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자’ 잭슨을 섬기는 트럼프의 외교 여정

2018-01-31     올리비에 자젝 | 리옹 3대학의 정치학 교수

1년 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직에 오르며 미국은 무역협정, 기후, 북한 및 이란과의 대치, 이스라엘에 조건 없이 보내는 동조 등 중대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이 과거와 단절됐다는 주장과 달리, 특정 외교사 학파의 많은 부분을 계승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논설위원인 미셸 골드버그는 2017년 11월 6일에 ‘종말 애도의 날’이라는 분노에 찬 칼럼을 기고하며 트럼프 집권 첫해는 “악몽”이었다고 충격적으로 말한다. 그는 “악몽 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상이 돼버렸다”고 탄식한다.(1) 최근 트럼프를 향한 미국 여론주도층의 비난을 보면, 트럼프의 45대 미 대통령 취임 이후 겪은 미국의 변화에 실망감을 표출한 사람은 미셸 골드버그뿐만은 아닌 듯하다.

트럼프 정부와 미국의 전통적 엘리트간의 간극은 국내 정치에서 두드러진다. 트럼프는 돌출발언과 변덕을 일삼고, 날이 갈수록 격분하는 반대파는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미국 정치권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과 경쟁국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 진보주의자들이 증오에 사로잡혀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일삼고, 문화적 난투극을 계속 벌이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 대혼란이 전적으로 트럼프 탓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미국의 토론은, 사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두 갈래로 표류 중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극도로 치닫고 있는 현재 대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계획 자체가 없을지 모른다는 게 진짜 문제”

트럼프주의는 뚜렷한 해답은 내놓지 못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이며 고집 세고 복잡하며 자기중심적이고 교활한 접근법이다. 그로 인해 진정으로 과거와 단절된 모습을 보이는 곳은 미 국내정치가 아니다. 단절은 분명 국제관계 분야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미 외교 정책의 특징은 원칙, 가치, 커다란 전략적 노선의 피상적 합의였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고문이자 냉전 전후의 ‘자유’ 세계의 지배라는 도식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역할을 “이해관계에 얽혀있지만, 관대한 주권자”로 규정하며 이 합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기 드문 편재성을 지닌 미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한층 높은 안보 수준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 미국은 ‘위대한 전략’을 토대로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닌 세계적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다른 국가들이 이를 인정한다면, 공동체는 성공할 기회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2)

