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협동조합(SCOP)과 노조의 불편한 동거

2017-11-30     마르고 에메리시 & 클레망틴 메테니에 | 활동가

노동자협동조합(SCOP)이 경영난 속에 파산한 기업들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현실적인 적용은 쉽지 않다. 이제, 직원들은 단순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직접 계획을 짜고 모든 업무를 조정해야 하는 경영자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또한 노조들은 새로운 경영체제 내에서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철장이 굳게 닫힌 채 텅 비어있는 공장은 어제보다 한층 더 우중충하다. 전면에 걸려있던, ‘에코플라 영원하라!’라고 적힌 플래카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요란하던 은박접시 생산공장이 지금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곳 생-뱅상-드-메르큐즈 코뮌(이제르 지역)에서 윙윙대던 기계들은 7km 남짓 거리의 라 테라스 코뮌으로 옮겨졌다. 에코플라를 인수한 이탈리아 기업 ‘쿠키’가 사업재개를 위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쿠키는 3년 이내에 일자리 44개(2017년 말까지 12개 이상)를 마련하겠노라 약속했지만, 77명인 기존직원의 수에는 한참 못 미친다. 결국 에코플라 직원들은 자신의 미래를 주도하고자 했던 꿈을 접어야만 했다. 
 
1년 전만 해도 이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2016년 12월, 그르노블 노조사무실에 500명의 인파가 몰렸다. 일자리를 사수하고, 노동자협동조합(SCOP) 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다. 이들 중에는 2010~2014년 프랄리브 노동투쟁 당시 노조대표를 지냈고, 현재 차(茶)생산기업 SCOP-TI에서 근무하는 올리비에 르베르키에도 있었다. 그는 에코플라 직원들을 향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 프랄리브의 투쟁은 1,336일간 지속됐다. SCOP 전환 프로젝트와 생산설비를 사수하기 위해 긴 시간을 서로 의지하며 투쟁을 확대해갔다. 당신들도 맞서 싸워야 한다.” 1970년대에 브장송 소재 시계회사 ‘립’을 구제하기 위해 노조원으로 활동했던 샤를 피아제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우리는 장장 4년을 투쟁했다. 헌병대에 쫓겨나는 상황 속에서도 완성된 시계, 작업대, 기계 등을 빼돌려, 이후에도 몰래 시계제작을 계속했다. 우리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에코플라도 투쟁이라는 선택지가 있었고, 이미 선례를 보여준 기업들도 있었다. 하지만 립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기욤 구르그 정치학 연구교수는 또 다른 현실을 상기시킨다. “당연히 에코플라를 지지했어야 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립 직원들도 SCOP 전환에 반대했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프랑스 공장들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길 꺼린다. 이들의 유일한 목표는 일자리를 지키고 회사를 재가동시키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자본까지 제공하라고?
 
“우리는 사장을 원한다!” 이것이 노조의 구호라니, 놀랍다. 그러나 이는 지난 수십 년간 프랑스 주요 노조들과 노동자들의 라이트모티브였다. “여전히 이 고루한 사고방식에 갇힌 채, 위기 상황에서 SCOP모델보다 사업가나 금융가를 찾는다. 마르크스주의 문화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파트릭 베르나르 CGT(노동총동맹) 금속노조 이제르 지부장의 말이다. 브누아 보리 노동자자주관리협회장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문제에 있어서 SCOP이 하나의 해결책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1)
 
SCOP회사와 노조의 공동목표는 ‘일자리 사수’지만, 이를 달성하는 방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의 계보를 잇는 프랑스 주요 노조들은 피에르 조셉 프루동의 사상과 19세기 노동자자주관리 모델에 반대하고, 이 ‘해방’을 향한 첫걸음이 하나의 정치적 형태로서 자본주의를 대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을 제공하는 이에게 자본까지 제공하라고(회사주식을 매입하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알핀 알루미니움’이 있다. 페시네 그룹의 자회사로 프랑스 남동부 안시 부근의 크랑-제브리에 코뮌에 있다. 20년 전에 테팔의 최대 납품업체로 활약했지만, 다른 자회사에 밀려 투자가 점차 줄더니 급기야 2014년 11월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적당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자, 회사 임원진과 CFDT(민주노동총동맹)는 소유주(미국 AIAC투자기금)에 맞서 서로 동맹을 맺고 SCOP모델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레그와르 하멜 현(現) 사장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며칠을 협상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자금을 조달하려면 첫해부터 수익을 내야만 했고, 근로계약을 수정하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었다. 결국 모두에게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은 수익을 내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근로시간은 주 37시간 30분에서 40시간으로 늘고, 대체휴가(RTT) 일수는 22일에서 9일로, 퇴직금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이 모든 것이 협조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임원진과 노조)에게 회사를 지속시켜야 한다는 공통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원한 건 협동조합이 아니라 일자리”
 
장-뤽 브나치오는 알핀 알루미니움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다. 작업복을 입은 그의 손이 기계 때문에 거무스름하다. CFDT 노조대표이자 SCOP 조합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은 예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서로 다른 두 역할을 겸임하는 것이 복잡할 때도 있다. 조합원이 되면 회사의 득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예전에는 사장만 상대하면 됐는데, 지금은 50밖에 없는 상황에서 100을 직원들(주주든 아니든)에게 나눠주라고 마냥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알핀 알루미니움의 경우, CFDT가 초반부터 SCOP 전환에 많은 부분을 담당했고, 브나치오도 그 선두에 있었다. 그는 이것이 사지로 내몰린 노동자들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매일 아침 동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동료들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2015년 7월, 회사가 문을 다시 열었을 때 총 직원 125명 중 절반인 65명이 함께 했다. 나머지는 미래의 수익을 분배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퇴직금을 받는 길을 택했다. 
 
