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마녀사냥은 신의 의지였나?

2017-12-29     로베르 뮈샹블레 | 역사학자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는 모든 곳에 악마가 존재한다는 사상을 전파해왔다. 특히 여성에 대해, ‘연약하고 천성적으로 죄가 커 악마에게 가장 손쉬운 먹잇감’으로 간주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로베르 뮈샹블레에 의하면, 과거 기독교는 모든 더러운 것들, 가령 쓰레기나 악취 속에도 악이 숨어있다고 믿었다.


-성서에서 악마는 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는 이 악의 화신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
대부분의 일신교에는 어김없이 긍정적인 존재에 반하는 부정적인 존재가 등장하곤 한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1,000년 무렵,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당시 악마는 비정상적이고 사악하며, 결코 전능하지 않은 존재로 그려졌다. 대개 악마는 신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악마의 유혹을 떨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 자신의 몫으로 간주했다. 악마가 기독교 문화에서 중요한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즉 14세기 이후였다.

- 본디 완벽해야 할 신의 창조 작업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초기 기독교는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가? 
알다시피, 완벽이란 인간과 거리가 먼 특성이다! 흔히 악마는 타락한 천사, 신의 권위에 도전한 반항아로 간주한다. 최근까지도 기독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기독 사상의 아버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악마의 존재는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창조의 완벽성을 증명한다. 인간은 신의 허락 하에 악마가 쳐놓은 가시밭길을 걸으며 험난한 구원의 길을 걷는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악마는 온전한 창조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로는 불행, 전쟁, 질병과 같은 현상들을 해명해준다. 그 덕택에, 신은 이 끔찍한 현상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다.

- 중세 말 갑자기 악마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일련의 사회문화적 현상과 끔찍한 불안감이 기독교 사회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흑사병이었다. 현대인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방식으로 말이다. 14세기,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무참하게 생명을 잃었다. 이로 인해 죽음에 관한 문화가 널리 발전한다. 이때도 여전히 악마는 불행에 대한 신의 책임을 면제해줬으며, 신이 선한 존재로 남을 수 있게끔 해줬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은 당시에도 여전히 악마를 신의 통제 안에 있는 존재로 간주했다.

- 가톨릭교회가 신도들을 옭아매기 위해 성서를 과잉 해석했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저서 <악마의 역사>에서 다양한 논거를 바탕으로 같은 취지의 논의를 전개한 적이 있다. 13~14세기까지 악마는 교회 내부에서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했다. 악마는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물며 수도승의 일상생활 일부를 이뤘다. 수도승은 악마의 존재를 통해 죄악의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중세 말 논란에 휩싸인 교회는 이 악의 화신을 인간사회 전체에 투사하면 많은 이들이 죄악과 죄의식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물론 오늘날 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 그러나 악마가 우리 내면의 악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신도들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기대하기 힘들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당대에는, 그리고 이어 1640년대까지,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말한 의미의 사적 죄의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는 외적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의식을 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악마의 존재 덕에 여성이 남성보다 사악하다고 설명할 수 있었고, ‘사악한 본성을 지닌’ 여성이라는 존재를 죄악시할 수 있었다. 악마는 우리의 내면에, 장기 속(특히 몸의 하부)에 암약하는 동시에 몸의 바깥에도 존재한다는 사상이 널리 발달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식의 사고관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 르네상스는 사탄에 대한 이해가 합리적으로 전환되는 서막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흔히 마녀화형이 성행한 시대가 중세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르네상스, 특히 1560년 이후였다! 르네상스야말로 종교가 가장 무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시대, 인간을 가장 죄악시한 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신이 선하다고 믿는 지식인들의 시대, 에라스뮈스로 대표되는 좀 더 온건한 르네상스 시대가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이런 시대는 1515~1540년, 약 20~30년으로 끝이 났다. 이후 1세기가 넘게 이어진 종교전쟁은 광신적 신앙을 서로 대립시켰고, 잔인한 학살을 이어갔다. 많은 신교도와 구교도가 서로 날을 세운 칼에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우리는 르네상스에 이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르네상스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딴판이었다.

