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 북친의 자유지상주의적 실험의 장, ‘로자바’

2017-12-29     미레유 쿠르트 & 크리스 덴 옹드

이슬람국가조직(이하 IS)에 대항한 라카 전투에서 선봉에 선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족은 근동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치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이들의 ‘민주적 연방주의’는 민족 간, 종교 간 대립 및 열강들과의 위태로운 동맹관계 속에서 폐허의 벌판 위에 세워졌다. 


밤이 됐지만 여전히 숨 막힐 듯한 열기가 카미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정부의 군경 수십 명이 여전히 감시 중인 작은 공항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곧바로 로자바(쿠르드어로 ‘서부’)라고 불리는, ‘북부시리아 민주연방체제(정식명칭)’의 영토로 들어갔다. 터키국경을 따라 유프라테스강과 이라크 사이에 위치한 로자바는 이슬람국가조직(IS)의 지하디스트들로부터 무력탈환한 곳으로, 적어도 200만 명의 쿠르드족(쿠르드족의 60%에 해당)이 이곳에 살고 있다. 2014년부터 로자바에 터를 잡은 쿠르드계 시리아인들은, 1999년부터 터키에 수감된 쿠르드 노동자당(PKK)의 창립자인 압둘라 오잘란을 계승한 정치적 실험을 시작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포기한 이라크의 쿠르드 노동자당과 시리아의 쿠르드 민주동맹당(PYD)은 2000년대부터 미국의 사회생태학자인 머레이 북친(1921~2006)의 ‘자유지상주의적 지역자치주의’를 표방해왔다.(1)

2014년에 채택된 헌법인 북부시리아 민주연방의 사회협약은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평등하고 소수집단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주창해왔다.(2) 로자바는 사실상 자치구역이다. 시리아 당국이 지배하는 카미실리 공항과 하사카 주내 고립된 작은 영토를 제외하고, 로자바는 시리아 인민수호부대(쿠르드어로 YPG)와 여성수호부대(YPJ)의 쿠르드인 전투원 및 기독교도와 야지드파, 수니파 아랍 민병대의 징집병으로 구성된 시리아민주군(SDF)의 통제 하에 있다. 자치정부 경찰이 순찰을 돌고 있는 카미실리의 수많은 장벽 위에서 시리아 인민보호연맹의 거대한 군기(軍旗)가 펄럭인다. 지하디스트의 자살공격을 막기 위해서다. 44명의 사망자와 140명의 부상자를 낳은 2016년 7월 27일의 공격은 이 곳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이 곳 거리 위로 짙게 드리운 어둠은, 터키 국경 너머의 두 도시, 누사이빈과 마르딘의 밝은 조명과 대조를 이룬다. 카미실리에서 100km 떨어진 루메이란에서 이라크로 향하는 도로 위의 주유소 앞엔 대기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전쟁 발발 전인 2011년에 이 지역에서 원유가 하루에 38만 배럴씩 생산됐는데, 이는 현재 국내생산의 1/3에 해당하는 양이다. 전쟁 탓에 석유생산량이 70% 감소하자 휘발유 부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정유공장이 부족한 탓에 자치정부는 시리아 정부에 원유 일부를 판매하고, 다시 시리아 정부로부터 발동기용 연료를 고가(리터당 80유로센트)에 사 와야만 했다. 

한편 현지 소규모 ‘수공업’ 정유공장 중 다수가 리터당 20유로센트에 휘발유를 판매하고 있는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스럽다. 자욱한 매연이 풍경을 검게 뒤덮고, 피부질환과 호흡기질환이 증가했다. 루메이란에 본부를 둔 에너지 위원회 보좌관인 사메르 후사인이 말했다. “현재로서는 우리에게 딱히 해결책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즉시 우리는 최신식 정유공장을 건설해 지역을 깨끗이 하고 싶다. 당연히 모든 노동자를 새로운 공장에 채용할 것이다.”

