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 자립음악가들, 마침내 일을 내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 홍익대 앞에 있는 두리반 식당은 ‘작은 용산’으로 불린다. 두리반 주인 안종려씨는 2005년 1억원이 넘는 권리금을 주고 식당 문을 열었으나 지난해 말 이주비 300만원만 받고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민간 개발업자에 맞서 농성을 벌여왔다. 인디밴드들이 이 싸움에 연대하고 나섰다. 5월 1일, 60여 밴드가 낮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두리반 일대에서 노동절 120주년 맞이 전국자립음악가대회 <51+>를 열었다.
메이데이가 거의 코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며칠간 쉬지 않고 비가 내린 적이 있다. 본디 질척거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그리 달가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건물 안에서 빗방울과 공사장 철판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즈음 우리는 분주히 <51+>를 준비하고 있어, 집에 거의 사나흘에 한 번씩 들러 잠시 샤워만 하고 나왔다. 하지만 일만 하고 살아갈 수 없는 성격임을 우리는 뻔히 알고 있었기에 나를 포함한 몇몇은 자신의 음반을 ‘두리반’으로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 하나가 (함께 <51+>를 기획한) ‘아마츄어증폭기’의 <금자탑>. 사아, 하고 봄비가 내리는 중에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와 기타 소리는 분명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황홀경>을 듣던 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가끔은 생각해보면/ 엄청난 자의식으로 물들어/ 이기심으로 세상 살아온/ 허약한 이상주의자였구나.” 담담하게 내뱉는 노랫말, 엄청난 자의식, 이기심 그리고 허약한 이상주의자.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걸 준비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적막…. 글쎄, 정말로 왜? 비는 말없이 대지를 적셨고, 나는 괜히 문밖의 젖은 시멘트 바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허약한 이상주의자라.
관심 갖지 말지 말아달라?
실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기획이었다. 우리는 도무지 진지하지 못했다. 태생부터 길바닥이었다. 3월 말쯤이었나, 두리반과 연대하기 위해 토요일마다 열리는 ‘자립음악회’를 함께 기획하면서 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음악가 한받씨의 공연에 놀러갔다. 공연 시작 전 클럽 아래 주차장 터에 걸터앉아 기타를 퉁기던 한받씨를 앞에 두고, 나는 휴대전화 스케줄러를 확인하다 무심코 “올해 메이데이가 토요일인데, 그날은 크게 공연해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물었다. 그때 한받씨가 (역시 무심코) “그럼 5월 1일이니까 ‘51밴드’로 해볼까요?”라고 되묻지 않았다면 <51+>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 말마따나 ‘선언의 명수’. 술자리에서도, 식사 자리에서도 늘 이상한 공상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니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수없이 쏟아져나왔으니, 다만 우리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무도 이런 기획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히 “정말 해볼까?”라며 뭣도 모르고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주섬주섬 주위에 아는 밴드, 우리가 함께 공연하고 싶은 밴드의 리스트를 정리해 연락해보고 또 ‘참여하겠다’는 답신을 받았을 때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대여섯도 아닌 수십에 달하는 밴드와 공연하기로 약속을 잡았으니 물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참여하는 밴드들을 정리해보니 무려 65팀이었다. 질도 그랬지만, 일단 양으로도 대단했다.
그런데 막상 공연을 세부적으로 기획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스태프를 모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지경이었으니 음향 시스템을 빌리고, 프로모션하고, 타임 테이블을 짜는 등…, 자고 일어나면 생각지 못한 일들이 기다렸다. 게다가 큰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철거 용역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 경찰서로 가서 싸우고, 쳐들어오지 못하게 몇몇 스태프는 아예 두리반에서 거주하며 지키기까지 했다. 아직도 생생한 것이 공연 전날 밤, 용역들이 새벽에 음향 시스템을 부수러 올까 걱정돼 두리반 뒤 빈터 한가운데에 의자 하나 달랑 가져다놓고, 여기저기서 각목을 구해 나무 둥지에 기대어놓고 혼자 비장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던 일이다(나는 그날 정말 산화할 마음을 먹었다). 그날 용역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늘 ‘물리력 부족’에 따른 불안감에 시달렸다. 한받씨는 그 와중에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블로그에 ‘말은 쉽다’라고 짧게 쓴 적이 있다. <51+> 공연을 기획한 것에 조금이라도 후회한 이가 비단 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심코 한마디… 못 돌아올 강을 건너다
