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경제학, 그리고 신경과학
2017-11-30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가을은 그저 ‘알밤’의 계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박멸주의-과학주의들이 만든 ‘작은 파이’(중의적 의미를 지닌 ‘알밤’과 ‘작은 파이’라는 단어를 이용한 언어유희. 여기서 ‘알밤’은 기만당하고 실망한 대중, ‘작은 파이’는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상품, 즉 다음에 소개된 학자들의 이론과 책을 의미-역주)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계절이기라도 한 것일까?
지난해 가을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부류의 하나로 카윅과 질베르베르그의 ‘경제적 부인주의(Negationism: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가 충분한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함. 흔히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역주)’를 선사한 바 있다. 가히 배설 수준에 가까운 책이었다. 올해 2017년은 비록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브로네르와 제앵의 활약에 힘입어 사회학의 시대로 기억되지 않을지.(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르푸앙(Le point)>(두 학자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낸 프랑스 주간지 <르푸앙>을 비꼬는 말-역주)의 사회학이라고 해야 할까?
박멸주의 경제학자나 체제친화적 사회학자의 활동은, 두 경우 모두 어설픈 아마추어 인식론이 활개 치고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사실 경제학에서만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다. 이미 우리는 경제학에서 그런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음을 안다. 실상 학문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학문 모두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사회질서를 비판하기는 매한가지다. 마치 사회질서 자체는 본래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듯 말이다. 물론 그들은 이토록 극도의 위험을 자초한 덕분에 그에 맞는 상당한 물질적 혹은 상징적인 보상을 누릴 수 있었다. 때로는 황제와 악수하는 호사까지.
경제학에 신경과학을 접목한다는 기막힌 발상
최근 인터넷상에는 제랄드 브로네르와 부르디외의 얼굴을 교차 편집한 사진이 무수히 떠돌아다닌다. 기껏해야 마크롱주의의 나팔수가 돼 우익언론의 장단에 맞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이나 하는 일개 사회학자가 마치 20세기 최고의 위대한 사회학자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실상 그들의 작태는 역설의 극치를 보여준다. 2016년 경제학자들의 행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한시적 권력과 결탁하고도 뻔뻔스럽게 ‘가치중립’에 대해 훈수를 두곤 한다. 사실상 가치중립이란 딱 석사과정까지만 유효한 개념인데, 마치 사회과학이 철저히 정치적 순수성을 지키는 어떤 윤리적 규칙을 갖춘 듯 대중을 오도한다. 매우 실질적이고도 중요한 ‘사회과학과 정치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이처럼 빈약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만다면, 우리는 그저 타인의 ‘편향성’을 비판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편향성은,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말한다. 사실 카윅 질베르베르그에서 브로네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중립성에 의문을 던질 자가 누구일까? 이미 그들의 이력이 낱낱이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여담이지만, 그리고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겠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언론친화적 사회학자와 미디어의 담론이 아주 훌륭하게 결탁하고 있음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자’와 ‘전투적(사회참여적) 사회학자’의 대립은 흡사 ‘데코되르’(<르몽드>지가 운영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팩트 체크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사이트-역주)의 수장이 말한 ‘중립적 언론인’과 ‘전투적(사회참여적) 언론인’의 대립과 딱 맞아 떨어진다.(2) 이처럼 사회학자라는 사람이 ‘데코덱스’(데코되르 사이트 운영자들이 만든, ‘교사들을 위한 팩트체크 정보를 제공’하는 검색엔진-역주) 특유의 자의적인 인식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은 아마 브로네르와 제앵의 저서에 대해 말을 아껴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노벨상의 주인은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의 기수이자, 경제학과 신경과학의 융합을 표방한 리처드 탈러에게 돌아갔다. 경제학에 신경과학을 접목하려는 이 기막힌 발상은, 우리 두 과학주의 사회학자들이 손뼉을 치며 환영할 일이다. 영상장치를 이용해 경제주체들이 보이는 행동양태의 진의를 분석한다는 데 감히 그 누가 이 학문의 과학성에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단 그것이 ‘전투적’(사회참여적) 사회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두 필자는 그들의 시도가 다소 모순됐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정작 가장 엄격한 결정론이 지배하는 학문인 신경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부르디외에게 반기를 들고’ 자유의지의 사회학을 복원하려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저지르는 무수한 지적 오류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구조주의’의 의혹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코노미스트>지조차 이미 10년 전에 똑같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공명영상(MRI)이라는 막강한 능력을 갖추고, 선조체(보상을 관장하는 뇌 영역-역주)나 두정엽(체감각 기능, 감각 통합과 공간 인식에 관여하는 뇌 영역-역주)의 주름 속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촉진하는 호르몬 분비선을 찾아낼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과거 골상학에서 자유의지를 관장하는 돌기를 찾아내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쨌거나 이미 그들은 그와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지만 말이다.
