭 내용을 아는 이는 전무하다.

 베일에 가린 ‘위조방지협정’

이 협정의 공식적인 목표는 위조 방지 강화다. 유명 상표를 베낀 ‘짝퉁’ 핸드백에서 복제 의약품, 또 인터넷에 무단 배포되는 저작물까지 그 대상은 광범위하다. 협정 문안에는 국경 단속을 강화하거나 위반 사범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다 보니 ‘국경 없는 의사회’(MSF)에서 활동하는 알렉상드라 욍베르는 “이 협정이 개도국으로 향하는 저가 제네릭(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의 카피) 의약품이 통관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고 우려한다. 한편 ‘인터넷기반서비스사업자’(ISP)와 ‘웹호스팅업체’(WSP)가 저작권 감시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폐해다. 인터넷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사법 단속 없이 이용자의 접속을 차단하거나 불법 사이트를 선별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 협정과 관련한 교섭 문서 몇 건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의 블로그(2)에 협정 내용을 요약해 올린 캐나다 대학교수 마이클 제스트는 “ACTA를 비롯한 지재권 관련 규정은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문화, 교육, 의료, 통신 등 일상생활과 직결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스티븐 메탈리츠 변호사는 “ACTA 문서 중 몇 건을 읽어봤다”고 털어놓았다. 관련 문서가 국제지적재산권연대(IIPA·International Intellectual Property Alliance)에 전달됐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워싱턴 소재 로비단체로, 미국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대표한다. 교섭 내용을 공유한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이 변호사도 엄격한 비밀누설금지 서약을 거쳤다. 로비단체에 대한 문서 공개를 두고 EU 쪽 협상 대표는 “별로 숨길 일이 아니다. 국제 통상 협상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관행일 뿐이다”라고 했다. 익명 보장을 조건으로 입을 연 이 대표는 “우리는 비정부기구나 산업계 대표와 정기적으로 회합한다. 그중에는 통신업계같이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업계가 포함됐다. 이런 관행은 절대 비밀스러운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문제는 유럽의회 의원 몇 명이 협상 문안을 요청했지만 열람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ACTA는 전문적인 내용에 범위도 모호하지만 정치적 목적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이 협정이 지재권 보호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제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저작권이나 특허권과 관련해 고도로 유지돼온 균형이 흔들릴 소지가 다분하다. 지재권 강화는 선-후진국 간의 국제 분업 체제를 완전히 고착화하는 문제를 내포한다. 선진국이 고부가가치 창의 산업을 이끌어가는 동안 후진국은 농공업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파리가 디자인한 패션 소품을 튀니지가 생산하고, 실리콘밸리가 설계한 컴퓨터를 아시아가 제작하는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국경과 인터넷 환경에서 위조 방지·단속을 강화하면 분명 ‘가짜 상품’의 시장 범람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엄격한 수준의 지재권 규정은 자칫 합법적인 복제나 제네릭 의약품 생산, 개인 간 P2P 파일 공유까지 저해하는 역효과를 몰고 올 것이다.

EU 쪽 협상 대표는 “유럽은 가격 경쟁력 면에서 타 국가와 게임이 되지 않는다. 대신 창의성과 품질, 문화, 혁신 면에서는 우수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한 편의 영화를 DVD로 대량 복제하거나, 유명 상표의 구두 디자인을 카피하거나, 선진국 제약사에서 개발한 의약품을 복제하는 것이 누워서 떡 먹기라는 사실이다. EU 쪽 협상 대표는 “이런 복제물은 모두 지재권 보호를 받지만, 상대적으로 쉽게 도용되고 유출되는 상황”이라며 “지재권이야말로 유럽의 경쟁력 제고에 중요한 요소이므로 제3세계에서 지재권 보호가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로비단체엔 공개, 유럽의회엔 비공개

지재권 강화 논리에 근거하는 것은 비단 미국의 정책뿐이 아니다. 2000년 EU가 채택한 ‘리스본 전략’도 궤를 같이한다. 제임스 러브는 “이같은 논리야말로 제국주의적 발상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비정부기구 세계지식생태학협회(KEI·Knowledge Ecology International)의 대표인 그는 “정치인은 지식 접근성과 지식 사용의 자유가 국가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선진국 발전에도 예외는 아닌데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정치인이 간과하는 또 다른 사실 중 하나는 다수의 선진국이 이전에는 자국의 발전을 위해 특허권이나 저작권에 대해 더 느슨한 정책을 전개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동안 다른 국가에서 착상을 얻어 자국의 기술이나 문화를 발전시켜왔다.(3) 그 예로 현재 누구보다 자국의 특허권을 강조하는 스위스는 19세기에 독일의 화학 분야를 모방했고, 미국은 1891년 이전까지 영국 유명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한 채 자국 출판사가 무단 전제로 쉽게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방조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선진국이 1980년을 기점으로 싹튼 지재권 강화 움직임을 수용하는 분위기다. 지식이나 문화 같은 무형의 것도 자산이나 자본의 개념이 될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저작권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다 보니, 이제는 공익 관련 부분까지 침해하는 방향으로 저작권이 확대되고 있다. 오늘날 시시한 발명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망라해 특허권이 남발되고 있다. 지재권이 뿌리를 내린 선진국에서는 아예 지재권 강화 법제까지 수출하려 든다. 예로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 관련 지재권협정(TRIPs)이 있다. 협정 결과, 후진국에 저가의 에이즈 치료제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의 의약품 생산이 특허권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외국에서 개발된 제품을 재생산하는 방식의 화학·제약 산업을 둔 나라도 낭패를 봤다. 인도를 비롯한 이 나라들은 제반 산업 모델에 대대적인 메스를 가해야 했다.