하지만 “세상은 엉망진창이며 인간은 모든 동물 중 가장 잔혹하다”고 말하는 트럼프는,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외교계 거두로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3) 오바마 대통령의 수석 대외정책고문을 지낸 브레진스키가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해 주창한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는 더 이상 ‘신대륙(New World)’의 질서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게 트럼프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대선공약을 달성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경쟁국들보다 월등히 앞서며, 앞으로 체결되는 국가 간 협정에서 미국이 유리한 지위를 점하는 한, 과거의 신세계 질서를 별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이익이 미국과 아시아 태평양, 유럽, 중동 간에 상호 이익이 되는 안보 동반자 관계에 기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재협상하며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수정을 가하려 한다. 독일을 위시해 미국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 대한 ‘안보 무임승차’ 행위를 규탄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용성에 의구심(완곡하게 표현해서)을 드러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힘의 재배치로 탄생한 미국의 ‘위대한 전략’의 버팀목은, 시스템이 직면한 혼란으로 흔들리는 듯하다.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은 이 혼란을 뒷짐 진 채 바라보고 있다. 미 국무부 고위공직의 경우, ‘이 부처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대통령의 판단으로 1/3이 현재까지 공석이다.(4) 트럼프의 이 같은 능멸적인 처사에 외교 정책전문가들은 그가 비전도, 기본계획도, 전략도 없다고 지적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결집시키는, 평가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특이한 점은 트럼프를 경멸하는 이들 중에는 민주당의 자유주의를 존중하는 민주당원은 물론, 부시 시대의 신보수주의를 계승하는 공화당원들도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워싱턴 포스트>에 “트럼프의 외교정책계획에서 보이는 진짜 우려는, 어쩌면 그 계획 자체가 아예 없거나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5) 실상 본질적인 질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도덕적 책임에 부적합한 외교적 이기주의로 회귀할 계획인 것일까? 아니면 진정 나침반도 지침도 없이,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항해하고 있는 것일까?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보여준 ‘지침’들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논평가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오늘날 트럼프 행정부의 위험한 외교정책에 대해 대외 안정성을 가정하고 있는 점이다. 미 국무부 부장관에 이어, 세계은행 총재와 골드만 삭스의 의장을 지낸 로버트 졸릭은 이렇게 증언한다.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해리 트루먼(1945~1953년 부대통령과 미 대통령직을 수행함) 이후 민주당 및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들이 행한 외교 정책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역대 대통령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국제주의(이상)와 국익우선주의(현실)를 언제나 현명하게 고려했었을 것이다.(6) 이 견해에는 맞는 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실제 정책을 구분해서 봐야 할 것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자 외교 노선의 일관성을 지닌다는 논리는 허구다. 공화당 출신의 트럼프는 미국외교의 역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팽창’과 ‘고립’이라는 전략 사이에서 종종 오락가락한다.(7)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개입주의를 종결했다. 존 케네디는 1961년 다소 무책임하게 이 개입주의를 재개한다(베트남 전쟁 파병-역주). 1969년부터 리처드 닉슨은 소극적인 ‘고립’이나 ‘팽창’의 두 가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그는 미·중 양국 간의 긴장된 관계를 이완시키고 중남미의 반공운동을 지지한다). 로널드 레이건은 스스로 ‘팽창주의자’라고 주장하며 카터 행정부가 범한 ‘고립’의 시기를 비난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국가건설’이라는 개념을 표방하며, 외교정책에서 큰 이견을 보이지 않은 클린턴과 부시의 개입주의와 절교했다. 트럼프는 이 변화하는 외교 정책의 순환주기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의 ‘위대한 전략’을 뒷받침하는 ‘지침’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토머스 제퍼슨(1801~1809년 미 대통령)과 이후 제임스 카터(1977~1981) 같은 ‘모범생’들이 주는 지침이 있다. 이 두 전 대통령은 세계적인 귀감이 되기를 희망했다. 워런 하딩(1921~1923), 또는 더 올라가 존 퀸시 애덤스(1797~1801) 같은 고립주의자들이 주는 지침이 있다.(8) 한편, 닉슨처럼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이들이 주는 지침이 있다.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를 아우르는 제국주의자들이 주는 지침이 있다.(9) 우드로 윌슨처럼 세상을 온통 바꾸려 하거나, 오바마 같은 실용주의적인 국제주의자들이 주는 지침이 있다.(10) 언뜻 보기에 이 관점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국제관계 이론은 미국의 외교적 시각과 함께 간략히 ‘계열’로 묶을 수 있다.

월터 러셀 미드의 이론은 국제관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전형적으로 네 가지 경향을 띠며 각각 대표적인 정치인들의 사상과 결부된다고 말한다.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1789~1795)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무역문제에서 ‘현실적’이고 단호한 사고를 보여줬다.(11) 한편, 토머스 제퍼슨(1801~1809)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줬으며, 우드로 윌슨(1913~1921)은 도덕적 가치를 수호했다. 마지막으로 앤드류 잭슨(1829~1837)은 국가주의자이며 군국주의자였다.(12)

잭슨의 초상화를 내건 트럼프는 잭슨주의자?