잠시 2002년 2월 피에르 부르디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기사, ‘현실참여적 지식을 위해’(한국어판 제목은 ‘지식인이여, 분노하라!’)를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때로는 어쩌면 우리에게 현실참여적인 지식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탈러-브로네르-제앵이 이루는 이 뜻밖의 조합은 사회과학을 점령한 신경과학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더욱이 여기에는 갑작스럽게 전향을 선언한 학자들의 적극적 공모와 ‘현대적’인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언론인의 수동적 공모가 얽혀 있다.
다음에 소개할 글은 필자가 2010년에 쓴 것이다. 사실 이 글은 ‘사회적인 것을 탐구하는 신경과학’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쳤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이 글은 경제학적 관점에서만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신경과학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으로 어떤 이바지(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적어도 이 글은 모르모트를 양전자 단층촬영장치에 넣어 검사한다고 우리가 훌륭하게 사회과학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리베라시옹>의 주장처럼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심리학’을 접목한다고 경제학이 더욱 ‘인간적인’ 학문으로 거듭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3)
에드몽 말랭보는 90년대 초에 쓴 한 글에서 행여 경제학자들이 사회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4) 사실 오늘날 우리 경제학자들은 정말로 그런 처지에 몰린 듯하다. 경제위기는 대체 언제까지 신고전주의 이론이 버텨낼까하는 암묵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현실 속에서 경제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사회인식론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주류가 이런 총체적 위기에 힘입어 권좌를 탈환하려는 야무진 꿈을 꿨다면(종종 지배자들이 저희들끼리 카드를 뒤섞어 새 게임을 시작할 때처럼), 그건 오산이다. 그러나 적어도 비주류의 바람이 싸움의 상대가 누구이고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을지, 사상 초유의 위기가 그들에게 어떤 이익을 선사할지 알고 싶은 것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변화의 방향을 예견해 몇 가지 개념을 갖춘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들 마이클 젠슨이 남긴 다음 말을 질리도록 반복하곤 한다. 그의 말은 언제나 매우 탄탄한 출발점(물론 매우 우스꽝스럽지만)이 돼준다. “경제학의 경우, 금융시장의 효율성이라는 가설보다 더 확실한 명제는 찾아볼 수 없다.”(5)
‘진정한 과학’, 그리고 수량화에 대한 환상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지적 참변에 이르게 된 것일까. 이유를 알고 싶다면 칸트가 남긴 유명한 말을 음미해보자. “자연을 다룬 모든 개별 이론에서 문자 그대로 과학성을 띠는 것은 오로지 그 이론에 담긴 수학적 양(Quantity)뿐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매우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이 문장을 아는 주류 경제학자가 극소수인데도, 사람들은 마치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이 문장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이 경제학자의 직업철학으로 통용되는 듯 여기기도 한다. 이 문장은 아마도 마르크스식으로는 이렇게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과학성의 실체를 안다. 그것은 수학이다. 우리는 과학성의 크기도 안다. 그것은 수학적 양이다.”
과학성을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경제학자의 호의적인 정신을 만날 때 온갖 폐해를 낳는다. 가령 경제학자들은 과학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조건(때로는 충족조건도)이 오로지 수학화에 있다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속성을 본질로, 외적 징후를 내적 일관성으로 받아들이는 이런 비극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조르주 캉길렘이 <무형 이론의 수학화>라는 저술에서 서문에 썼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서문에서 그는 마치 ‘경제학’을 의도적으로 겨눈 듯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특히 이런 지적을 남겼다.