메이데이 당일 새벽 6시에 눈을 붙이면서도 최소한 나만큼은 <51+>가 과연 무사히 진행될지 의심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낮부터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준비된 3개 무대 중 두리반 건물 지하와 3층은 초반부터 가득 차 더 이상 관객이 들어갈 수 없었다. 야외 무대는 잦은 음향 시스템 고장으로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관객은 개의치 않았다. 실력 있고 자존심 센 밴드들이 의외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잘 끝내준 덕분에 공연 지연도 거의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두리반에 몰렸다. 지하와 3층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야외 무대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공연 볼 사람은 공연을 보고, 피곤한 사람은 잠시 누워 잠을 청하고, 배가 고픈 사람은 주먹밥을 사다 먹고…. 누가 통제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자율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다. ‘메이데이 고즈 온!’(Mayday Goes On!)이라는 구호와 함께 새벽까지 계속된 일렉트로니카 스테이지까지, 사람들은 집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미친 듯 춤추고 놀았다. 뭐랄까, 그때 나는 아주 잠깐 ‘이 사람들 정말 미친 건가?’라고 생각했다. 며칠 거의 잠을 못 잔지라 피곤에 절어 공연이 모두 끝나기 전 새벽 1시30분쯤 2층 ‘대원 전용 공간’에 들어가 잠시 전기장판 위에 몸을 뉘었을 때, 3층에서 사람들이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는 탓에 건물 전체가 둥둥 흔들림을 느끼며 나는 한 번 더 그 생각을 했다. 더불어 ‘이러다가 건물 무너져 깔려죽는다면 그것도 꽤 나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음날 멀쩡히 깨어났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과연 많은 피드백이 올라와 있었다. 미묘하게 다른 관점, 온도, 질감, 이래서 사람들이 무엇이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다고 했지. 어떤 분은 고무된 나머지 너무 멀리까지 ‘탈주’하셨고, 어떤 분은 (자신의 사회의식이 없음에) 괜한 죄책감을 느끼셨고, 또 어떤 분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음에 아쉬움을 표했고…. 그래, 다들 좋다.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많았던 반응은 역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고였다’ 내지는 ‘재미있었다’. 왠지 나는 희비가 교차했다. 처음 공연을 기획할 때 무엇을 노렸더라? ‘그룹51’이 처음 모였을 때부터 나는 ‘정치’와 ‘문화·예술’의 경계에서 고민하자고 얘기했지. 지인인 한 소설가에게 문자메시지로 ‘정치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썩 괜찮은 것’을 만들겠다 공언했지.
본 대로 느낀 대로, ‘하이’했다
하지만 되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너무 순진한 접근이 아니었는지? 또 하나의 ‘말은 쉽다’는 아니었는지? 결국 내가 가장 솔직하게 느낀 반응은 ‘최고였다’ 내지는 ‘재미있었다’, 아주 단순하게 그때 우리 감정은 ‘하이(high)했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분명 그때 ‘하이’했던 것만큼은 진심이라고. 실은 나도 그랬다. 무엇인가 휙 하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나는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다만 그 무엇이 매우 ‘하이’했고 참 아름다웠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우리가 늘 ‘정치’라 범주화했던 것, 또는 ‘문화·예술’로 범주화했던 것과 그 교집합을 우리 메이데이는 조금씩 넘어섰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언표할 수 없었다. ‘최대’를 ‘최소’로만 표현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랄지, 그렇다면 이름난 한 철학자가 ‘사건’을 ‘공백’에 대응시킨 것이 은유만은 아니었을지도.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실패한 것이 맞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우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패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쯤에서 나는, 우리가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잘 실패한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비록 한 번에 긴 선분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점 하나 정도는 잘 찍어놓았으니까.
더 잘 실패하기 위한 무한상상
<51+>가 끝난 다음 날인가, 우리는 팔다 남은 족발에 막걸리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씩 의견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이다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누군가는 ‘홍익대 앞 인디밴드’라는 또 하나의 급진적인 정치적 주체가 탄생하기를 바랐을지 모르지만 글쎄, 그것은 앞날을 지켜보아야 할 문제다. 역시 ‘선언의 명수’답게, 우리는 이미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 음악가노동조합, 로컬 유기농 농산물과 로컬 유기농 음악의 맞교환, 급진적 정치조직 결성, 홍익대 앞 지역통화운동, 음악가들의 파업, 반정부 투쟁 등…. 아이디어는 여전히 차고 넘친다. 그리고 여력은 여전히 없다. 우리는 이제야 걸음마를 뗀 셈이다. 갓 걷기 시작한 우리에게 과분한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신들 중에도 허약한 이상주의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뭐, 좋다. 그런 이상주의라면 많을수록 좋지. 함께 <51+>를 기획한 동민씨는 막걸리를 마시다 “왠지 허무하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제 우리는 종종 겪을 그 허무함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 실패하겠다. 그렇지만 더 잘 실패하겠다. 베케트의 격언은 아직 유효했다.
글•단편선
‘독립’(Indie)보다는 ‘자립’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자립음악가. 좌익 음악가들의 어소시에이션인 ‘인혁당’의 멤버. 대중음악 웹진 <보다>에 비평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