오늘날 트럼프의 시각을 잭슨주의에 포함시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 잭슨주의는 트럼프의 국내외 정책에 주요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며 취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서둘러 잭슨의 초상화를 집무실에 걸고 잭슨의 고향이자 역사적인 지역인 내슈빌을 탐방한다. 일각에서는 앤드류 잭슨이 노예를 사들이고 1831년의 잔혹한 추방명령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촉토 족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눈물의 행로’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인물을 트럼프가 시의적절하지 않게 공식 지지한 것에 분개했다. 대내적으로는 포퓰리스트이자 대외적으로 국수주의자인 트럼프는 앤드류 잭슨을 대서양 연안의 부패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투쟁한 인기 있는 영웅이자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중산층의 대변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앤드류 잭슨의 사진 앞에서 위대한 미국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잭슨주의의 표방이 트럼프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잭슨주의이건 아니건 간에, 트럼프는 단지 일부의 동업자들에게만 익숙한 미국의 전통적 행동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동업자들은 미국에 영향력을 미치는 대기업의 소수 대주주들이며 지분참여로부터 나오는 투자 수익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운 이들이다. 트럼프는 더 이상 미국의 가치를 전파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안나 애플바움은 ‘신화적 과거로 회귀하려는 트럼프의 한심한 약속’을 지적하며 서구의 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그의 비상식적인 왜곡을 비판한다.(13) 그의 글은 부시 대통령의 전 연설보좌관이었던 데이비드 프럼부터 트럼프를 범대서양주의의 ‘실존적 위협’으로 보는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상임의장까지 많은 이들이 공유했다. 이와 관련해, 신보수주의자인 찰스 크라우스해머는 “트루먼 대통령은 교역개방성과 상호보호를 강조하는 자유세계를 꿈꿨다. 이후 이는 미국 대통령 모두가 공유하는 비전이 됐다. 지금까지는 말이다”라고 덧붙였다.(14)

트럼프가 왜곡하는 ‘미국의 이상’은 무엇인가

미국의 예외주의에 반하는 트럼프는 2세기 전에 확립된 도덕적 비전을 위협하는 예측 불가의 존재다. 미국을 건국한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 비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정당한 목표를 추구하는 세계적인 국가’가 담겨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이상을 왜곡한다. 하지만 미국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이 이상은 자유민주주의적 개입주의 형태로서 한때 미국의 외교 패러다임으로 간주됐다. 조지 워싱턴과 윌리엄 매킨리가 대통령을 지낸 1789~1901년에는 미국의 첫 번째 외교적 합의(고립주의)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애플바움이나 크라우트해머가 말하는 것과는 꽤 다른 모습이다. 본래 비개입주의인 미국 외교정책은 북미대륙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무역에서 좋은 결실을 낳으며, 자유를 제한하는 동맹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미국이 경제적 발전을 힘으로 이용하며 세계정치에 뛰어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경제적 강국의 위치를 차지하면서부터다. 

정확히 ‘두 번째 합의’가 시작되는 지점은 미국의 힘이 강해지면서부터다. 미국의 도덕적 예외주의가 내향적인 면에서 외향적인 면으로 변하게 되는 이 새로운 국면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화된다. 하나는 국가주의적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측면이다. 전자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1909)이, 후자에서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1913~1921)이 각각 상징적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국내 정치에서 진보주의자였던 루스벨트는 외교 분야에서는 확고한 개입주의자였다. ‘전쟁을 사랑하던’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은 종종 호전적이고 제국주의적이었다.(15) 반면 우드로 윌슨은 외교 분야에서 이상주의자로 여겨진다. 1917년 윌슨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높은 기준과 법의 이름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사’ 루스벨트의 현실정치와 ‘성직자’ 윌슨의 이상주의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16)

미 상원의원이자 루스벨트의 측근 고문이었던 앨버트 비버리지는 1990년 1월 9일에 상원 의사당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연설한다. “신은 무질서한 세상에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에게 질서를 재편하는 지배자의 자리를 줬다. 신은 지구상의 반동세력을 전복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전진의 영혼을 불어넣었다. 신은 우리를 정부의 지지자로 만들었고 우리는 야만적이고 망령이 든 민중 위에서 그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 이렇게 할 힘이 없다면, 세상은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미개해질 것이다.”(17) 이 연설은 현실정치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이상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이와 반대로 정치학자 스탠리 호프만은 윌슨식 이상주의의 모호성을 지적한다. “윌슨은 이중적인 인물이다. 정치가인 윌슨이 믿었던, 숭고하며 이상적인 비(非) 마키아벨리주의적 도덕은 비극으로 끝났고, 그가 자국의 이해를 수호하는 인물로서 완벽한 권모가처럼 종종 행동했기 때문이다.”(18)

