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못’, 연민을 넘어 재현의 윤리로
영화 <작은 연못>은 ‘노근리 사건’을 닮았다. 이는 단지 <작은 연못>이 노근리 사건을 영화화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은 연못>이 완성된 것은 2006년이었다. 그러니까 <작은 연못>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4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20세기 최대의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사건’은 2001년 <AP통신>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1950년 7월 노근리 철교와 터널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그들 존재가 역사의 일부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50년이었다. 50년을 기다린 노근리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4년을 또 참고 기다려야 했던 <작은 연못>이 말하려는 것은 단 하나다. 당신은 노근리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보편적 정서 대신 사건의 개별성으로
<작은 연못>은 ‘기억하기’를 위한 영화다. 미군의 총격을 피해 터널에 숨어든 한 마을 사람은 자신의 아들을 탈출시키며, 꼭 살아서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달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상우 감독은 그것이 산 자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다. 즉,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임을 말이다. 연우무대, 차이무 등의 극단을 이끌며 한국 연극계를 대표한 이상우 감독이 영화라는 생소한 영역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는 ‘기억의 매개’로서 기능할 수 있는 영화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더 광범위한 대중이 기억하게 하는 것과 진실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을 조화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는 대부분 양자택일의 관계에 선다. 물론 영화 제작시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로 배제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다. 하지만 이상우 감독은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한다. 그의 말마따나 <작은 연못>은 “거짓말하지 않는 영화, 카메라 장난을 치지 않는 영화, 그냥 정직하게 찍어서 정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영화”로 완성됐다.
영화에서 ‘촬영’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슛’(Shoot)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총을 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Shoot’(촬영)은 어떤 대상을 이미지로 기록하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대상을 총으로 쏴 죽이는 행위인 셈이다. 역사의 비극을 영화화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Shoot’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 고스란히 각인된다. 즉, 역사를 이미지로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역사에 대한 망각과 탈각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보편적 위험이지만, 역사라는 실재 사건을 다루는 역사영화의 경우 이러한 딜레마에 더 강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역사영화에서 이러한 위험이 노골화되는 경우가 역사적 사건의 개별성을 지워버리고 ‘연민’이라는 보편적 감정으로 그 고통과 슬픔을 치환하려 할 때이다. 보편적 연민의 감정으로 환원된 그들의 죽음은 충분히 슬플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진실한, 그리고 정직한 애도인지는 의문스럽다. <웰컴 투 동막골>이나 <화려한 휴가>를 보며 불편했던 것은, 이 영화들이 강요하는 슬픔의 정서가 역사적 사건의 개별성을 탈각시킨 대가로 얻어진 것이지 않나,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수전 손태그의 지적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돼 있지 않다고 느낀다. 연민은 우리의 무고함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연민의 뻔뻔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눈물을 대신할 윤리적 질문에 대한 고민이다. 이상우 감독의 첫 영화가 보편적 서사의 틀 속에 갇히는 것도, 희생자의 죽음이 이미지로 소비되거나 몇 방울의 눈물로 치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은 연못>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개별적 사건에 대한 관객의 윤리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이상우 감독은 그들의 죽임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 고스란히 돌출시킨다. 노근리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갔다. 관객 역시 그것이 미군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 외에 그 죽음의 이유를 정확하게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이든 관객이든 죽음을 느닷없이 경험하는 것은 동일하다. 물론 이 부조리한 사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몫은 당연히 관객의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하는 자들의 부조리한 비극, 바로 그것이 이상우 감독이, 그리고 <작은 연못>이 보여주려는 노근리 사건의 개별성이다.