“아무리 형태를 갖춘 이론일지라도 수학적 정보 측면에서는 아직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이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엄격성을 위해 이론에는 수학적 정보가 적용되지만, 수학적 정보는 이론을 훼손하지 않게 막아주는 보호막 같은 것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인식이 빈약한지 풍부한지, 해법이 어리석은지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찾아내 평가하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6) 우리는 이 문장이 특히 경제학자를 겨누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상 이 글이 경제학의 현 인식론적 상황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학의 상황을 보면, 마치 말을 장식하는 마의처럼 화려한 형식이 내용의 빈약함을 덮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진정한 과학’에 대한 신기루는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환상을 불어넣는다. 특히 이는 캉길렘이 또 다른 유형의 문제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줬다. 그것은 바로, 현 경제학의 인식론적 상황을 정확히 대변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부디 오해는 하지 말기를. 캉길렘은 과학 담론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도배하려는 것도, 이데올로기를 과학 담론으로 둔갑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신고전주의와 자유주의정책의 관계를 비판하려는 의도 따위는 없다.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전적으로 과학의 역사 및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기존의 과학모델을 모방하고 스스로 과학이 되려고 하는 확고한 야망”을 지닌 지식을 의미한다.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이미 제도화된 과학을 옆에서 곁눈질하는 지식으로, 제도화된 기존 과학의 권위를 선망하며 그 양식을 닮으려 애쓴다.”(7)
물론 이 문장은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아주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일반 경제학자들의 참모습만은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대개 많은 경제학자들은 단순히 경제학계의 물리학자가 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곁눈질하는 과학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과학을 수행할 수 있다고 철저히 믿는다. 어쨌거나 경제학 이론은 단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통합을 이룩해내지 않았던가. 시카고의 파생상품 시장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농민들의 생산양태, 혹은 범죄나 중독 행태에 관한 경제학은 이미 단 하나의 유일한 모델 속에 통합됐다. 반면 저 가련한 물리학은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원리를 통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조르주 캉길렘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경제학은 단순히 과학을 곁눈질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광기까지 품는다. 그 광기의 기원은 욕망 속을, 욕망의 혼돈 속을 들여다봐야 찾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광기의 기원이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특징을 이루는 욕망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과학을 수행하려는 욕망이다. 우리는 경제학의 경우 이 욕망이 매우 잘못된 길로 치달았음을 잘 알고 있다. 더욱 강하게 자극할수록 욕망은 한층 더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왜냐하면 경제학 역시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처럼, 갈릴레오의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하나의 어엿한 정량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이자 수치화된 사회관계를 탐구하는 과학이 되기를 자처한다. 근본적으로 통화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경제학은 즉각 정량화가 가능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엉겁결에 정량이 경제의 본질을 철저히 규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낳고 말았다. 말하자면 경제학 중 팩트를 다루는 영역은 원칙적으로 증명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다시 말해 경제적 수치를 함수관계의 보편적 구조로, 요컨대 ‘경제학의 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낳았던 것이다. 정량화할 수 있다면 수학화할 수 있고, 수학화할 수 있다면 증명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품은 갈릴레오적 환상이었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대상의 위기가 발생했다. 대상의 위기는 금세 대상에 대한 담론의 위기로 치달았고, 이런 사태는 대상의 인식론적 욕망 체계를 송두리째 뒤흔들며 변혁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느 수준까지 손질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그 전에 먼저 새 권력자(Hegemon)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탈금융위기 시대에 새로운 주류로 떠오를 가장 유력한 후보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지적영역에서 헤게모니의 전복이 일어나는 시간은 사분기라는 짧은 시간이 결코 아니다. 십 년 이상의 긴 시간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세월이 한참 지나야만 우리는 경주의 결과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선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럴 근거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새 패권의 주인공은 ‘행동경제학’(BE)이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경’경제학이다. 이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제 어디까지 ‘변혁’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정답은 ‘그다지 큰 변화는 아니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아무리 행동경제학(BE)이 신고전주의 이론을 권좌에서 끌어낼지라도, 과학을 수행하려는 욕망만은 온전히 둔 채 내용만 손질하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대로 경제학을 지배하는 주인이 바뀌더라도, 이 학문의 사팔뜨기는 분명 고치기 힘들 것이다. 기껏해야 곁눈질하는 방향이나 바꿀 수 있으리라. 캉길렘의 말에 쿤(미국의 과학사가-역주)의 말을 덧붙인다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과학적 이데올로기 체제를 유지하는 데 협력한 내부의 쿠데타를 엄밀한 의미의 과학혁명으로는 간주할 수 없다. 그 쿠데타란, 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교체하는 일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데올로기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한다는 것일까? 공리를 바탕으로 한 수리물리학의 자리를, 신경과학과 실험기록이 대신한다는 말이다. 신경생물학은 경제학을 위해 새로운 환상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신경생물학은 경제학이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형태로 과학을 수행하려는 욕망을 지속하게 해줄 것이다. 다만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역사적 세계의 대상에 적합한 특수한 과학성의 양식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주류, 신경경제학의 예고된 독주
그러나 그렇다고 환상은 품지 말자. 사실상 새로운 주류로 떠오른 신경경제학은 과거 신고전주의의 독재가 그리워질 만큼 강력한 독재자가 될 조짐을 벌써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론상으로 신경경제학은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본연의 성질을 잊게 만들고, 나아가 과거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오로지 신고전주의에만 국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행동경제학은 다음과 같이, 신고전주의 이론이 지닌 모든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것이다.
