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의 미학 또는 정치성

2017-12-01     에블린 피에예 | 번역가 겸 작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예술코드들과 단절했다. 특히 레닌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예술가들은 혁명을 전파하려고 애썼고, 혁명은 새로운 미학의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베를린 다다이즘의 열성적인 멤버, 게오르게 그로스와 존 하트필드는 “예술가라는 타이틀은 모욕이다. ‘예술’이란 용어가 인간의 평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라고 용감하게 단언했다.(1) 그렇지만 그들은 예술가다. 서른이 채 되지 않아 전쟁을 겪었고, 내셔널리즘에 대한 반감으로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꿀 만큼 전쟁을 혐오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고 스파르타쿠스 봉기(독일 공산당을 창당한 스파르타쿠스단이 주도한 혁명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제국에 반대하는 혁명-역주)가 살인적으로 진압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로스와 하트필드는 베를린 다다이즘의 13가지 조항, 특히 급진적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세계의 지성인과 창작자 간의 혁명적 국제동맹을 권장하는 조항을 칭찬했다.(2)

이는 단순히 공허한 말이 아니라 불타오르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1917년 이후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 헝가리까지 유럽을 뒤흔든 반란의 파도 속에서, 현실 정치에 가담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몇 해 동안 열광적으로 이 정치적 앙가주망에 필요한 미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 상징주의 등은 전쟁 이전의 부르주아 예술코드들과 단절했고, 이제는 이런 단절 속에서 예술과정 자체의 의미를 정의 내려야 할 필요가 생겼다. 예술가들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다가올 혁명에 견주어 인류를 미화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공헌하고, 도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10월 혁명 이후 가장 혁신적인 러시아 예술가들은 권력자들과의 긴장 속에서 때로는 격렬한 논박을 일으키며 10여 년 간 참신하고 창의적인 활동을 벌였다. 정치적 투쟁 속에 아방가르드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리듬과 방식대로 진전을 이뤘다. 

실용적이어야 한다, 대의를 위해야 한다

아방가르드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쓸모 있는 예술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적용은 무엇보다 대의를 위해서 쓰이는 것, 즉 선동이다. 공장 벽이나 트램 광고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에 넘쳐대는 포스터는 슬로건, 설명, 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블라디미르 마이코프스키는 ‘Rosta windows(선동 포스터)’에 참여했다. 가로, 세로 각각 3m 규모의 이 포스터들은 최신소식들을 선전했다. 1923년 잡지 <LEF(예술의 좌파):모든 예술 노동자의 자유동맹>을 창간한 마이코프스키는 경제적 구축이나 관료에 대한 투쟁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보건캠페인 슬로건을 돋보이게 만들거나 소련산 고무젖꼭지의 장점을 칭찬했다. “LEF인들은 포스터, 삽화, 선전, 포토몽타주, 시네몽타주 즉 대중적인 실현 수단으로 쓰이는 구상, 즉 공리주의 예술의 형태를 받아들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3) 러시아 이외 국가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조형예술가 알렉산더 로드첸코, 화가 마르크 샤갈, 연출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는 대규모 시민 축제 행사의 집행과 논평에 참여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기여 외에도,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또 다른 임무가 예술가들에게 부여됐다. 대중들에게 예술의 실행, 규칙, 역사를 알려주는 직업인이라는 임무다. 작가들은 수업을 가르치고(안드레이 벨리), 고전을 출판하고(알렉산드르 블로크), 특히 조형 예술가는 1920년도에 세워진 vkhoutmas 즉 상급 예술·기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추상화의 선구자인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제안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5년간의 학업과정은 국가에 필요한 예술가와 기술자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같은 기세로 주로 아마추어로 구성된 정치선동 연극단에서는 메이예르홀트, 마이아코프스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전함 포템킨'(1925)을 촬영했다.(4) 

