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를 선사하는 악덕

2017-11-30     다니-로베르 뒤푸르 | 철학자

약 100년 전, 독일 출신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발표된 이후 자본주의는 금욕주의적, 엄숙주의적, 권위주의적이며 청교도적이고 검소한 것처럼 인식돼왔다. 그러나 영국의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쓴 <꿀벌의 우화>를 읽으면, 그러한 인식이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였음을 알 수 있다.


버나드 맨더빌이 쓴 <꿀벌의 우화>는 처음에는 1705년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이라는 제목의 풍자시로 발표됐다. 이 글에서는 풍요로운 한 벌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벌집 안에서는 모든 직업들이, 그리고 각종 악덕 역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그런 번영의 원천 자체도 이 벌집의 벌들 모두가 각각 어느 정도는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벌들이 문득 죄의식에 사로잡혀 정직해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자 그 즉시 남의 불행을 이용해왔던 (수많은) 경제 활동들이 사라지고 말았고, 결국은 벌집 전체가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의 변혁에 기여한 악덕, 자본주의

이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는 간결하다. 국민 모두의 행복을 이루려면 정직을 버리고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맨더빌은 스스로 “일종의 형편없는 운율로 적힌 단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던 이 풍자시를 이후 24년간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수십 편의 글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몇 권에 걸친 책 <꿀벌의 우화-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을 발표했고, 이것이 당대의 철학자 볼테르의 관심을 끈 덕분에 이내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되기도 했다.(1) 맨더빌이 1705년에 발표했던 첫 번째 글에서부터 의도적이고 명백하게 “악덕”이라고 지칭했던 그런 원칙들은, 이후 1차 산업혁명을 맞으며 완전히 새로운 어떤 정신을 통해 이 세상의 변혁에 기여하게 된다. 그 새로운 정신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경우, 18세기의 사회 발전은 마틴 루터와 장 칼뱅의 교에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적 에토스(윤리성)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직업 활동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세속적인 삶과 노동의 의미가 되살아났고, 이전에는 성직자나 사제로서의 삶만이 영적으로 존엄한 사명이라고 여겨졌었지만 이제는 각종 직무(수공업, 상업, 기술업 등) 역시 존엄성을 인정받게 됐다.

이후 칼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에 뿌리를 둔 예정설을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직업관을 한층 더 확립했고, 이는 곧 프로테스탄트 세계로 널리 퍼져갔다. 칼뱅의 예정설에서는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은 신에 의해 예정돼 있으며, 이 결정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바꿀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결국 현세에서 경제적 성공과 같은 징표를 통해 구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없다면, 예정설은 순전한 불안의 근원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새로운 삶의 원칙이 등장했다. 부를 축적하되(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이므로), 즐기지는 않아야 한다(청교도주의의 특징이므로)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재산의 원천이기도 한 상품의 생산 행위를 발전시키는 데에 매달리게 됐고, 이는 도구(복식부기 발명, 기술 및 지식의 최대 활용을 위한 과학연구 등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을 보장하는 모든 것)의 합리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베버는 바로 이 합리화가 사회 전체로 차츰 퍼져나갔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버는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이어진 프로테스탄트 내 종파들(칼뱅주의, 경건주의, 감리파, 침례파)에 대해 면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연구 내용에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아 오히려 주목받는 이름이 하나 있다. 당대의 유명작가이자 역시 칼뱅주의를 내세우며 부의 형성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 바로 버나드 맨더빌이다. 베버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본주의의 출발은 신성한 것이었다고 믿기 원했지만, 그 역시도 죽음을 목전에 둔 1920년에 이르러서는 맨더빌을 언급했다. 실제로 베버는 그 시기에 자본주의가 추잡한 형태로 자리 잡았으며,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삶의 그 어떤 측면도 허용하지 않는 “철로 된 우리(Iron cage)”가 됐다고 보기도 했다.

도둑질은 기부만큼 선한 결과를 낳는다?

1761년 처음 독일어로 번역된 후, 베버의 시대에 재번역된 바 있는 맨더빌의 글에서는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원천이 미덕이 아닌 악덕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맨더빌은 악덕이 곧바로 부와 힘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악함에도 불구하고 미덕을 생산하는 만큼, 악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주요한 원동력이라고 봤다. <꿀벌의 우화> 속 핵심 문장인 “개인의 악덕이 공공의 미덕을 가져온다”는 주장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개인의 악덕이 대대로 내려오는 미담 속의 도덕적 속박을 깨뜨려줄 뿐 아니라(맨더빌의 본래 직업은 ‘영혼의 의사’,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심리치료사’였다) 욕구를 해방해 사회의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넘치는 풍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는 결핍의 상태에서 풍요의 상태로의 변화를 약속해준다. 또한 맨더빌은 전쟁, 절도, 매춘, 음란, 술, 마약, 맹목적인 이익 추구, 공해(현대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사치 등이 사실은 공익에 기여한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펼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악덕들이 시민 사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일례로 <꿀벌의 우화>에서 이야기하는 도둑질의 경우를 살펴보자. 맨더빌은 도둑질에 대해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백만 명이 노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노동을 소비하기 위해 고용된 또 다른 백만 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일은 금방 끝이 나고 말 것이다. 10만 파운드를 가졌지만 1년에 50파운드도 쓰는 법이 없는 늙은 구두쇠가 만약 금화 1천 기니를 도둑맞는다면, 이 도둑맞은 돈은 분명 곧 시장에서 유통될 것이며 결국 나라는 이 도둑질 덕분에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독실한 대주교가 똑같은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을 때 얻을 만한 규모의 이득을 보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추론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도둑이 없다면, 대학 건물을 지을 건축가가, 법학 대학이, 법대 교수가, 변호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사회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모든 근본적 활동들이 필연적으로 바로 이 도둑에게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대에 맨더빌이 어째서 ‘맨-데빌(Man-devil, 인간악마)’로 불렸는지, 그의 책이 왜 영국에서 규제대상이 되고, 교회에서 금서로 지정됐으며, 프랑스에서는 광장 한복판에서 화형당했는지 납득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많은 대기업들은 바로 이 논리를 따르고 있다. 지배적 지위 남용, 덤핑, 강매, 내부자거래, 투기, 경쟁업체 흡수 및 분할 합병, 분식회계, 회계조작, 탈세, 절세, 공금횡령, 시장조작, 부패, 불법 수수료, 부당이득, 감시, 스파이, 협박, 밀고, 노동법 위반 등은 물론 공중보건을 해치는 요소에 대한 데이터 조작에 이르기까지, 법을 ‘우회’하는 이런 행위들은 맨더빌의 주장을 완벽할 정도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미덕’, 즉 흘러넘치는 재산을 만들어내는 악덕들이므로 주저할 것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의도가 악해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 결과주의