- 성직자, 귀족, 민중은 정말 악마의 존재를 믿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상상하는 악마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어느 정도 악마의 존재를 믿었다. 당시 악마를 믿는 것은 사회적 책무와 같은 것이었다. 종교 행렬이 지나갈 때 불경한 행동을 하면 온갖 수모를 겪거나 심한 경우 처형까지 당하는 시대였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악마를 섬기는 이단자로 지목됐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악마를 믿었다. 악마는 자연 곳곳에 존재하며,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악한 악마에게는 벌을 내리고, 선한 악마에게는 봉헌을 했다. 물론 일부 지식인들의 경우에는 진정으로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14세기 마녀심판에 관한 책을 썼던 작가 장 브로댕이 정말 악마의 존재를 믿었는지, 아니면 논란을 원하지 않아 믿는 척 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경우에도 (믿음 정도가 각기 다른) 다양한 등급의 믿음이 존재했을 것이다.

- 저서 <냄새의 문명>에서 16~17세기 여성의 몸을 악마시하는 경향이 절정에 달했다고 썼다.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가?
여성 혐오증은 여성의 사회적인 진출과 관련이 깊다. 가령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그리트 드 나바르(마그리트 드 발루아를 의미-역주)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 시대에 이르러 수백 명의 젊은 여성이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이던 궁정 사회에 진출했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가부장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위태로운 현실에 직면한 남성들의 대응법은 여성을 탄압하는 것이었다. 성직자는 물론 의사들도 여성을 위험하고 사악한 존재, 악마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여성의 몸이 남성에게 위협적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의 성은 남성에게 위협적이고, 남성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고 말이다! 고대 의학의 틀 안에서 의사들은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주장했는데, 여성의 몸이 차갑고 음습한 반면, 남성의 몸은 따뜻하고 건조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여성이 이브처럼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는 사상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성모만은 숭상했다. 그들에게 성모는 여성성이 부재한 여성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사상에 따르면, 여성은 정신이나 육체가 모두 연약해 혼자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었다. 따라서 남편이나 아버지, 형제와 같은 남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여성은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여성 혐오 사상은 17세기 성행한 데 이어 18세기에 점차 무너졌다. 계몽시대는 르네상스 초기의 길을 다시 답습했다. 비로소 여성 지식인들이 귀환한 것이다.

- 여성을 악마시하는 경향은 나이 든 여성을 대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나이든 여성은 더 이상 ‘유혹자’가 아님에도 말이다.
그렇다. 나이든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비교적 열린 사고를 하는 에라스뮈스 같은 철학자조차 나이든 여성을 혐오했다. 이미 늙었는데도 성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말하자면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 팽배했던 것이다. 여성은 위험하지만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고, 가임기에만 여성성을 지닐 수 있다고 여겼다. 폐경 이후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었다. 교회는 더 이상 여성성을 누릴 수 없는 폐경 이후의 여성이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 둥 온갖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집단적 믿음은 법률, 의학, 정치의 힘에 기대어 더욱 기승을 부렸고, 결국 나이든 여성은 비정상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이성이 승리하는 시대가 올 때까지, 나이든 여성은 죽음이나 악마와 동맹자로 간주했다. 가령 그들은 악마처럼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아이들을 잡아먹거나 혹은 아이들을 가지고 독약이나 연고 따위를 만든다고 여겨졌다. 특히 악마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펼쳤다. 마녀 노파에 관한 이미지는 마을의 여성 민간치료사를 척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전까지 마을의 여성 민간 치료사들은 일부 남성 치료사들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유일한 의사로 역할 했다. 이제 교회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규정하며, 육체에서 벗어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갈 것을 신도들에게 설파했다.

- 16~17세기, ‘마녀사냥’은 수천 명의 여성을 화형대로 이끌었다. 대체 ‘마녀사냥’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교회가 만들어낸 마녀 판타지는 세속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15세기 말 여성을 혐오하는 성직자들이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등 많은 마녀사냥 교본을 생산해냈지만, 정작 이 책을 널리 전파한 것은 일반인들이었다. 교회는 가톨릭 학교가 성황을 누리면서 엘리트층 가운데 많은 신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이성론과 함께 사상적 전환이 이뤄지기 전까지 교회는 여성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믿음을 강요했다. 그때까지 사회 전체는 마녀화형에 동조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이 마녀화형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대개 마녀는 그들과 같은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녀사냥은 이 여성들이 사회질서와 신의 조화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사회 상층부로부터 시작됐다. 유럽에서는 악마의 세계지배를 막겠다는 구실로 수천 명의 여성들이 온갖 박해를 받으며 희생됐다.

