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좌파에 ‘오염’된 벨기에 발롱지역
2017-11-30 세바스티앵 지야르 | 기자
불과 10년 전만 해도 소수 정당에 지나지 않았던 벨기에 노동당.
이제 발롱 지역 제1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붉은 연기로 가득한 어두운 배경에서 위협적인 형체를 지닌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르비프/렉스프레스(Le vif/L'Express) 주간지는 2017년 3월 31일 자의 이 같은 표지에서 “당신도 극좌파에 오염됐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벨기에 주간지는 또한 ‘오염도’를 측정하기 위한 테스트를 제안한다. 임신중절 권리, 성소수자 인권 보호, 사회적 불평등 해소 등을 옹호하는 독자들은 극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 더욱이 발론과 플랑드르 지방에서, 통합정당이라 할 수 있는(플랑드르에서는 Partij van de Aardbij, PVDA 라 불리는) 벨기에 노동당(PTB)의 ‘단순한, 더 나아가 단순화된’ 주장에 현혹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 정당은 1979년 창당돼 총선에서는 늘 비밀에 부쳤던 지지율(1% 미만)로 표를 얻어왔다. 그러나 2014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판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벨기에 노동당이 전국 득표율 3.7%, 발롱지역 득표율 5.5%를 기록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는 이 정당에 한층 밝은 미래를 보여줬다. 2017년 7월 일간지 <레코 (L'echo)>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벨기에 노동당은 발론 지방에서 25%에 가까운 지지도를 얻음으로써 제 1정당으로 자리매김 하며, 샤를르 미셸 총리가 이끄는 혁명운동(Movement Reformateur, MR)과 점점 몰락하는 사회당을 앞섰다. 그 후 벨기에 정계는 일대 혼란에 잠겼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정책의 설계
벨기에 노동당의 지지도 상승에 대해 이해하려면, 전략적 전환점이 있었던 2008년 8차 전당대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노동당 청년위원회 코막(Comac) 위원장인 샬리 르페주는 그 때를 떠올렸다. “우리는 자문했다. ‘우리는 노동당이고, 노동자를 대표하며,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노동자 해방을 원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경각심을 주며, 호소력 있는 주장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의 사상에 원천적으로 충실한 한편, 마오쩌둥,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재사상은 버리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을 설계해갔다. 부자세 신설, 최소 연금 1만5천 유로 보장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또한 ‘노동계급’을 ‘사람’이라고 칭하는 등 자신들의 정치적 언어를 수정했다. 예를 들면, 2004년 정당 슬로건인 <경제적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치학자 파스칼 델윗과 지울리아 산드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소위 ‘급진 민중주의에 바탕을 둔 스탈린적 신념’(1)의 포기를 발견했다. 즉, 벨기에 노동당의 지도부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주장에서 민중주의적 좌파와 거리를 뒀다는 것이다. 하지만 벨기에 노동당 대표 페테르 마르텐스의 표현에 의하면,(2) 여전히 계급투쟁의 개념에 최우선권을 둔 ‘사회주의 2.0’을 세우는 것이다. 르페주는 설명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현 상황에 적합한, 계급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정당 이념을 원했다. 단지 19세기의 수사학적인 주장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 게 아닌, 그런 이념을 말이다.”
급진적인 사상에 기울어져 있고, 기존 사회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당대회에서 이 전략을 세웠고, 이제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다. 2008년과 2016년 사이 노동당 회원의 수가 2,500명에서 1만 명으로 4배가 됐다. 2014년에는 라울 에드부 노동당 대변인을 비롯, 세금도피와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전직 재경부 관료인 마르코 반 히스 등 노동당 출신의원들이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국회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둔다. 더불어 발론 지방 의회에 2명, 브뤼셀에 4명의 노동당 출신 지역의원이 선출된다. 주먹을 꼭 쥔 손을 들어올리며 3개 언어로 선서함으로써 국민통합에의 의지를 보여줬다. 노동당 출신 의원들은 국회에 진출함과 동시에 스스로 엄격한 원칙을 적용했다. 즉 당선 의원들은 월 급여 중 1500~1800유로로 생활해야 하며, 나머지는 정당에 헌납해야 한다. 에드부 대변인은 2017년 5월 1일 리에주에서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요약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최근 지방의원들, 특히 사회당 출신의 지방의원들이 거액 횡령혐의로 기소되는 등 일련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얻었다.