1) “우리는 마침내 창시자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동경제학(BE)은 초기 정치경제학에서처럼 공공연히 경제학과 심리학의 결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신고전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를 훼손했다. 우리는 역사 뒤에 묻힌 애덤 스미스의 공적을 다시금 바로잡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 중에는 <국부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대개 레옹 발라(왈라스)의 이론에 단순히 실마리만 제공한 책으로 잘못 알려진 <도덕 감정론>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는 감정의 힘, 특히 인정 욕구가 경제 행위를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2) 행동경제학이란 멋진 기회는 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간주되는 모든 시기를 전부 아우르며, 그동안 부당하게 과소평가됐던 보석들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가령 케인스를 보라. 그 역시 이 분야와 관련해 매우 심도 있는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가?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야성적 충동’(케인스는 경제인이 합리성 보다는 충동적 판단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야성적 충동에 대해 언급했다-역주)은 행동경제학과 접점을 이루는 부분이 많다.(8) 사실 우리는 여전히 행동경제학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매우 흥미로우리라 전망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매우 흥미롭다(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 전체적으로 행동경제학은 모든 사상의 역사를 제 것으로 삼아 역사를 재해석하며, 그동안 부당하게 어둠에 묻혔던 진정한 전통을 재발굴하게 해준다. 이런 작업은 태초의 기원과 시초로 돌아가자는 요구와 함께, 학계에 많은 이익을 선사할 것이다.
3) 전통성과 현대성. “우리는 창시자들만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모르모트를 양전자 단층촬영장치와 같은 각종 촬영장치에 넣어 검사하는 일까지 수행할 것이다.” 행동경제학만의 가장 큰 인식론적 차이가 있다면, 공리에 기초한 선험주의를 포기하고, 가변적인 성격의 실험과학을 경제학과 접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시도도 학문과 학계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것으로 이제 프리드먼식의 ‘방법론적 도구주의’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왜곡과는 영영 이별이다. 사실상 행동경제학은 공공연히 사실주의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아마도 이 사실주의야말로 행동경제학이 신고전주의 이론과 싸울 때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무기일 듯하다. 종종 신고전주의 이론의 사실성을 실험해보려는 유혹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이다. 이제 경제학자들은 같은 학파에 몸담은 동료들에게 본인의 경제 모델이 수학 언어로도 훌륭하게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언어로 설명하도록 종용받을 것이다. 그것은 캉길렘의 바람대로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인식이 빈약한지 풍부한지, 혹은 해법이 어리석은지,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녔는지” 평가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여하튼 그것이 바로 신경-행동 경제학이 추구하는 전략적 변화다. 이 시도의 첫 번째 효과는 경제학이 지닌 개별성을 지우고, 다른 학문의 눈에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경제학의 특성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다른 학문은 여전히 경제학의 공리가 실제 경제인의 행동양태와 얼마나 다른지 발견할 때마다 당혹스러워한다. 사실 ‘행동양태의 사실성’은 그 명칭에서 이미 드러나듯, 행동경제학이 표방하는 이상이기도 하다. 행동경제학은 바로 이 사실성을 절대적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루의 빈농은
‘가장 낮은 사회화 수준’을 지녔다?