- 저서에서, 당시 도덕주의자들은 ‘악마는 쓰레기 속에 있다’는 이유로 후각을 저열한 감각으로 여겼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렇다. 후각은 악마의 감각으로 여겨졌다. 부패한 음식, 사체 등 모든 악취 나는 것들이 악마 시 됐다. 이런 새로운 사고관은 16세기 중반과 17세기 유럽에 다시 페스트가 창궐한 현상과 관련이 깊다. 의사들은 페스트라는 병을 악마의 숨결로 규정했다. 말하자면 신의 허락 아래, 공기가 유해하게 변질돼 악취를 풍기는 사악한 기체로 변한 것이 페스트라고 여겼다. 죄지은 자들을 겨누는 “신이 내린 페스트의 칼날”이라고도 불렀다. 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바로 신을 위해 일하는 악마라고 여겼다. 페스트를 이겨내려면, 악취를 좋은 냄새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가령 주변에 향기 나는 방벽(조금이라도 페스트에 걸린 더러운 공기와 접촉하지 않도록, 사향노루, 향유고래 등에서 추출한 강렬한 동물향이나 식물 뿌리 등을 입에 물거나 귀에 꽂았다)을 쌓아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또한 사악한 페스트 공기를 몰아낼 향기 나는 가죽 제품과 장갑을 착용했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육체적(관능적)이라는 점에서 저열한 감각으로 폄하됐다. 인간은 결코 동물과 같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신의 사도라면, 땅속에 묻힌 일반 시체와 달리, 시신에서 악취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교회는 인간이 육체적인 것에,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저열한 본능에 부디 무감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투쟁과 함께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향유고래 등 동물의 분비물에서 비롯된 세 가지 향이 예방 효과를 지닌 중요한 향으로 부각됐다. 그러다 18세기 상황이 역전된다. 그것은 가히 ‘향의 혁명’이라고 부를 만했다. 동물향의 시대가 저물고 마침내 꽃과 과일향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이른바 향의 혁명은 계몽시대의 도래와 사탄 신앙의 후퇴를 알리는 전조가 아니었을까?
물론이다. 유럽은 16세기에서 17세기 말까지 거의 1세기 반 동안 참혹한 시대를 거쳤다. 이후 고요한 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그것은 이성의 혁명인 동시에, 인간의 가치에 눈을 뜬 인식의 혁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17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돌연 살인율이 획기적으로 감소했다. 사회는 수십 년에 걸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극에 구역질을 냈고, 마침내 세상 곳곳에 악마가 편재한다는 종교관을 타파했다.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 사상이 이 모든 사회적 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만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말부터 사람들의 삶도 한층 평온해졌다. 의학이 발달하고, 기대수명이 증가했으며, 기아가 사라지고, 인구가 늘어났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에로티시즘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 쾌락주의의 발달과 함께 후각이 다시금 신의 감각으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은 예외였다. 철학자들은 여전히 후각이 인간의 동물성이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 많은 이들이 21세기에 종교성(종교적인 것)이 회귀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악마도 다시 회귀하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40~50년 만에 프랑스는 상당히 세속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유럽에서 종교성의 귀환은 일종의 잔상효과에 불과하다. 북미는 최근 30년간 종교지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종교가 문화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지만, 종교 자체는 점차 퇴조하고 있다. 나는 서구에 악마가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마는 그저 광고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혹적인 미끼상품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예로 퀘벡의 ‘라 모디트(저주받은)’라는 이름의 맥주를 꼽을 수 있다. 악마는 이미 패배했다. 현대종교는 더 이상 악마라는 공포를 이용하지 않는다. 물론 가톨릭 전례는 여전히 악마의 표상에 애착을 보인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더 이상 악마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악마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한물간 낡은 게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기 계발에만 관심이 집중된 서구인은 더 이상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그것이 바로 개성의 상실, 자아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럼에도 지금도 역시 서구인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외적 악마가 실존한다. 대표적인 예가 테러리즘이다. 서구사회가 종종 이 악마들이 심장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때로는 높은 벽을 쌓아 올리면서까지 스스로 보호하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이 서구사회의 내적질서를 뒤흔들지는 못한다. 비록 테러리스트들이 서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테러 시도를 계속 벌인다고 해도 말이다.   


글·로베르 뮈샹블레 Robert Muchembled
작가. 파리 대학 명예 교수.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자이기도 한, 그는 현재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으며, 최근작으로는 <냄새의 문명(La civilisation des odeurs)>(Les Belles Lettres·2017)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