한편 노조운동 전문가인 르네 무리오의 생각은 다르다.(2) “공산주의의 몰락, 실업상승, 공장폐쇄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기업의 양자택일식 정책 앞에 노조가 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일단 국유화는 현재 추세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고협상을 해버리면 그 다음은? 이 막막한 상황에서 SCOP은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프랑스 전국적으로 노조가 SCOP 전환을 요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프랑스 노조 FO(노동자의 힘)에서 ‘사회적 경제’ 부문을 담당하는 크리스토프 쿠이야르는 “사장이 운영하던 회사가 경영난에 빠졌는데, 직원들이 운영하면 상황이 금방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2013년 3월, CGT는 제50회 노조회의에서 ‘사회적 경제’가 지역연대발전, 지속가능한 인류발전, 사회혁신과 견줄 만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파브리스 앙제 CGT 연합사무소장은 “세계경제가 일자리 감소와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CGT도 회사를 직접 인수하려는 노동자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는 금융세계화가 초래한 인수합병, 구조조정, 오프쇼링, 폐업 등의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르베르키에 전 프랄리브 노조대표는 “프랄리브 투쟁 이전에 CGT는 SCOP을 멀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이 새로운 기회를 받아들였고, 우리가 이에 크게 기여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투쟁 덕분에 오늘날  전체의 시선이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노동자자주관리조직 출신인 CFDT는 SCOP모델에 찬성하는 쪽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노조들보다 SCOP 회원사가 많은 것은 아니다.(3) 회원사의 SCOP 전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티에리 라베르뉴 CFDT 사부아 부지부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회사가 실제로 존속 가능한 상태인 경우에만 SCOP 전환을 지지한다. 무조건 협동조합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CFDT의 신념과 거리가 멀다. 근로자들이 회사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꿈을 꾸게 만들면 안 된다. 이들에게 유일한 목표는 매월 말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것이다.”
 
브누아 보리 노동자자주관리협회장에 따르면, 본격적인 변화는 2010년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인수자들이 구세주를 자처하며 시프랑스(SeaFrance)와 프랄리브(Fralib)를 매입했다가 결국 회사 문을 닫게 만드는 사례를 연이어 목격했다. 그때 노조는 정부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학자 다니엘 드무스티에는 “협동조합체제를 원했던 게 아니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조투쟁을 한 것뿐인데 결국 SCOP으로 전환된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4)
 
협동조합체제 속에서의 노조의 역할은?
 
그렇다면, 수익배분에 있어서 근로자의 형평성을 중시하고, 중대한 회사방침을 결정하는데 주주인 직원들이 직접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협동조합체제 안에, 과연 노조의 자리가 있을까? 생-마르탱-데르 코뮌에 위치한 SCOP회사 ‘알마’의 조합장이자 SCOP연합회 론-알프 지부장인 로렌스 루핀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많은 부분에서 서로의 비전이 일치하기 때문에 확실히 노조의 역할이 축소되긴 한다. 그렇다고 SCOP의 기능을 미화시켜서는 안 된다.”
 
SCOP이 달성목표를 두고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 일반회사보다 투명하고 합의적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경영진이 존재하는 회사조직임에는 변함이 없다. 노조들은 회사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안다. 이는 노동자들이 갖추지 못한 지식이다. 알핀 알루미니움의 장-뤽 브나치오도 “총매출, 부가가치 등은 익숙한 용어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린다 벤셀라 CGT 이제르 지부장은 “노조가 견제세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서 그토록 기피하는 ‘자기착취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근로자에게 노동법을 가르치는 것도 노조의 역할”이라며, 그녀 역시 이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사회경제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에코플라 노조분쟁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우리가 노조로서 기술적·학구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돔 지역의 생-발리에 코뮌에 자리 잡은 ‘세랄레프’는 1921년부터 고전압·초고전압용 세라믹 절연체를 생산해온 기업이다. 2004년 1월 30일, 세랄레프를 관리하던 미국 연기금회사가 청산절차에 돌입하자, 16세부터 공장에서 일한 로베르 니케즈를 필두로 노조가 결성됐다. 현재 CGT 노조대표인 그는 말한다. “그 시대에는 전 직원이 CGT, CFDT, CGC(프랑스관리직총동맹) 노조원이었다. 공장폐쇄를 용납할 수 없던 우리는 단합했고, 투쟁했다.” 2004년 4월 14일, 세랄레프는 SCOP으로 전환했다. 2010년까지 로베르 니케즈 노조대표가 회사를 관리했지만, 그로부터 5년 후 노조원은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직원들은 노조가 사라진 게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다. 에마뉘엘도 마찬가지다. 2001년에 세랄레프에 취업한 그는 당시 CFDT 노조원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CFDT를 탈퇴했다. 
 
“세랄레프는 대가족이다. 문제가 생겨도 노조를 거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모두가 주주이며,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다.” 만약 심각한 불만사항이 발생하면, 직원들이 총회를 열어서 경영진을 해임할 수 있다.  
 
 
글·마르고 에메리시 & 클레망틴 메테니에 
Margot Hemmerich & Clémentine Méténier  
활동가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Benoît Borrits, ‘Coopératives contre capitalisme’, Syllepse, 파리, 2015년.
(2) René Mouriaux, ‘Le Syndicalisme en France depuis 1945’, La Découverte, 파리, 2013년.
(3) Jean-Michel Dumay, ‘CFDT, un syndicalisme pour l’ère Macron 마크롱 시대의 노조활동은 어디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6월.
(4) Danièle Demoustier, ‘Entre l’efficacité et la démocratie. Les coopératives de production’, Entente, 파리,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