만비즈를 비롯한 로자바의 다른 지역에서 수공업 정유공장을 금지하자, 유프라테스 강변의 주요 댐 세 개를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 부족에 시달린 국민들은 분노했다. 국제협약에 따르면, 강의 상류를 이용하고 있는 터키는 초당 600㎥의 유량을 보장해야 한다. 자지라 지역의 에너지 위원회 보좌관이자 엔지니어인 지아드 루스템이 설명했다. “이 댐들이 IS 통제 아래에 있던 당시에, 터키는 더 많은 강물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시리아민주군(SDF, 민병대 연합세력)이 이 댐들을 장악하자 터키가 방출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유량은 초당 200㎥ 이하다.”

쿠르드 채널 <Ronahi TV>의 기자 셰르완 유세프는 카미실리에서 거주하는 대중의 불만을 전했다. “카미실리(시리아의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수백 명이 시위를 했다. 시위자들은 자치정부를 비난할 뿐, 터키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위가 정당하다고 본다. 전쟁 중이라도 공공서비스의 절대 부족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독립된 쿠르디스탄”

쿠르드 노동자당(PKK)과 쿠르드 민주동맹당(PYD)의 성공적인 자치정부 운영을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터키는 댐 방출량 제한조치 등 봉쇄에 나섰으나,(3) 자치 정부의 계획에는 별다른 흔들림이 없다. 로자바 자치구는 세 개의 지역, 즉 자지라, 코바니, 아프린으로 나뉘는데 각 지역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있다. 시리아 민주주의 평의회는 이미 평의회의 정책을 인정한 세 개의 지역을 한시적으로 통솔해야한다. 첫 선거가 2015년 3월에 열렸으며, 다른 선거는 곧 치러질 예정이다. 한편 입법부는 2018년 초에 선출될 것이다.

첫 선거는 쿠르드민주당(PDK)과 유사한 성향의 시리아 쿠르드족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들 중에는 이라크 쿠르드 지방정부 수장 출신으로, 쿠르드 국가위원회(KNC)를 이끄는 마수드 바르자니와 쿠르드 미래 흐름당의 지도부 소속인 나린 마티니가 있었다. 마티니는 카미실리의 서민마을에 있는 그의 집에서 우리 기자들을 맞이했다. 자치정부 당국이 폐쇄한 쿠르드 미래 흐름당의 건물이었다. 마티니는 “우리의 목표는 쿠르드족의 국가계획인, 독립된 쿠르디스탄”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북부시리아 민주연방 체제(로자바)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사무실을 폐쇄하고, 우리 지도자들을 체포했다가 풀어줬다. 우리 공동체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려면,자치정부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부하고 있다.” 

자지라 지역의 입법부 공동의장인 하캄 케로는 쿠르드 국가위원회(KNC)  바르자니 지지자들과 쿠르드 민주동맹당(PYD)간의 긴장이 권력 투쟁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자지라 지역의 입법부는 카미실리에서 20km 남짓 거리의 아무데(Amoudé)에 위치해 있다. 입법부가 있는 건물은 보안이 엄격하다. 소지품을 검사하고, 신분을 확인한 후에 도보로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는 101명의 의원과 함께, 입법부는 ‘사회협약’에 서명한 정당의 대표들을 소집한다. 또한 시민사회 단체의 대표들도 참가하는데, 각 단체는 의무적으로 남녀 각각 1명, 총 2명의 구성원을 보내야한다. 시민단체 대표는 소속된 공동체나 단체로부터 추천받은 사람들로,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유효한 자격을 인정받는다. 게다가 10여 개의 쿠르드 및 아랍의 정치조직은 의석 없이도 활동이 가능하다.