맨더빌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 논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그야말로 서구 형이상학의 전환점 역할을 했다. 그는 천상의 나라에 인간들의 나라를 맞춰야 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목표―지상에서 길을 잃은 몇몇 성인들에게나 의미 있게 여겨질 법한 목표―를 버리고, 성인들보다 훨씬 악한 ‘보통사람들’이 의미 있게 여길 만한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사실 지극히 선한 신은 이미 모든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선례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가 인간의 악덕으로부터, 심지어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된 만큼, 인간들은 더 이상 자신의 파렴치함에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럼없이 그렇게 살아야 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체계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아온 애덤 스미스(1723~1790)도 맨더빌의 원칙들을 내세우긴 했지만, 위험하고 선정적인 측면을 ‘벗겨’내고 보다 중립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국부론>에서도 ‘악덕’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이를 ‘자기애(Self-love)’라는 중립적인 용어로 대체했다. 또한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의 이기심을 조율하는 신의 섭리가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해 개인의 안녕을 염려하는 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시장에서 작동하는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아버지이기도 한 애덤 스미스에게서조차, “자신의 쾌락을 위해 가능한 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낭비하는 자가 돼라. 이는 국가의 풍요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기 때문이다”라는, 새로운 윤리를 극단적으로 주장했던 맨더빌의 노골적인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악덕과 미덕이 뒤바뀐 이런 궤변은 새로운 종교, 즉 각자가 철저히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때 신의 목표가 이뤄진다고 보는 영국의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제러미 벤담에서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공리주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행위든 결과만이 중요하고, 그것의 본래 선한 의도를 지닌 것이었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함께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이처럼 행위의 결과만을 유일한 규범적 기준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윤리가 등장했다. 원인을 의도적으로 잊고 예측되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흐름으로 인해, 1950년대 말부터는 ‘결과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어떤 행위를 시작할 때 그 명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됐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공리주의에서의 행복이란 개인의 악덕(부드럽게 표현하면 ‘개인의 행복’)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로 규정된다. 

빈자가 부자를 희생하는 것이 ‘도덕’

그런데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실상 실제적인 계산은 희생 논리의 전개로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맨더빌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고 애쓰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심지어 그는 이 ‘도덕’을 기준 삼아 사창가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가난한 여성들은 돈을 낼 수 있는 남자들의 쾌락을 충족시키고, 난폭한 정욕으로부터 부르주아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논법은 자유주의적 인간론의 핵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베버에 의해 시작된 1920년 이후의 맨더빌 가리기는 다음 세대에서도 계속됐다. 프랑스에서도 1960년대 베버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프랑스어판은 1964년 최초 출간) 위대한 비평사상가들의 경우 맨더빌을 문자 그대로 ‘무시’했다.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등이 짤막하게 한두 번 언급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들은 이 악한 밑그림이, 그 위를 덮은 청교도적 덧칠을 뚫고 나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벌집의 여왕벌로는 누가 있을까. 많은 이들 중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벌의 몸통처럼 노란 머리카락을 뽐내며 거짓말, 속임수, 불인정, 끊임없는 이윤 추구, 자연파괴, 저급한 비방 등을 기본 행동지침으로 삼은 채, 세계라는 벌집위에 군림하려 들고 있으니 말이다.(2) 이제 맨더빌의 사상에 제자리를 돌려주고 베버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면서, 향락적이고 쾌락적인 정신, 그 유명한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란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정신이 무려 1차 산업혁명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본래 계획으로 언급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글·다니-로베르 뒤푸르 Dany-Robert Dufour
철학자. 저서로 <자유주의 이후의 개인(L’individu qui vient après le libéralisme)>, <서양의 망상(Le Délire occidental)> 등이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등이 있다.

(1) 처음 발표됐던 풍자시는 8음절 시구 433행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후 1714년에는 이 풍자시에 대한 주석과 함께 <꿀벌의 우화> 초판이 발표됐고, 1723년에는 여기에 다른 내용을 더 추가해 두 번째 판이 발표됐다. 프랑스어로는 1740년부터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2017년에 이르러 이렇게 번역됐던 맨더빌의 글 다섯 편의 개정 번역판이 포켓(Pocket) 출판사의 아고라(Agora) 컬렉션 중 하나로 출간되기도 했다.
(2) Jean Baret, ‘Donald Trump est la Reine des abeilles(도널드 트럼프는 여왕벌이다)’, Contrepoing, 2017/09/02. www.contrepoing.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