 놀랍게도 예술가들이 '대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예술적인 작업을 축소시키지는 않았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스스로 헌신하며 사회적 변화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완수할 방법을 찾았다. 대담하고 꾸밈없는 스타일의 선동 포스터가 보여주듯, 실험적인 예술과 대중예술의 능력이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인보다 뛰어난 집단의 능력과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이 미적능력을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브세볼로드 푸도프킨(영화 <어머니>)의 영화에서는 이와 관련한 몽타주기법이 모범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예술이 (대중의) 사회적 요구를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한다면 예술의 본질이 바뀌는 게 아닐까? 예술가들은 전문 기술자로 바뀌어야만 할까? vkhoutmas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알렉산더 로드첸코, 블라드미르 타틀린,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구축주의 운동(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전위적인 추상미술 운동으로, 가장 극단적인 반(反)사실주의로서 자연의 묘사 또는 인상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주로 기계적 또는 기하학적 형태의 합리적, 합목적 구성에 따라 새로운 형식의 미를 창조, 표현하려고 했다-역주)의 당사자였다. 입체주의, 미래주의를 잇는 이 운동은 기하학적인 요소를 수단으로 비구상파 예술을 만들었다. 구축주의는 상반되는 여러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건축, 디자인, 활판 인쇄에서 꽃을 피우는 실용예술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형식을 우선시하는 경향이었다. 미술학교에서는 실용적인 물품의 생산과 관련된 기술과 소재에 대한 공부를 우선시했고, 따라서 vkhoutmas는 어디까지나 공장의 요구를 우선시했다. 구축주의자들의 상당수는 시대적 변화를 수용했으나, 추상화의 기수인 칸딘스키 같은 이들은 떠났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한 시인의 일기>에서 민중의 대변인이 될 수밖에 없는 당시 예술가들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내 나라가 있다/나는 말로만 떠드는 수다쟁이/나의 시 속에서 대중들에게 친구가 되라고 외친다/여기, 나의 시는 누가 보아도 별로다/내게도 마찬가지다.’(5) 그는 1925년 타살인지 자살인지 이론이 분분한 상황 속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감내한 현실의 모순과의 투쟁은 고통스러웠다. 말라코프스키는 1930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굽힘 없이 당의 소수파로 남은 채 혁명에 동참했고, 자신의 작품들 중 이해받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에도 계속 글을 썼다. 그는 그가 주역인 영웅적인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의 마지막 편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 동지는 예술가 동지들의 창조의 자유를 더 이상 환영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년)의 초기에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활동했다. 그들은 투쟁적인 예술의 효용성과 유용성이라는 같은 질문에 맞닥뜨렸다.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다다이스트이자 공산주의자로서 정치적 선동과 선전에 잘 훈련된 연출가였다. 그의 천재적인 후계자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데올로기적 해방의 공간처럼 간주되는 프롤레타리아 극단에서 일했다. 필요에 따라 그가 복싱 경기나 카바레의 촌극을 상연한 무대는 계층 간의 충돌을 구체화하는 데 적합하도록 공간을 나란히 분리했다. 그로스나 오토 딕스 같은 조형예술가들은 지배자의 압제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실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추함, 과장, 왜곡의 미학을 실천했다.(6)

하트필드는 포토몽타주라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냈다. 유력한 권력을 전복시키기 위해 그토록 다양한 형식을 창조했다. 1919년에 발돋움한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했고, 그에게 바우하우스는 vkhoutmas의 연장선상이었다. 교육기관인 바우하우스는 기능주의적인 양식을 위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조형 예술, 공예, 산업을 총합한 방식으로 주거와 건축분야에서 일하면서 더 나은 사회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생산하고 구상하기를 제안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전문적인 직업인이 됐고, 구축주의는 경제적인 정당성을 얻었으며 동시에 바우하우스에서 정제된 미학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아방가르드는 점차 ‘정치적 궤도’에서 벗어났다.(7)  

프랑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아방가르드파는 1924년에 나타난 초현실주의다(초현실주의는 1924년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계기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1929년에 창간된 잡지의 타이틀 <초현실주의 혁명>이 보여주듯 초현실주의적 정신 또한 혁명을 위한 것이었다.(8) 각자의 능력 안에서 기계적인 문체, 꿈의 이야기, 세련된 유물 등과 같은 도구를 쓰고자 하는 의지와 시적인 표현을 사회화시키려는 의지는 로트레아몽의 표현을 빌리면 ‘한 사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시를 정확히 실현하기 위하여 그 자체가 무질서와 전복의 도발이었다. 

이 ‘불타올랐던 여러 해(9)’동안 반란에서 혁명으로 거쳐 간 예술가들은 선구자이며 영웅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투쟁을 두 가지 전선으로 이끌었다. 고립된 작은 개인 안에서 자신을 유폐시킨 한계를 없애는 예술의 해방, 그리고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이다. 그들이 모순을 겪을수록 그들이 창조해낸 매력적이고, 날카로운 형식들은 항상 질문과 탐험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가 겸 작가

번역·김영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공역서로는 <22세기 세계>가 있다. 



(1) <예술의 하층계급>, 귄터 앤더스, 게오르게 그로스, 존 하트필드, 빌란트 헤르츠펠데, ‘예술이 위험하다’, Allia, 파리, 2012년.
(2) 루이 야노베, '초현실주의 혁명', Klincksieck, 파리, 2016년(1번째 판본: 1989년).
(3) 인용, 세르주 포셰루,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문화, 1905-1930’, Flammarion, 파리, 2010년.
(4) Cf. 클로드 프리우, <레닌, 마야콥스키, 프로레트쿨트와 문화 혁명>, '문학Littérature', n˚24, 파리, 1976년, 그리고 드니 바블레(sous la dir. de), '정치 선동 연극 : 1917년부터 1932년까지‘, L'Âge d'homme, 로잔, 3권, 1977년-1978년.
(5) 세르게이 예세닌, ‘한 시인의 일기’, La Différence, 파리, 2004년.
(6) 예술이 위험하다. 전게서.
(7) 베아트리스 주와유 프뤼넬, ‘예술의 아방가르드. 국제적인 역사’, Gallimard, coll. <Folio>, 파리, 2권, 2015년과 2017년
(8) Cf. 루이 야노베. 전게서.
(9) Cf. 존 하트필드에 대한 루이 아라곤, 1935년 5월 2일, 아라곤, ‘콜라주들’, Hermann, 파리, 1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