쿠르드 국민국가의 설립은 ‘반민족주의적인’ 행보를 걸었던 오잘란이 정한 목표는 아니었다.(그는 독립된 쿠르드민족국가보다 ‘비국가 사회계약’을 주창한다.) 그는 수감된 후 “쿠르디스탄의 모든 지역이 민주주의 발전에 고루 기여하되 국민의 자기방어권 실현을 목표로 한다. 그렇지만 기존의 정치적 국경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4) “우리는 시리아의 다른 영토들과 분리되고 싶지 않다.” 자지라 지역의 외무위원회 공동의장인 시함 쿼료는 이렇게 말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2013년에 우리 지역의 쿠르드인과 아랍인, 구(舊)시리아인은 자치정부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었다. 시작할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이 일이 4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교를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한편 2014년과 2015년의 국제보고서는 IS로부터 탈환한 지역, 특히 탈 아비야드에서 민주동맹당이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했다. 특히 2015년 10월, 국제앰네스티 위기상황 자문위원인 라마 파키히는 자치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민간인 거주지를 고의로 파괴하고, 어떤 경우에는 마을 전체를 불태워 초토화했다. 어떤 군사적 명분 없이 주민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자치정부는 권력을 남용했고,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수준의 공격으로 국제인도법을 우롱했다.”(5) 이보다 1년 전, 국제인권감시단의 보고서가 비슷한 사건에 대해 상세히 비판한 적이 있다.(6)

그러나 이를 두고 아랍인의 ‘인종청소’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케료는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전투가 임박했을 당시 시리아 인민보호연맹(YPG)은 국민들에게 집을 떠나기를 요구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 나는 탈 아비야드나 라카 주변의 해방된 마을 여러 곳에 방문했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해줬다. 보름 후에 주민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2017년 3월 발표된 유엔인권이사회의 보고서는 국제 엠네스티 등의 인종청소 주장을 반박했다. “이사회는 인민보호연맹(YPG)이나 시리아민주군(SDF)이 민족적 구성을 아랍인공동체로 한정 짓고, 인민보호연맹이 특정민족을 겨냥해 영토 내 인구구성을 조직적으로 바꾸려고 통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7) 

시리아 혼란의 중심에 선 쿠르드 유토피아

우리는 로자바의 서부에 위치한 코바니로 향했다. 도로는 터키가 시리아 영토를 조금씩 침범하면서 건설한, 500km 규모의 거대장벽을 따라 뻗어있었다. 철조망이 비죽 솟아 있는 이 콘크리트 장벽은 여전히 ‘국내 밀 창고’라 불리는 땅의 고립감을 증폭시켰다. 이미 올 7월 초에 이 거대한 밭의 곡식들은 수확됐고, 이제는 이곳에서 양 떼가 먹을 풀을 찾고 있었다. 이곳 지역에서 새롭게 재배를 시작한 어린 올리브나무가 곧게 줄지어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대체로 아직 젊은 농사꾼들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일을 마치기 위해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탈 아비야드 부근에서, 도로는 유량이 많은 강의 상류를 지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개천에 불과했으나, 터키가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가두는 바람에, 관개에 도움이 되는 하천 쪽으로 강물 방향을 바꿨다. 코바니 입구에 들어서자, 지역의 모든 마을에서처럼 대부분이 여성인 ‘순교자’ 사진이 중앙분리대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오잘란의 사진도 역시 걸려 있었다. 불과 2년 전에 대부분 파괴됐던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크레인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건설 중인 건물 옆에는 미사일과 포탄에 무너진 집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한시 빨리 재건하려고 한다.” 도시개발협회에서 일하는 하우진 아지즈가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인도적 지원은 약속이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재건은 무엇보다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2014년 9월부터 2015년 1월 사이에 일어난 코바니 전투는 IS와의 전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이라크 모술과 시리아 라카를 정복한 후, 코바니에서 IS의 ‘칼리프국가’ 확대에 반격을 가했다. 

또한 이 전투는 근동에서의 여성 지위에 변화를 선사했다. ‘콩그라 스타’는 도시의 여성위원회다. 고즈넉한 길에 위치한 콩그라 스타 건물은 주로 가정폭력을 고소하러 온 여성들을 맞이한다. 넓은 회의실은 정원을 향해 있었고, 벽에는 가자의 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이 재현돼 있었다. 폐허 속에 우뚝 솟은 어린 소녀의 모습은 미래와 희망의 상징이다. 이 큰 벽화 양쪽에 있는 벽들은 코바니 전투 중 사망한 여성들의 초상화로 뒤덮여 있었다. 건물의 다른 한쪽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문이 있어 곤경에 빠진 여성들의 출입로가 된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로자바 ‘사회협약’의 주축이 바로 양성평등이라고 강조했다.