미국의 신보수주의(네오콘 외교노선)를 규정하기 위해 ‘군화 신은 윌슨주의’(정치학자 피에르 아스너가 부시의 윌슨주의에서 보여주는 개입주의와 군사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표현, 네오콘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미국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확산이었음-역주)를 말하는 것은 논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드로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늘 미국의 이익을 맹렬히 수호했다. 미국이 멕시코(1914, 1916), 도미니카 공화국(1916~1924), 파나마(1918~1921)에 개입한 역사가 알려주듯, 윌슨주의는 언제나 고압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루스벨트-윌슨은 이원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미국 외교정책의 단일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다. 그 둘이 중시하는 다른 두 요소는 앞서기도 뒤서기도 했지만(루스벨트는 국가이익의 반사신경을 우선시했고 윌슨은 도덕적 반사신경을 우선시했다)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으며, 충돌할 게 없다. 본질에서 보면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예외주의적’이며, 개입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다소 슬며시 제국적이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내면화하고 있던 이 가치는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이 공유하는 두 번째 합의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합의는 첫 번째 ‘고립주의적인 합의’(스티븐 크래스너)를 점차 대체했다. 20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집권했던 미 행정부들은 ‘팽창’과 ‘고립’의 노선을 주기적으로 선회해왔다. 예컨대 1776년 건국 당시부터 루스벨트의 제국주의, 윌슨의 도덕주의, 트루먼의 국가안보 현실주의, 클린턴의 인권외교 등의 흐름이 그러하다. 이 태생적인 유연성을 통해 무역의 성장, 범세계적인 힘의 증강, 도덕적 책무 등을 주축으로 하는 두 번째 합의가 등장했다.

“세계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축장이다”

어쩌면 트럼프 현상은 앞선 미국의 외교적 전통과의 단절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범세계적인 힘의 증강과 무역의 성장에 집착하지만, 두 번째 합의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도덕적 책무는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럼프가 도덕적인 책무를 포기하면서 돌아간 지점은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이 보여줬던 독특한 고립주의가 아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미국 우선주의’라는 슬로건이 고립주의와 결부되겠지만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가 돌아간 곳은 외교적 거리 유지다. 조지 워싱턴부터 윌리엄 매킨리까지 시행됐고 1823년 먼로주의의 핵심 가치인 외교적 거리 유지는 두 번째 합의의 배경이 되는 루스벨트와 윌슨이 집권하던 시기를 앞선다. 

몇몇 요소를 보면, 트럼프는 자신을 새로운 도그마의 창시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 서문에 “지금부터 미국의 정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라고 쓴다. 근본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이 문장을 습관적인 허풍으로 치부한다면 어쩌면 경솔한 일일 것이다. 트럼프의 국가 안보회의 보좌관인 맥매스터 장군은 2017년 6월 1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대통령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공동체가 아닌, 각축장으로 보는 통찰력 풍부한 시각을 지녔다. 국가와 비정부 주체, 경제 주체들은 이 각축장에 참여하며 우월한 지위를 선점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가 수용하는 국제관계의 이 기본적 성질을 부정하기보다, 이 각축장에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힘을 쏟을 것이다”고 설명했다.(19)  
이 발언은 미국외교의 기존질서에 폭탄을 던졌다.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군사적 힘인 반면,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것이 문화적 힘이기 때문이다. 한때 투키디데스의 열성적인 팬이었다는 맥매스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20) 짐작하겠지만, 트럼프 본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지 않았으니 길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유명한 대화 전문을 다 아는 것처럼 그는 행동한다. 그 대화에서는 아테네의 제해권을 쥔 자들이 조공을 바치지 않으려 하는 멜로스 주민들에게 씁쓸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 불신만을 조장하는 이 긴 설교는 무시해라! (…) 우리도 알고 있고 여러분들도 우리만큼 잘 알 것이다. 양쪽 모두의 힘이 균등할 때만 사람들에게 정의는 고려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강자는 힘을 행사하고 약자는 강자에게 복종해야 한다.”(21)

