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총독부 지원 하의 온두라스 부정선거

2018-01-31     알렉산더 메인 | 정치분석가

11월 26일 치러진 온두라스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믿을 만한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전 대통령이었던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는 부정부패 척결에 오랫동안 힘써온 중도파 후보 살바도르 나스라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연임에 성공했다. 1980년대 초부터 온두라스 정계와 군부에 깊숙이 관여해 온 미국의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로 한가운데서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최루탄 연기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12월 초,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는 전형적인 군사 쿠데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2009년 6월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축출되고 코스타리카로 강제 망명길에 올랐던 때의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이번 시위에 불을 지핀 것은 대선 부정 의혹이었다. 지난 11월 26일에 치러진 온두라스 대선은 시작부터 극도의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집권당인 국민당에 매수된 TSE(Tribunal Supremo Electoral: 최고선거재판소)가, 권력남용과 부패 스캔들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현 대통령의 연임을 위해 선거 부정행위를 눈감아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 소문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현재 온두라스의 급진적 자유주의 정책, 그리고 군국화가 유지되기를 원하는 미국이 에르난데스 현 대통령이 낙선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미국 대사를 지칭하는 ‘총독’이라는 표현이 온두라스 역사에 등장한 시점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 용어는 1980년대에 크게 유행했는데, 당시 테구시갈파에 머물던 미국 대사가 군부독재 체제에서 군부에 의한 조건부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되던 온두라스의 불안정한 과도기 시절을 거의 이끌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사였던 ‘총독’ 존 네그로폰테에게 주어진 미션은 아주 명확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 그리고 브라질과 과테말라의 좌파운동세력과 벌이고 있던 물밑 전쟁에서 온두라스가 연결 플랫폼이 돼주는 것이었다. 이는 온두라스 내에 미군이 다수 주둔해야 하며, 미국이 온두라스의 정계를 장악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네그로폰테의 지휘 하에, 미군은 온두라스 국민들 사이에서 이미 ‘양키’ 소유지로 인식돼 있던 소토 카노(Soto Cano) 영해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온두라스에 대한 미국의 국방비 지원은 1981년 400만 달러에서 1985년 7,740만 달러로 급증했다. CIA는 온두라스군이 “대부분 정치적인 동기로 수백여 건의 인권유린”을 자행한 사실을 내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수십 명의 노조원‧농민‧학생을 고문하고 죽이고 실종시켰던, 악명 높은 3-16부대를 포함한 다수의 살상부대들을 지원했다.(1) 그리고 기밀 해제된 문서들에 따르면, 네그로폰테는 “온두라스에 인권논란이 제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저지해왔다.(2)

지주 출신 대통령 셀라야의 반전, 후폭풍

후에 UN 대사로, 그리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국무부 차관으로 승진한 네그로폰테의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었다.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자유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된 마누엘 셀라야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좌파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전임자들과는 정반대로 미국의 주적인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가까이하고,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볼리바르 동맹(ALBA) 가입을 선언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미군주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측과 접촉하고, 1982년 미국의 주도로 새롭게 제정됐던 진보주의적 성향의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제헌의회를 만들고자 했다. 셀라야 대통령이 제헌의회 소집을 국민투표에 부칠지를 국민들에게 묻겠다는 의중을 비치기 무섭게, 온두라스의 장군들과 사회 유력인사들은 발끈했다. 셀라야가 대통령직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구실을 대면서, 두 주요 정당의 대표들은 2009년 6월 29일 군사 쿠데타를 감행했다. 

몇 번의 말 돌리기 끝에 오바마 행정부는 결국 온두라스의 군사 쿠데타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셀라야 대통령의 온두라스 귀국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은 셀라야 대통령의 복권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쿠데타로 탄생한 정부가 관장하는 선거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많은 온두라스 국민들은 2009년 쿠데타 이후의 상황이 1980년대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낀다. 온두라스는 군부체제로 회귀하고 있다. 셀라야 대통령의 추방 이후 온두라스 전국에 배치된 군인들은 거의 매일 일어나는 쿠데타 반대시위 진압에 있어서 자유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2009년과 2013년의 부정선거로 집권당이 된 국민당은 온두라스 헌법을 무시하고 경찰의 업무를 군대에 넘겼다.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국회의장일 당시부터 새로운 친위대인 ‘공공질서를 위한 헌병대(PMOP)’의 법적 승인을 추진했는데,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그는 2014년에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공무원들이 통솔하고 미국이 교육을 담당하는 헌병대 ‘Tiger’를 창설했다.

온두라스의 재군국화와 동시에 온두라스 정부는 ‘Honduras is Open for Business’ 캠페인을 벌이면서 재벌 일가들과 해외 투자자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온두라스 정부는 또한 사회적 갈등의 위험을 잠재우기 위해 광업, 수력 발전, 농산물가공업, 관광업 등 인근 주민들에게 잠재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산업이 집중된 구역의 안보태세를 강화했다.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불법으로 추진됐다. 법적으로는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든지 그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지역 주민들과 사전 협의를 해야 하지만, 이 역시도 지켜지지 않았다. 인권수호단체들에 의하면, 온두라스군이 프로젝트 추진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민간 보안회사와 연합해 협박이나 심지어는 특정 인물을 겨냥한 살인계획 등이 종종 일어났다고 밝혔다.