“이슬람법은 남성상속분의 절반만을 여성의 상속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치정부가 가결한 새로운 법에 의하면 남녀의 상속분은 동등하다.” 콩그라 스타의 책임자 중 한명인 사라 알-카리가 설명했다. “보수적인 사회에서 새로운 규정이 적용될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자치정부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했다. 단 ‘젊은 남성의 부재’로 일부 여성들이 기혼남과의 혼인을 원하는 경우 예외규정을 둔다. “당사자 모두가 동의하는 경우, 판사가 예외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인정할 수 있다”고 아지즈가 설명했다. 

한편 이 지역에는 끔찍한 관습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복수’다. ‘명예살인’을 척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알-카리가 설명했다. “누군가 나의 형제를 살해한다면, 우리 가족은 복수를 위해 살인자의 가족 중 한 명을 살해해야 한다. 콩그라 스타는 친족에 의한 복수를 막기 위해 두 가족의 대표를 만나 화해를 돕고자 위원회를 구성했다. 구역의 자치공동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여성위원회가 문제해결을 시도하기 위해 개입한다. 위원회가 해결하지 못하면, 이곳으로 오게 된다. 그럼에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분쟁은 사법재판소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 머레이 북친의 지역자치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원칙들이 직접 적용됐다. 우선, 지역 곳곳의 거리나 구역에서도 자치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코바니 거주민 이브라힘 무싸가 설명했다. “자치공동체는 지역주민들이  선정하고 취소할 수 있다. 작년에 코바니에서 2,300개의 자치공동체가 등록됐다. 자치공동체는 고소장 9,700개를 처리했고, 이 중 법원으로 넘어간 것은 500개에 불과하다. 또 다른 원칙을 예로 들자면, 주민들은 상인들이 가격 인상을 위해 판매중단을 할 수 없도록 한 반독점법이 각각의 구역에서 잘 준수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종의 모자이크를 수호할 것“

코바니의 상황은, IS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했으나 다른 부분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여러 공동체가 공존하면서 생기는 문제들, 이에 대한 도전과제들을 잘 보여준다. 알 아사드 체제 하의 교육은 오로지 아랍어로만 이뤄진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교육제도 개혁으로 구 시리아어, 아랍어, 쿠르드어 세 개 언어가 동등하게 공식 언어로 지정됐다. 코바니의 교육부 소속인 딜다르 코바니가 설명했다. “우리 사회는 갖가지 색의 장미 모자이크와 같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게 ‘쿠르드화’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우리 교직자 2만 명 중 절반이 아랍인이다. 코바니와 마찬가지로 공무원 최다수가 쿠르드인이다. 그러나 혼합지역인 탈 아비야드의 공무원은 쿠르드인과 아랍인이 반반이다.”

우리가 방문한 또 하나의 도시는, 2016년 8월 시리아민주군(SDF)이 일부 자유시리아군(FSA, 시리아 반정부 군사조직)과 터키군과도 싸우며 격렬한 전투 끝에 IS의 지배에서 벗어난 만비즈다. 향신료와 과자, 고기, 작은 빵 진열대가 가득한 시장에서 문화 다양성이 눈에 띈다. 부르카를 쓴 여성들이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성들 옆에서 장을 본다. 아랍인들이 쿠르드인 정육점 주인과 시르카시아인(캅카스) 빵집 주인 옆에서 과일을 판매한다. 투르크메니스탄 사람인 아메드는 피자를 만들면서 그의 공동체가 터키 개입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형제처럼 함께 살아간다. 투르크메니스탄과 쿠르드, 아랍, 체첸 공동체간의 관계는 매우 좋다. 서로 혼인이 이뤄지기도 한다. 터키가 이곳에 왜 오겠는가? 정복욕 때문이다.”  