좌파 재집권을 위한 견제세력이 되는 것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감은 오래된 실업자들의 연금 감축을 시도한 바클렌느(Bacquelaine) 법안, 초과노동시간제‧유연근무제등의 완화를 위한 피테르스(Peeters) 법안 등을 내놓은 반(反)노동 정치인들을 지속적으로 비난해온 노동당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노동당은 이런 법안에 반대하는 사회적 움직임의 선봉장에 서게 됐다. 파업현장의 피켓에 자주 등장하며 노동당 당원들은 2014년, 2015년 있었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거 참여한다. 이처럼 적극적인 참여로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사회당과 가까웠던 벨기에 노동총연맹(150만 노조원) 등 노조들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2014년 선거 당시, 벨기에 노동총연맹의 샤를르루와 지부는 중앙 지도부의 경고에도 불구 노동당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2017년에는 결과적으로 무산됐지만 6월 총회에 사회당 지도부를 초대하지 않을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3)
플랑드르 지역에서 벨기에 노동당의 입지는 발롱 지역에서 만큼 공고하지는 않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플랑드르 국민당 니유블람스(Nieuw-Vlaamse Alliantie, N-VA)의 대표 바르트 드 베버는 환영한다. 우파 성향이 강해 자유주의자와 국가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큰 플랑드르 지역과 노동당, 사회당,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에 표를 주는 좌파성향이 강한 발롱지역이 대립각을 형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분열이 정치로 이어진 형국이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 문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2017년 3월 아인아우트(Hainaut) 지역의 제르멩 뮈주망강고 의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라울 에드부(4)의 대변인에 지명된다. 당의 얼굴을 다양화 하고자 하는 취지를 넘어 이런 조치는 플랑드르 지역에서 선거 캠페인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를 대변인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했다. 불어와 네덜란드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에드부는 두 언어권의 화합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가 연설하는 동영상은 각종 SNS에서 수없이 재생됐고 북쪽 지역에서 인지도를 높여 주어, 불어권 지역 인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TV프로그램 <De slimste mens ter wereld(최고의 지식인)>, 즉 플랑드르 국민당 니유블람스의 대표인 드 베버의 인기도를 끌어올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9년 있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히나 국가주의자들과 대립해야 하는 앙베르 등 플랑드르 지방에서 의원을 당선시키려 하더라도, 노동당은 선거를 최우선 과제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10년, 어쩌면 15년 안에도 집권당은 되지 못할 것이다.”
에드부는 2016년 5월 21일 불어권 지역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소속한 정당에 대해 이렇게 전망했다. 이에, 각종 매체와 사회당 지도부는 그의 무책임함과 통치력 부재 등을 들어 그에게 표를 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부는 좌파 재집권을 위해 견제세력이 돼야 함을 강조하며, 노동당은 사회당이나 환경당이 했듯 유럽연합의 긴축안을 지지하는 그 어떤 세력과도 야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치 가능성이 있는 정치세력을 향해, 다비드 페스티오 부대표는 이렇게 호소한다. “견제세력이 없다면 선거에서 30%를 얻고, 결국 그 결과를 가능케 한 정책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정치를 원한다면, 유럽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탄탄한 지지층 구축
선거일정을 의식한 점도 있지만, 벨기에 노동당은 벨기에 국민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 ‘사상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런 표현은 당의 이론적 주장에 자주 등장한다.(5) 우선 강력한 사회운동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당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시간투자를 독려한다. 지난 9월에는 마니피에스타(ManiFiesta), 즉 프랑스의 ‘인권축제’ 모델을 따라, 콘서트, 강연, 토론 등을 혼합한 행사를 주최했다. 코막(당 청년위원회)과 함께 노동당은 매우 활동적인 청년지지자 연합을 만들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방학 등을 활용해 코막은 250여 명의 대학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고, 정치적인 사상과 친해질 수 있도록, ‘공공 시험준비(Bloque) 구역’(6)을 제안했다. 또한 노동당 청년 당원들은 해마다 ‘칼 마르크스 학교‘를 열어, 200~300명의 참가자를 모았다. 2017년 프로그램에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초보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강의’, ‘노동계층의 역사’, ‘유럽지역 노동의 미래’, ‘팔레스타인, 마지막 식민지인가?’, ‘초보자를 위한 CETA란 무엇인가’ 등이 준비됐다.