30시간의 개표 오류, 뒤바뀐 대통령

그러나 미국의 입맛에 따라 세워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자금 유용이 자유자재로 이뤄지는 온두라스의 정치 시스템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2009년 군사 쿠데타에 항거하는 운동과 함께 설립된 새로운 정당 ‘자유와 재정립(LIBRE)’당은 양당 체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2013년 선거에서는 선거결과를 바꾸어 놓을 만큼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후보자와 유권자 18명 이상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LIBRE는 국회에 37석을 확보하면서 제2당 자리에 안착했다.

게다가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배임 스캔들이 끊임없이 터지고 에르난데스 대통령의 형제와 포르피리오 로보 전 대통령 등 정부 고관들까지 마약유통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온두라스 정부의 힘은 더욱 약화됐다. 2015년에는 부패 네트워크를 통해 축적된 자금이 에르난데스 대통령의 2013년 대선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온두라스 전역에서 거센 항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과 미주기구(OAS)의 중재에 힘입은 정치적 해결책이 마련되면서,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2015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 및 구금된 과테말라의 오토 페레스 몰리나 대통령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정부의 적법성을 한층 훼손하려는 듯, 온두라스 대법원은 2016년, 대통령의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이 인권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연임에 도전하려 한다는 이유로 셀라야 전 대통령이 실각한 지 7년 만에 나온 이 결정에, 온두라스 국민들은 분노하며 정부의 폭력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17년 11월 선거를 앞두고 LIBRE는 2개의 소규모 정당들과 함께 야당연합인 ‘독재반대연합‘을 결성했다. 중도파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야당연합은 살바도르 나스라야를 후보자로 내세웠다. 나스라야는 부정부패 척결을 지지하는 변호사이자 유명한 기자 겸 TV 진행자다. 러닝메이트는 사임한 셀라야 전 대통령의 부인인 시오마라 셀라야로 결정됐다.

TSE는 선거 당일 초저녁이면 중간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정이 넘도록 TSE는 침묵했고, 에르난데스와 나스라야는 서로 자신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TSE의 재판관 중 하나로 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마르코 라미로 로보가 후에 언론에 제보한 바에 의하면, 대선투표가 마감된 직후에 TSE의 기술팀은 개표가 57% 진행된 시점에서 나스라야의 당선이 확실하고 불가역적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과거 국민당 의원 출신이자 현 TSE의 책임자인 다비드 마타모로스는 몇 시간 동안 이 중간결과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국제사회의 눈초리와 로보 재판관의 압력 속에서 그는 결국 결과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은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TSE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던 개표상황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그때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가 30시간 동안이나 지속됐다. 로보는 마타모로스가 개표 과정 중단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TSE 사이트가 가까스로 정상으로 회복되자, 개표 초반에 에르난데스보다 5%p 앞서있던 나스라야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11월 30일, 결국 에르난데스 대통령이 나스라야 후보를 1.5%p 표차로 누르고 당선을 확정 지었다.

수만 명의 온두라스 국민들이 개표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답변을 내놓는 대신 야간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전국 곳곳에 군인과 경찰을 배치했다. 시위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최소 14명의 시위자들이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인권단체들은 전했다. 한편, 2013년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닫았던 미주기구(OAS)의 조사단은 놀랍게도 “두 후보 간의 근소한 표 차, 부정행위, 오류, 시스템적 문제로 인해 OAS 조사단은 이번 선거결과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OAS 측의 입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고 이틀 후, 미 국무부는 에르난데스 행정부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인권부문 발전과 부패 척결에 있어서 에르난데스의 노고를 인정하고 온두라스의 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한 수백만 달러의 추가 지원금 지급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10여 명의 시위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테구시갈파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은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해 인권수호자와 기타 소수 집단을 보호하려는 온두라스 정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또한 “선거 직후 발생한 인권유린 사건들을 면밀히 조사하려는 온두라스 정권의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야당연합과 자유당은 이번 선거의 무효화와 재선거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12월 9일 정오, 군인들이 여전히 거리에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을 때, TSE는 도심에 위치한 본사에서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OAS 대리인의 입회하에, 하지만 야권 인사는 불참한 상태로 재개표를 진행했다. 미국 대리 대사인 하이디 펄튼이 마이크를 잡고 선거 당국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고 온두라스 국민들이 선거의 공식결과를 수용해줄 것을 촉구하자, TSE의 책임자인 다비드 마타마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투표함 안에서 찾은 결과는, 선거일에 집계했던 결과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펄튼이 마무리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종결과가 온두라스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마타마로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글·알렉산더 메인 Alexander Main
워싱턴 DC 경제 및 정책 연구소(CEPR)의 정치 분석가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David Corn, <Negroponte: unfit to lead>, The Nation, 2005년 3월
(2)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