만비즈 시민 정부에 참여했던 그는 터키의 야망에 격분했다. “우리는 쿠르드인들이 아랍과 투르크메니스탄, 체첸 혹은 시카르시아인 국민들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터키의 주장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 터키는 우리의 명성을 더럽히려 하고 있다. 터키가 이런 구실로 쿠르드인과 싸우길 원한다면, 우리, 아랍인들은 우리 인종의 모자이크를 수호하기 위해 쿠르드인들과 단결할 것이다.”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평생 건설 산업 현장에서 운전사로 일해 온 아랍인인 알리 하템을 만났다. 이제, 그는 IS의 지배 하였다면 사형감인 담배판매업을 하고 있다. “자유시리아군과 알 노스라 전선이 이곳에 왔을 당시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그들은 삶의 전반에 개입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를 납치해 서로 싸우게 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리는 벽에 귀가 달려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늘날 우리 문제는 우리 구역의 이사회가 스스로 해결한다.” 만비즈의 해방 이전에도, 주민들은 도시의 모든 공동체와 함께 시민 이사회를 창설했는데, 이 중 쿠르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인구의 30%). 해방 이후에 시리아민주군의 군사 이사회가 정치권력을 이 이사회로 양도했다.   

지역당국은 또한, 최근 겪은 비극적 과거의 책임 규명에 대한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 조정과 통합을 위한 위원회 소속인 아비르 마흐무드는 IS에 잡혀간 남편으로부터 3년 째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화해를 위한 노력에 대해 역설했다. “만비즈가 해방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협력자를 고발하기 위해 시리아 민주군을 보러 왔었다. 무자비한 복수를 막기 위해 군사이사회에서 이 협력자들을 체포됐다. 우리의 조정 과정 끝에,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던 250명의 사람들이 소속 공동체 책임자의 동의를 받고 석방됐다. 이곳에서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죄 혐의를 받거나 유죄선고를 받은 지하디스트는 시리아 인민보호연맹이 체결한 제네바협약에 따르는 감옥에 수감된다. 

라카로 향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시리아민주군 사령부인 애니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 민병대원이 벽에 아랍어와 쿠르드어, 구 시리아어로 ‘시리아민주군’이라고 쓰고 있었다. 자치정부는 9개월간의 병역의무를 부과하지만, 전방에는 전투원 대부분이 자원자다. 이 중에는 라카 근교에서 시리아민주군이 진입할 당시인 7월 6일에 사망한, 월가시위 활동가 출신인 로버트 그롯트와 같은 외국인도 몇 명 있다. 미국의 경장갑차가 구역의 좁은 도로를 순찰 중이다. 파괴된 건물과 검게 타버린 자동차가 흩어져 있는 풍경을 지나 도로 위를 두 시간 동안 달리자 도시가 불쑥 나타났다. 지하디스트의 공격은 시리아민주군의 진군으로 중단됐다. 도시 입구의 오래된 차고에 임시로 만든 응급치료소가 경상자들을 치료한다. 조금 더 멀리 들어가면, 다른 건물에선 이라크 쿠르드인이면서 소수종교인 야지디교 신자인 어린 야지디 민병대원들이 전방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이들 중 한 명은 IS에 희생된 모든 여성들의 원수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8) “억류된 여성들이 야지디인이든 아랍인 혹은 투르크메니스탄인이든 내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후에 우리는 점령군이 아니기 때문에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전투원들이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이 건물의 테라스에서 본 풍경은 한때 주민이 20만 명에 달했던 이 도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무너지거나 여전히 서 있는 집들 사이로 난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해당 구역의 모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우리는 산발적인 집중사격과 몇몇 폭발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아래층에서 전투원들이 커다란 그릇에 담긴 밥과 채소, 닭고기 요리를 나눠 먹었다. 군복에 단 부착물은 모두 달랐다. 어떤 이들은 아랍인이고, 또 어떤 이들은 쿠르드인 또는 야지디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시리아민주군의 참모본부와 부대원 중 한 명이 무전기로 교신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휴식시간은 짧았다. IS는 패배할 때까지 버티고 있다. 로자바와 북부시리아의 민주연방의 이름이 언젠가 지도에 나타날 수 있도록 이들의 전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글·미레유 쿠르트 Mireille Court & 크리스 덴 옹드 Chris Den Hond 
각각 영어 교수와 기자이면서 ‘쿠르디스탄 연대’ 연합의 구성원.
두 사람 모두 스테판 부킨과 함께 ‘로자바 자치공동체’를 조직했다. <국민국가를 위한 쿠르드의 대안>, Critica-Syllepse 출판, 브뤼셀-파리, 2017년. 