트럼프는 2018년 미 국방성 예산을 오바마 재임 마지막 해보다 1,000억 달러 증액해 6,920억 달러로 책정했다. 이 기회에 공화당 및 민주당 의원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부 예산안을 상당히 증액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이 점에서 ‘잭슨주의’는 (적어도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트럼프의 동경 그 자체보다 한층 더 깊은 영향력을 담고 있다. 미국의 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외교정책을 세상을 다 바꾸려는 듯한 이데올로기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이해관계, 투자관계, 그리고 여차하면 발을 빼는 국제관계 등을 고려하며 외교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트럼프의 진짜 문제는, ‘무능력’일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잭슨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가 1925년 표방한 “미국인의 최대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라는 슬로건도 이행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라는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외교잡지가 아니라 <포브스> 같은 잡지일지도 모른다. 성공과 힘, 그리고 미국문화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돈에 대한 집착을 전형적으로 상징하는 <포브스>는 2017년 11월 트럼프와 함께한 장문의 인터뷰를 게재한 바 있다. 그 인터뷰는 트럼프를 조롱하지도 적대하지도, 그렇다고 찬양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업가 중 한 명의 인생에 대한 단순하고 현실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인터뷰였다. 그리고 트럼프는 살짝 저속하고 거침없으며 교양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인터뷰이들과 달랐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포브스>는 객관적이고 도덕과 무관하며, 이번만큼은 <뉴욕타임스>보다 깊이 있는 기사를 게재하며 담담히 서술한다. “미 정부의 요직을 계승한다는 것은 제너럴일렉트릭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대표의 후임이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수인계처럼 업무의 연속성이 전제된다. 그 연속성이란, 새로운 방향의 급선무나 정책을 제시하되 기존의 약속을 지키며 회사나 국가를 가급적 잘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사업가 정신은 문제들을 이런 방식(특히, 급격한 변화를 꿈꾸며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하지 않는다. 이전 정책들이 잘못된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되면, 트럼프에게는 미국의 명성을 희생하더라도 그 약속들을 지킬 이유가 없을 뿐이다.”(22)

이 해석하기 어려운 대통령을 역사가 심판하기 전에는, 트럼프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일련의 ‘거래’로 축소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트럼프 이전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정중하고 교양 있는 방식을 취했다. 트럼프가 하나의 사안을 두고 별개의 발표(러시아와의 관계를 실용주의적인 노선으로 검토하는 한편 양국 간의 긴장관계를 지속하는 것)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니키 헤일리 UN 주재 미국대사가 자신 있게 이론화하듯, 트럼프가 예측 불가능성을 외교적 목적 그 자체로 만들기로 결심한 문제 또한 아니다.(23) 트럼프의 앤드류 잭슨에 대한 집착은 분명 독특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분적으로만 설명되는 프리즘이다.

트럼프의 진짜 문제는, 스스로 과대평가하고 있을 그의 개인적인 재능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트럼프의 사업가 정신은 체결 및 재협상에 앞서 협정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는 상호작용적 통찰력이 실상은 결핍된 탓에, 협정이 지닌 맥락과 그로 인한 장기적 결과를 동시에 판단하지 못하는 듯하다. 트럼프의 감각이 절반은 마비됐다는 것은, 최근 몇 달간 단순한 가정에 불과했으나 요즘 보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 충격적인 예로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는 2017년 12월 6일 발표가 있었다(UN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국제도시로 규정한 바 있다-역주).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엄청난 과오다. 이로 인해 미국은 아무 대가 없이 이스라엘 집권당인 리쿠드(Likud)의 입장과 보조를 맞추게 됐으며, 공정한 평화협상 과정 책임자로서 미국의 정당성을 몽땅 잃게 됐다. 여기에는 상호작용적인 지혜도, 합의에 의한 조정도 없었다. 트럼프는 그 무엇도 협상하지 않았다. 즉, 아무 대가 없이 이스라엘에 모든 것을 내준 셈이다. 

