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통과하는 여정

신연식, <로마서 8:37>, 2017

2017-12-29     이대연 | 영화평론가, 소설가

사내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어느 조류의 깃털을 뽑아 만든 펜으로 편지를 쓴다. 소설처럼 길고 내밀한 편지다. 한때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신을 핍박한 대가였다. 사흘간의  어둠 속에서 그는 빛을 보고 음성을 들었다. 그렇게 단련된 언어는 시어만큼이나 단정하고 함축적이다. 그는 신의 뜻에 순종하는 배우지만, 동시에 슬픔과 연민을 간직한 인간이다. 그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쓴다.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은 감독 자신이 밝히듯 노골적인 기독교 영화다. 교회가 배경이고 신자들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기독교적인 상징과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단정할 수만은 없다. 파렴치한 정치놀음과 흉악스러운 욕망에 대한 풍자라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이 창조한 것이 교회만은 아니다. 신의 언어가 머무는 곳이 모두 교회이며, 창조된 피조물의 세계이다. 그러니 이 둘을 분리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감독은 상당수 한국 기독교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 감성을 충동질하거나 포교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밀양>(이창동, 2007)처럼 비판적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제목도 단서가 되지 못한다. <로마서 8:37>이라는 제목은 어떤 방향을 지시할 뿐,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제목이 가리키는 내용은 영화 속으로 진입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현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기섭과 강목사, 그리고 요섭의 실루엣을 덮으며 암전이 되고 검은 화면 위로 제목처럼 자막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27이다. 시련과 고통에 맞설 힘이 될 만한 구절이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더구나 ‘그러나’라니? 앞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이해하기 어렵다. 오프닝 시퀀스의 맥락으로 짐작하자면 죽음에 대한 위로의 말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엔딩에서 반복된다. 어쩌면 반복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과 기도와 암전이라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니 두 번의 엔딩일지도 모르고, ‘로마서 8:37’이라는 긴 문장이 엔딩에 와서야 비로소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일한 두 개의 문장을 통과하는 여정임은 틀림없다. 

여정은 원만하지 않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전도사가 교회 내 세력 다툼에 휘말려 존경하는 목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그의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항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한없이 선할 것만 같았던 인물들은 하나씩 약점을 노출한다. 기섭은 물론이고 충실한 일상인인 기섭의 아내나 신실하기 그지없는 원로 강목사, 심지어  “주의 뜻이 무엇이든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고 순종했을” 것이라고 믿는 현민과 어린 다은도 예외는 아니다. 반면에 순전한 악인일 것 같은 인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게도 된다. 그러니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죄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 공허한 결론이다. 선악과의 금기를 어긴 죄로 인간은 타락했으며,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그것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 존재가 모두 죄인일 뿐이라는 허무주의적 경구로는 ‘로마서 8:37’에 다가갈 수 없다. 

더구나 서사의 흐름은 매끄럽지 못하다. 쇼트가 쇼트를 가로채고 어둠이 빛을 덮는다. 문자가 영상을 막아서는가 하면 카메라는 카메라를 응시하고 소리가 소리를 둘러싼다. 시간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서사는 교란되고 의미는 충돌한다. 마치 제각각의 욕망으로 절박하게 부르짖는 수많은 군중의 기도 소리 같다. 적대하는 이편과 저편이 뒤엉켜 내지르는 아우성 같기도 하다. 충돌한 의미는 산탄처럼 퍼진다. 치명적이지도 않지만 피하기 쉽지도 않다.