번역·김세미 sem2100@naver.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벤자민 페르난데즈 Benjamin Fernandez, ‘Murray Bookchin, écologie ou barbarie(머레이 북친의 생태주의 또는 야만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6년 7월호‧한국어판 2016년 8월호.
(2) 프랑스 내 로자바 대표 사이트에서 프랑스어 지원, www.rojavafrance.fr
(3) 알랑 카발 Allan Kaval, ‘Les Kurdes, combien de divisions?(조각 난 쿠르드 지역에서 새로운 연합이 탄생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1월호‧한국어판 2015년 1월호.
(4) 압둘라 오잘란, <민주적 연방주의> 스테판 부킨, 미레유 쿠르트&크리스 덴 옹드(sous la dir. de), 로자바 자치공동체, L’alternative kurde à l’État-nation, Critica-Syllepse, 브뤼셀-파리, 2017.
(5) ‘Forced displacement and demolitions in northern Syria’, 국제 앰네스티, 런던, 2015년 10월 13일. 
(6) ‘Syria: Abuses in Kurdish-run Enclaves', 국제인권감시단, 뉴욕, 2014년 6월 18일.  
(7) ‘Human rights abuses and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violations in the Syrian Arab Republic, 21 July 2016-28 February 2017’, 유엔인권이사회, 시리아 아랍공화국에 대한 국제조사 독립위원회, 제네바, 2017년 3월 10일. 
(8) 비켄 슈테리앙, ‘Les Yézidis, éternels boucs émissaires(야지디족, 영원한 희생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1월호.


박스기사

서구열강들의 노골적 개입 시작

러시아의 개입이 2015년 9월부터 시작된 내전의 흐름을 뒤바꾸는 데 결정적이었다면, 쿠르드군과 시리아민주군(SDF)소속 동맹군은 IS 후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7월 초 미국이 반정부 민병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하자, 2014년 코바니 전투때부터 드러났던 사실이 한층 명확해졌다. 지하디스트를 향한 서구의 폭격은 시리아민주군 같이 전력과 조직력을 갖춘 확실한 지상군을 확보할 때만 효과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러시아의 항공지원과 해외 민병대(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란과 이라크 부대 등)의 지원으로 강력해진 시리아 정부군은, 대부분의 인구가 있는 시리아 서부 국경지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시리아 반정부군은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레반트 자유인민위원회)으로 유명한 예전 알누스라 전선과 다른 살라피스트 집단인 아라르 알샴(레반트 자유이슬람운동)이 지방의 패권을 놓고 싸웠던 이들리브를 제외하고 보루였던 대다수의 도시를 잃었다. 
 
시리아민주군에 녹아든 시리아 인민보호연맹(쿠르드어로 YPG)은 북서부의 고립지대부터 유프라테스 강 우안의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하사카에서 잠깐의 승리를 거뒀던 때를 제외하고, 시리아 인민보호연맹은 정부군에 과감하게 대응한 적은 없지만 자기 패는 가지고 있었다. 아프린 지역과 동부의 두 개 지역이 이어져 항구적인 시리아 쿠르디스탄 자치구가 설립되는 것을 두려워한 터키는 2016년 8월, 자유시리아군의 원군으로서 라카 전투에 참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직접 무대 위로 등장했다. 하지만 터키군은 IS가 점령했던 소도시 알-밥을 탈환하는데 3개월 넘게 걸렸다. 
 
아스타나와 제네바 협상에 불참했던 시리아 쿠르드인은 파리와 베를린, 워싱턴,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특히 로자바 대표단을 통해 강대국들과 관계를 맺을 것을 기대했다. 러시아는 터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간접적으로 아프린 지역의 자치상황을 유지하려 했고, 전투병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뒀다. 터키에 불리하게, 서구 열강들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시리아민주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항공지원뿐만 아니라 고성능 무기와 특수부대를 지원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미국인이었지만 프랑스인과 영국인도 있었다. 2년 전부터 무장한 반정부집단과 지하디스트를 후퇴시켰지만, 국가의 지속적인 해결을 위한 북부시리아 민주주의연맹의 통합에 관한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