 국경에서 발 묶이는 의약품

EU 쪽 협상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ACTA는 ‘표준화’를 강화함으로써 선진국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는 협정이다. 하지만 반대자는 이미 표준화의 장벽이 너무 높아, 현재 진행 중인 협정이 오히려 불균형을 가중하는 역할만 할 것이라 전망한다. 국경 없는 의사회도 협정에 포함된 국경단속권에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2008년 후진국으로 향하던 인도발 선박 여러 척이 통관에 발목을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박에 적재된 의약품 때문이었다. 출발지나 도착지에서는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경유지인 유럽의 사정은 달랐다. 특허권 규정이 훨씬 엄격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의약품 지원이 몇 주 동안 지연됐고, 인도 당국의 항의가 빗발쳤다. 유엔 산하 국제의약품구매기구(Unitaid)가 항공세를 걷어 지원한 에이즈 치료제 49kg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2월 이 항공화물은 행선지인 나이지리아로 가지 못하고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억류됐다.

디지털 환경에서 지재권 강화의 경우, 온라인 서비스 제공업체나 기타 인터넷 기반 사업자에게 책임 소재를 묻는 사안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은 인터넷 분야에 대한 규제가 지금보다 강화되기를 바란다. 규제를 좀더 강화할 비책은 무엇일까? 온라인 서비스 제공업체에 인터넷 이용자의 위반 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하면 사법적 판단 없이 인터넷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선별하고, 이용자 접속을 차단하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할 수 있다. 더 이상 ‘불법 복제 행위’의 사실 여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 문화산업계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얼마 전 이러한 요구에 부흥해 온라인상 저작물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의 일명 ‘아도피법’(Hadopi)을 창안했다. 하지만 2009년 유럽의회는 이 법이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4)

무형 자산에 대한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ACTA에 따라 손해배상 수준을 확대하는 일은 오히려 혁신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요즘은 특허권이 남발되다 보니 “특허법을 위반하지 않고는 복합 소프트웨어나 휴대전화, 의료기기, 심지어 신차도 개발하기 어렵다”고 러브는 얘기한다. 그러므로 지재권 위반에 대한 벌금 수위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혁신의 씨를 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특허권 남발, 특허의 발목 잡다

막후 협상에 참여하는 협상국은 여론 호도 사실을 전면 부인한다. EU 쪽 협상 책임자는 “이 협정은 민주주의 절차상 하등의 문제가 없다. 유럽의회나 각국의 의회를 속이려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밀실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 국가들이 이론상 지재권 협상의 주체가 돼야 할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를 배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말에 이미 지재권 협상을 위해 WIPO 대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세계무역기구의 전신)을 택한 전력이 있다. 이때 농산물 시장 개방을 빌미로 후진국의 협정 체결을 유도했는데, WIPO였다면 생각할 수 없는 ‘거래’였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런 수법마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WIPO는 물론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지재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후진국과 비정부기구의 압력에 WIPO는 무릎을 꿇었다.

모든 수단이 원천 봉쇄된 다음에 최후로 택할 수 있는 길은 임시 협상뿐이다. 소수 국가(EU+10개국)끼리 비공식 협상을 하는 것이다. 이 전술의 효과는 탁월하다. 일단 다른 국가의 눈을 피해 소그룹 단위로 ACTA를 체결한다. 그다음, 각국이 이 협정을 법제화한다. 일단 여기까지 성공하고 나면, 양자협정을 맺을 때 다른 분야에 대한 양보를 미끼로 개도국으로 하여금 이 규정을 채택하게 종용하는 일만 남는다. 이러한 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1996년 WIPO의 온라인과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협정(5)이었다. 2001년 유럽법으로 채택된 이 협정은 2006년 프랑스 의회에 상정됐다. 물론 의원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국가가 맺은 국제적 약속을 위반할 수 없다는 정부의 논리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간 것이다. 국제 협정은 자고로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때 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후에 더 이상 손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ACTA도 마찬가지다. 이 협정의 경우 마지막 기회란 바로 지금이다.

글•플로랑 라트리브 Florent Latrive
지적재산권 전문가. <디지털 지식의 자유로운 아이들> <넷의 저작권 침해> 등을 썼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협상국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 한국, 멕시코, 모로코, 뉴질랜드, 싱가포르, 스위스가 있다. 2010년 타결을 목표로 진행되는 이 협상을 위해 지난 1월 멕시코에서 회담이 개최됐다.
(2) ‘유출’된 교섭 내용과 해설. www.michaelgeist.ca 참조.
(3) 영국 지재권 위원회, <Integrating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and development policy>, 런던, 2002년 9월www.iprcommission.org 참조.
(4) ‘인터넷, 문화혁명’, <Manière de voir> 109호(2010년 2~3월)
(5)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저작권조약(WCT·WIPO Copyright Treaty) 및 실연음반조약(WPPT·Wipo Performances and Phonograms Trea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