급진 좌파의 지적인 무게감을 더하기 위해 대학생 신분의 청년 당원 혹은 노동당 지지자들은 2017년 사회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담은 잡지 <라바(Lava)>를 2개 언어로 출간했다. 이 잡지는 미국의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영국의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그리고 미국의 신생 잡지 <쟈코벵 (Jacobin)> 등에서 영감을 받아 창간됐다. 특히 <쟈코벵>에서는 그래픽적 요소 뿐 아니라, 비벡 치버, 월터 벤 마이클스(7) 등 사회학자들의 글을 그대로 가져와 게재했다. “권력기관은 현재의 세상이 마치 유일하게 가능한 세상인 것처럼, 끊임없이 문화적 투쟁을 이어간다. 사상투쟁은 추상적 투쟁이 아니다. 만약 좌파가 억압적인 사상의 굴레를 부수고 싶다면 대항마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상투쟁은 다른 세상을 찾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라바(Lava)>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다니엘 자모라는 이렇게 설명했다.(8)
2017년 3월 29일 RTBF (불어권 지역 라디오TV 방송국) 기자는 노동당 지역 의회 의장이자 에드부 후임에 임명된 뮈주망강고 대변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변인께서는 벨기에 노동당 그리고 좌파정당들과 더불어 거품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당은 정치적 거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긍정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반드시 선거에서의 승리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당의 지지도 상승에 따른 결과는 벨기에 정치판도에서 이제 가시화되고 있다. 2015년 사회당 의원 아메드 라우에는 부자 상속세 부과 법안을 상정했다. 2016년 10월 국회회기 시작과 더불어 사회당은 ‘급여 감축 없는 주4일 노동’과 기업의 노사공동 결정원칙 등을 정당계획안에 추가했다. 1988년부터 2014년까지, 26년 간 연방국회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정을 고려하지 않았던 법안이라 할 것이다.
글·세바스티앵 지야르 Sébastien Gillard
기자
번역·유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파스칼 델윗(Pascal Delwit)과 길리아 산드리(Giulia Sandri)의 <좌파의 왼쪽>, 파스칼 델윗, 장브누아 필레(Jean-Benoit Pilet), 에밀 반 오트(Emile van Haute)공저 ‘벨기에 정당(Les Partis politiques en Belgique)’ 중. 브뤼셀 대학, 2011년.
(2) ‘인간과 자연을 위한 사회주의 2.0(Le socialisme 2.0. aux dimensions de l'homme et de la nature)’. 페테르 메르텐스 (Peter Mertens)의 ‘어떻게 감히?(Comment osent-ils?)’중에서. Aden, 브뤼셀, 2012년.
(3) 베르나르 드몬티(Bernard Demonty), ‘FGTB는 벨기에 노동당을 초대하지 않을 것이다(La FGTB n'invitera pas le PTB)’, Le Soir, 브뤼셀, 2017년 6월 7일.
(4) 라울 에드부(Raoul Hedebouw), ‘자유 벨기에(La Libre Belgique)’ 참조. 브뤼셀, 2016년 12월 23일.
(5) ‘필연적 사상투쟁(La nécessaire bataille des idées)' 파일 중 발췌. ‘마르크스주의 연구’ n°111, Bruxelles, 2016년 11~12월.
(6) 벨기에에서 ‘Bloque'는 시험준비를 위한 수업을 의미한다.
(7) 비벡 치버(Vivek Chibber), ‘좌파의 빛 바랜 보편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4년 5월호. Walter Benn Michaels, ‘Liberté, fraternité,...diversit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2월호.
(8) Gaston van Dyck, ‘라바, 사상투쟁의 새로운 무기(Lava, un nouvel outil dans la bataille des idées)’, 2017년 6월 9일. www.slidair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