멀리서 보면, 경제학을 과학성이라는 합리적 규범 속에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인식론적 표준화(정상화)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과학성을 표방하며 경제학이 어느 선부터는 기초적 관찰 내용을 무시한 가설을 세울 수 없도록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멀리서 본 모습에 불과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윙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행동경제학은 철저히 순수경험주의 쪽으로 기울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든 힘이 귀납적 방식에만 집중될 뿐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칼 포퍼 이전, 심지어 칸트 이전의 시대로의 회귀와도 같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선험주의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선험주의 체계는 없다. 선험주의의 부정은 온갖 선입견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이다. 매우 은밀하고도 무의식적이며 지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선입견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한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6년 9월호에 실린 세실 마랭의 ‘경제: 봇물 터지듯 넘쳐나는 사상학파’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반론이 행동경제학이 과학적 표준화 작업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누리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어 보인다. 더욱이 행동경제학이 신경과학이라는 단단한 토대에 기대고 있는 만큼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신경과학은 과학성에 있어서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우리가 꿈에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이자, 학계에 밝은 미래를 선사할 것이 분명한 학문이다. 가령 ‘사회생물융합과학’ 같은 흐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 통섭 지식은 신경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그 밖에 기타 인간행동학적 사회과학을 단 하나의 모태 속에 포괄할 것이다. 아마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학문은, 역사학 정도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역사학도 예외가 아닐지 모른다. 이를테면 히틀러의 안와전두피질이나 스탈린의 선조체를 탐구하는 파격적 연구가 등장하진 말라는 법이 있을까?
여기서 또다시 ‘사회과학’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신고전주의 이론과 똑같은 방식으로 흔적도 없이 폐기돼버렸다. 심지어 행동경제학이 게임이론 등 신고전주의 이론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을지언정 말이다. 최근 한 연구서는 신경과학이 과연 사회적인가라는 질문에 한 장을 할애했다. 물론 이 책은 경제 주체들을 상대로 가위바위보 게임 혹은 최후통첩 게임 따위를 시켜보면 이 질문이 예스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그들다운 지적을 하기도 한다. “개인의 행동양태가 게임이론에 나타난 개인주의적인 합리성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집단은 페루의 마치겡 가족처럼, 교육수준이 낮고 빈곤한 계층이다. 이런 사실은 겉보기에만 역설적일 뿐이다. 사실상 게임이론은 낮은 사회화 수준에 부합하는, 가장 기초적인 논리체계를 기초로 수립됐다.”
우리는 이 몇 문장으로 인해 참으로 당혹스러운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페루의 가난한 농민은 “가장 낮은 사회화 수준”을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인류학적 오류가 사회적 차별, 아니 모든 종류의 차별과 경합을 벌이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가장 비문명적인 집단이 게임이론의 행동양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전범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세 번째다. 바로 사회규범, 더 나아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이토록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다음의 명문장도 한 번 들여다보자. “최근 신경생물학은 상호주관적인 사회성을 가장 훌륭하게 통합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상호주관적 사회성’이라니,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비록 우리가 잘 깨닫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이란 결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존재, 즉 개인들로 구성된, 개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사회의 존재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본 심포지엄은 과학성과 정치·제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이야기를 하나 더 꺼내볼까 한다. 경제이론에 관한 성찰을 한다면서, 경제와 경제·정치권력의 관계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면 결코 완전한 성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신고전주의 이론이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이 이론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권력진영 내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했었는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단층촬영장치가 설치된 실험실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행동경제학이 사실상 모든 권력과 멀찍이 떨어져 오로지 과학이라는 상아탑 안에만 갇혀 지낼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전에 신고전주의 이론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복무하는 것을 보고 치를 떨었을지 모른다.