만약 미국이 관례적으로 이런 일탈을 일삼는다면, 트럼프가 미국의 외교노선을 첫 번째 합의로 되돌린 것이 의식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새로운 시각이 영감을 주는지와, 그 시각을 구현할 역량이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트럼프가 균형 잡힌 합의를 체결할 역량이 있는지, 시급히 측정해 봐야 한다. 합의에 균형이 있다면 국제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연쇄반응을 낳을 일이 없다.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균형만이 힘을 파괴하고 무력하게 만든다”라고 지적하며 “사회질서는 힘의 균형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균형에 대한 이 냉철한 논리를 거부하며 (틀에 박힌 이상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종종 미국외교를 방황하게 만드는) 미국의 이상주의보다 정치적 현실주의를 더 왜곡한다. 이 정치적 현실주의는 국익수호와 협상 시 상대국의 이익을 고려하는 능력을 구분 짓지 않는다.  


글·올리비에 자젝 Olivier Zajec
리옹 3대학의 정치학 교수

번역·권경아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수료


(1) Michelle Goldberg, ‘Anniversary of the Apocalypse’, <The New York Times>, 2017년 11월 6일. 
(2) Zbigniew Brzezinski, <Le vrai choix. L’Amérique et le reste du monde(진짜 선택. 미국과 나머지 국가)>, Paris, Odile Jacob, 2004년, 305쪽. 
(3) Gail Sheehy, ‘The insurmountable trust deficit’, <Newsweek>, 2017년 9월 27일. 
(4) ‘Inside Trump’s Head: An Exclusive Interview With the President, And The Single Theory That Explains Everything’, <Forbes>, 2017년 11월 14일.
(5) David Ignatius, ‘The real problem with Trump’s foreign policy plans? He may not have any’, <The Washington Post>, 2017년 10월 10일.
(6) Robert B. Zoellick, ‘The Peril of Trump’s Populist Foreign Policy’, <The Wall Street Journal>, 2017년 11월 29일. 
(7) Stephen Sestanovich, <Maximalist: America in the World From Truman to Obama>, 2014년.
(8) 1821년 7월 4일 연설. 
(9) Joseph Joffe, ‘America self-contained’, <The American Interest>, vol. IX, n° 5, 2014년 5월~6월, 7쪽 참고. 
(10) G. John Ikenberry의 표현. 
(11) 다음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대통령의 임기를 표시했으나 알렉산더 해밀턴은 단 한 번도 최고위직을 차지하지 않았다.
(12) Walter Russell Mead, <Sous le signe de la providence: comment la diplomatie américaine a changé le monde(섭리 하에 미국외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꿨나)(2001)>, Paris, Odile Jacob, 2003년.
(13) Anne Applebaum, ‘Trump’s dark promise to return to a mythical past’,  <The Washington Post>, 2017년 1월 20일.
(14) Charles Krauthammer, ‘Trump’s foreign policy revolution’, <The Washington Post>, 2017년 1월 26일. 
(15) Evan Thomas, <The War Lovers. Roosevelt, Lodge, Hearst and the Rush to Empire, 1898>, New York, Boston, London, Back Bay Books, 2010년. 그리고 H.K. Beale, <Theodore Roosevelt and the Rise of America to World Power>, Baltimore, The Johns Hopkins Press, 1956년.
(16) John Milton Cooper, Jr., <The Warrior and the Priest, Woodrow Wilson and Theodore Roosevelt>, Cambridge MC and London, England,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년.
(17) Senator Albert J, Beveridge, Senate of the United States, January 9, 1900, Congressional Record, vol. 33, Part 1, 704쪽. 
(18) Stanley Hoffmann, <Une morale pour les monstres froids, pour une éthique des relations internationales(국제 관계 윤리를 위한, 냉정한 괴물들을 위한 도덕)>, Paris, Editions du Seuil, 1982년, 34~35쪽.
(19) H.R. McMaster et Gary D. Cohn, ‘America first doesn’t mean America alone’, <The Wall Street Journal>, 2017년 5월 30일.
(20) Nathan Hodge, Julian E. Barnes, ‘The Cold War Pits a U.S. General Against His Longtime Russian Nemesis’, <The Wall Street Journal>, 2017년 6월 16일. 
(21) Thucydide, <Histoire de la Guerre du Péloponnèse(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 84~116쪽.
(22) ‘Inside Trump’s Head’, <Forbes>, 2017년 11월 14일, art. cit. 
(23) Colum Lynch, ‘Nikki Haley and Trump’s Doctrine of Diplomatic Chaos’, <Foreign Policy>, 2017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