산탄 중 하나는 암전이다. 일상의 순간에, 기도와 설교 중에, 대화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곧잘 영상은 지워진다. 영화적 현실은 사라지고 검은 화면이 드리운다. 그 위로 자막이 뜨거나 소리가 오버랩, 또는 디졸브 된다. 자막은 대부분 성경구절이다.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떠올랐다가 지워진다. 기섭과 동료가 나누는 쪽지를 검은 화면 위에 자막으로 보여줄 때 상황은 약간 다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성경구절을 표시하던 문자는 인물의 의식을 포착하면서 조금은 부드럽고 유연해진다. 그러나 의미 있는 내용을 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반면에 소리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관심을 인물의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시킨다. 곧잘 의식의 흐름이나 내면의 풍경을 포착한다. 그것은 외부의 상황을 압도한다. 예컨대 이어폰을 꽂은 채 성폭행 여성의 증언을 들을 때 기섭의 일상을 비추는 시각적 이미지는 뒤로 물러나고 그녀의 음성이 전면으로 나온다. 그런데 증언의 앞머리는 문자화되어 암전 위에 자막으로 표시된다. 음성과 문자가 겹친다. 동일한 내용에 대해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반응한다. 그러나 문자는 짤막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문자가 음성을 받아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음성이 문자를 낚아챈 듯하다. 문자는 연성화되면서 마침내 소리에 포획된다. 비로소 죽은 화석과 같던 성경이 생기를 얻고 해석의 여지를 얻는다. 이렇게 소리와 문자가 어둠 속에서 만나고 성경은 음성으로 살아난다. 

마치 눈을 감고 들려올지 모를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권하는 듯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기섭은 지민이 보내온 선물을 받는다.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나물을 그린 그림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신의 성현이며, 선지자 모세가 만난 신의 모습이다. 신과 이 실존적 대면을 상징하며 기섭이 듣게 될 신의 음성을 암시한다. 이 이미지는 종종 불타는 현민의 움막과 오버랩 된다. 외관상 유사한 까닭에 그것은 번제나 화목제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요섭의 아내가 그에게 형을 위한 기도를 호소할 때 들렸던 물소리는 그가 움막을 짓는 동안 계속 이어진다. 그 자리는 요섭, 현민 형제가 버려진 장소라고 설명되지만 또한 요섭의 아내가 그에게 (거짓) 사명을 준 장소이기도 하다. 기도가 신의 말씀을 듣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계속되는 의지의 표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결국 지민의 거짓 평화와 요섭의 욕망, 그리고 현민의 우상이 만났을 때 화재가 발생한다. 움막의 화재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폭력으로 혼돈을 중지시키는 사건이다.

동시에, 죄를 불태워 소멸시키는 사건이다. 
모세가 기록했다고 알려진 모세 3경의 첫머리는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 어둠과 혼돈과 공허가 있었다. 물론 물리적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신의 창조는 아름다웠으나 곧 타락했다. 사람은 절망으로 멀어버린 어둠과 욕망으로 들끓는 혼란, 슬픔으로 무너진 공허를 안고 태어났다 사라져갔다. 죄의 결과이자 죄 그 자체였다. 말씀이 세상에 와 다시 한번 어둠과 혼돈과 공허를 통과했다. 죄의 대속이자 구원의 역사다. 감독은 이야기의 공허함과 형식의 혼란스러움, 암전의 어둠을 되풀이함으로써 관객에게 구원의 경이를 경험하게 하고픈 것은 아니었을까?
엔딩에서 기섭은 딸이 기르던 토끼를 매장하고 기도한다. 기도는 곧 회개로 바뀐다. 비탄과 격정이, 절규와 눈물이 그를 덮친다. 동일한 두 개의 구절 사이에 놓인 것은 어둠과 혼돈과 공허이며, 그 지난한 여정을 통과한 그에게 비로소 바울의 편지가 당도한다. 다시 암전이다. 덩달아 눈을 감아본다. 내려앉은 눈꺼풀의 어둠 위로 소리가 들린다. 삽 뜨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다. 때로는 누군가의 설교이거나 그냥 말소리거나 고통에 신음하는 피해자의 증언, 또는 즐겁게 웃고 떠드는 청년들의 소란스러움, 절규하는 기도 소리이기도 하다. 귀도 닫아본다. 고요하다. 완벽한 공백이다. 어둠을 찢으며 빛 한 줄기가 새어나온다. 바울이 어둠 속에서 본 빛 같기도 하다. 빛이 기호가 되고 의미를 만든다. 어둠 속에서 문자를 읽고 고요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감각이 혼재되는 공감각의 세계다. 문자가 소리가 된다. 신의 음성을 듣는다. 죄로 인한 절망과 두려움 앞에 서 있는 기섭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글·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