인간을 감시하고,
도구로 전락시키는 학문
그러나 그 정도는 약과다. 실상 신고전주의 이론은 단순히 거시경제정책을 가지고 노는 데 그쳤지만,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이 인간에 대한 학문, 신경-행동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주관성(Subjectivity)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던 신자유주의 기획처럼, 행동경제학도 과학적 데이터를 이용해 자본의 가치를 증대하려는 목적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거나 그에 알맞은 심리적 환경을 조성하려 시도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불확실한 가정에 불과하다고 두둔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실제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신경경제학이 트레이딩룸을 점령했는가 하면, 새로운 마케팅 수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BT나 롤스로이스 같은 대기업은 일찌감치 노동자를 위한 ‘정신건강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한편 심리정신피트니스법인 혹은 뉴로리더십연구소 등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컨설팅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설명 책자에 소개된 이 컨설팅 기업들의 주력 분야는 다음과 같다.
· 의사결정과 문제 해결 능력
· 타인과의 협력
· 변화 지원
·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압권은 ‘압박 속에서도 냉정 유지하기’다.
다시 말해, 이제는 더 이상 몰랐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처럼 신경과학으로 무장한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경영멘토로 변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활용수단이 바뀐 것뿐이다. 이제는 행동 경제학자들조차 신경-심리-경제의 통합을 목 놓아 외치며, 심리학자들의 뒤를 이으려고 한다. 가령 카너먼-트버스키의 프레이밍 이론(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먼저 전략적 틀 속에 넣어 대중에게 제시하고 규정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를 반박하려는 쪽은 오히려 상대방의 틀을 더 강화해 주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이론-역주)은 이미 예측체계의 적절한 배열을 통해 노동자를 기만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반세기 전, 캉길렘은 다소 표현은 과격했지만 오늘날 현대인에게까지 많은 울림을 주는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그는 심리학에 대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행동의 학문, 행동 교정의 학문인 심리학이 정도를 이탈할 수 있는 가능성에, 통치를 위한 온갖 기획에 동원돼 푸코가 말한 ‘품행인도’에 이용될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다. 캉길렘은 이렇게 물었다. “그 자신도 인간인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도구로 삼기 위한 야망의 도구로 전락하게끔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9) 캉길렘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철학의 몫이라고 간주했다. 이 인간에 대한 담론은 철학과 철저히 분리돼 자유로운 독립적 학문이 될 것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지한 철학, 다시 말해 사악한 철학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여기서 모든 중요한 문제를 전부 짚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조작, 표준화, 도구화 기획에 이용되는, 신경-심리-행동경제학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 한 마디 일성을 던지는 기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이 심리학을 상대로, ‘네가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알려주면 네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줄게’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저속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철학자는 심리학자에게 적어도 이렇게 방향성을 조언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소르본 대학 문을 나선 뒤 생자크 거리를 따라 죽 내려오다 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만나게 된다. 만일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위대한 인물들이 모셔진 팡테옹 국립묘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내리막길을 선택한다면 경찰서로 직행하게 되리라.”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와 유럽사회학연구소(CSE)에서 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금융위기, 사회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특히 저서 <언제까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근 저서로는 2009년에 출간된 <넘쳐나는 위기: 파산한 세계의 재건>(La crise de trop. Reconstruction d’un monde failli)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Gérald Bronner, Etienne Ghin, <Le danger sociologique(사회적 위험)>, PUF, 2017년.
(2)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Politique post-vérité ou journalisme post-politique?(탈진실 정책인가 탈정치 저널리즘인가?)’, ‘Charlot ministre de la vérité(진실의 총리, 샤를로)’ 참조할 것.
(3) Christophe Alix, ‘Le prix Nobel consacre une approche humaine de la discipline(노벨상, 인간적 접근의 학문에 돌아가다)’, <리베라시옹>, 2017년 10월 9일.
(4) Edmond Malinvaud, ‘Pourquoi les économistes ne font pas de découvertes(왜 경제학자들은 발견을 하지 않는가)’, <Revue d'Economie Politique>, 제106권, 제6호, 1996년.
(5) Michael Jensen, ‘Some Anomalous Evidences Regarding Market Efficiency’,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6(2-3), 1978년.
(6) Georges Canguilhem, <La mathématisation des doctrines informes(무형 이론의 수학화)>, Hermann, 1972년, 7쪽.
(7) Georges Canguilhem,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생명과학사의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Vrin, 1977년, 2009년, 47쪽, 54쪽.
(8) George Akerlof, Robert Shiller, <Animal Spirits>,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2009년.
(9) Georges Canguilhem, <E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des sciences(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연구)>, Vrin, 2002년, 3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