망각의 죄 앞에서 질문하기
<작은 연못>은 흥미로운 연출로 노근리 마을을 소개한다. 마을로 들어서는 산길 중턱에는 평상 하나가 놓였고, 마을 어르신들은 그곳에 앉아 바둑을 두며 점심나절을 보낸다. 그곳은 마을로 드나들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인데, 노근리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은 그곳을 오가는 모습 속에 드러난다. 영화는 평상을 중심에 놓고 그를 오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노름을 좋아하는 민씨가 그와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짐을 싸 떠나려는 처와 옥신각신하는 모습에서부터, 마을 지주인 문씨, 개비네, 꾸리네, 자야네 등을 하나씩 소개한다. 이 장면은 카메라가 개입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특별히 두드러지게 하지 않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서 솟아나는 삶의 활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미덕이 있다. 특정한 주인공을 두지 않은 탓에,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대상을 나눠 찍을 이유가 없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아 그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장면 연출은 연극에 통달한 연출자가, 그 못지않게 앙상블 연기에 능통한 배우와 함께 작업할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연못>은 ‘집단의 삶’을 ‘집단의 창작’으로 그려내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이상우 감독이 연출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는 것처럼, 기라성 같은 배우 중 그 누구를 내세우기보다는, 마치 다림질이라도 해놓은 양 배우 하나하나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룬다. (어쩌면 그것이 이상우 감독의 민중관이 아닐까?) 이때 배우들은 자신이 화면 중심에 있든 주변부에 있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대사가 있든 없든 간에 최선을 다한 연기로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실제로 <작은 연못>이 화제를 모았던 것은 이상우라는 걸출한 연극 연출자의 영화 데뷔작인 것도 있지만, 송강호·문성근·김뢰하·이대연·강신일·박광정·문소리 등 화려한 출연진 덕분이었을 것이다(이들 중 대부분은 노무 출자와 현물 투자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이상우 감독과 배우들의 완벽한 호흡이 빛을 발하는 것은 철길 총격 장면이다. 마을 사람들은 길을 떠난다. 미군에 의해 길을 떠난 마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미군에 의해 길이 막힌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멈췄다 다시 길을 찾아나서고,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철길이다. 그들은 미군이 자신들을 위해 ‘도라꾸’(트럭)를 보내줄 거라 믿으며 그렇게 길을 걷는다. 그런데 철길처럼 길게 늘어선 피란 행렬에 갑작스럽게 총격이 가해지고, 철길 위에 사람들은 하나둘 쓰러진다. 카메라는 행렬의 맨 앞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죽음 앞에 내몰린 모든 이를 동등하게 따라가며 그 비극의 순간을 기록한다. 이 장면만큼 배우들의 집단적 연기와 카메라의 호흡이 인상적인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집단 고통의 물질화 뛰어넘기
일반적인 전쟁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을 길게 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주검을 파편 내듯 빠른 호흡으로 컷을 자름으로써, 잔혹하지만 화려하고 긴박한 스펙터클을 창출한다. 전쟁이라는 처참하고 극단적 상황은 이러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할 뿐이다. 하지만 <작은 연못>은 인물 하나하나가 쓰러지고, 치이고, 피가 터지는아수라장 속에서 어느 하나를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 대가로 집단의 고통을 물질화한다. 이상우 감독이 카메라로 세상을 담는 일에 익숙지 않은 탓에 서툴고 투박한 장면이 영화 곳곳에서 발견됨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재현의 윤리’를 영화적 형식과 맞닿게 하려는 시도는 <작은 연못>의 가장 큰 힘이다. 재현의 윤리는 영화의 만듦새 너머의 영역에 있는 법이다. 이 신의 마무리는 철길에 홀로 남겨져 울부짖는 한 아이의 모습이다. 철길에 나타난 군인들은 아이의 울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총부리만 겨눈다. 가해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은 우리 역사, 달리 말해 망각의 우물에 빠져 숨이 막혀가는 자들의 통곡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던 역사의 무관심, 역사의 폭력과 닮아 있다.
<작은 연못>을 보며 관객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어떤 죄의식을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억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은 역사적 사건에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능하다. 대상을 우리와 무관한 타자로 인식할 때,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촉발될 수 있겠지만 윤리적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작은 연못>의 마지막 장면은 마을 학교의 학예회 장면이다. 소년·소녀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나는 이 장면이 노근리 사건 이전 상황을 회상하는 것이 아닌, 분명 가능했지만 국가적 폭력에 의해 상실된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본다. 문제는 그 상실된 역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화는 밤하늘을 유영하는 어미 고래와 아기 고래의 서정적 모습을 통해 그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회복은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연못>은 그저 역사에 대한 기억을 담았을 뿐이다. 이제 남겨진 몫은, 바로 당신과 나의 것이고, 그 시작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글•안시환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을 시작했다. 1987년 이후 한국 역사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국대·세종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재는 ‘재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