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2018-01-31     안치용 | 한국 CSR연구소장

내 이름을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창에 넣고 엔터키를 치면 3~4명이 뜬다. 두 곳 모두에서 두 번째에 내가 있다. ‘안치용’계의 ‘넘버 투’인 셈이다. 지명도로는 재미 블로거 안치용이 눈대중으로 나보다 서열이 높아 보이지만, 다음과 네이버는 그를 인물검색에 올려놓지 않았다(재미 블로거 안치용씨를 제외한 이유가 아마도 ‘제도권’ 위주로 인물 정보를 보여주는 포털의 관행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다. 내 아이는 어렸을 때 야구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구단을 물으면, 아버지가 듣기에 좋으라고 그랬는지 SK를 댔다. ‘안치용’계 부동의 ‘넘버 원’인 야구선수 안치용이 당시 SK와이번스에서 현역으로 맹활약 중이었다. “아빠의 동명이인이 있는 팀을 좋아한다”는 아이의 사탕발림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고, 아버지 노릇하느라 나는 아이 손을 잡고 평생 가보지 않은 야구장을 기꺼이 찾았다.

“평생 가보지 않았다”에는 약간의 주석이 필요한데, 대학 재학 중 연고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간 적이 있다. 떠들썩한 응원전으로 연고전의 관중은 기본적으로 경기에 집중하기 힘들지만, 응원전이 아니었어도 그때 야구를 보지 않았을 게 확실하다. 그때 연고전에 참가한 주요 목적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외에 경기 후에 벌어질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었기에, 결론적으로 내 인생에서 야구를 보기 위한 첫 야구장 행은 아이 손을 잡고 간 것이 맞다.

그날 우리는 야구 구경과 주전부리 외에 약간의 추가적 호사를 누렸는데, 경기 시작 전에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사 입었다. 아이와 나는 각각 정우람과 안치용(야구선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샀다. 주변의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동시에 내 유니폼을 산 것이기도 했다. 

86세대의 집단적 훈장? 

영화 <1987>은 1987년 민주화 운동 30주년에 맞춰 2017년 12월에 개봉됐다. 보통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니, 1987년에 아스팔트에 있던 청춘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장년이 돼 영화 <1987>을 관람했다. 
이 영화에 대해 86세대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우현 씨 같은 당시 역사의 실재인물이 영화에 출연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제 갓 30년이 지나 사실상 현재의 역사이기에, <1987>은 한국인 모두의 개인사와 겹쳐진다. 2018년의 한국인은 모두 그날의 아스팔트에 서서 눈물을 쏟았거나, 그런 부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사나 칼럼 등 제도권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등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소회 혹은 회상이 봇물을 이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런 현상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거창한 회한이 있다거나 존엄한 결벽증이 있어서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보지 않은, 보고 싶지 않은 영화) 다큐멘터리 <김광석>의 포스터에 김광석 대신 감독 이상호가 떡 하고 자리 잡은 걸 본 심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물론 정확하게 일치하는 심정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김광석>과는 다른,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에서 나는 영화 <1987>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로 하면서 영화를 봤고, 나도 남들처럼 1987년에 얹힌, 운동권의 변두리를 맴돈 개인사 일부를 무람없이 풀어내고자 한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많은 연세대생이 참가한 그 날 집회에 알려진 대로 이한열이 있었고, 나도 있었다. 화염병이나 돌을 잘 던지는 용맹한 청년은 앞쪽에 포진하고, 나같이 던지기를 잘 못하고 겁이 많은 이는 뒤쪽 본대에 자리를 잡는다.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최루탄 지랄탄을 일제히 발사하며 백골단을 필두로 경찰이 시위대로 돌격해 들어오는 순간,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 거의 대부분은 학교 건물 안으로 도망친다. 이후 경찰이 퇴각하면 다시 대오를 정비해 시위를 재개하는 게 대학가 시위의 기본적 양상이었다. 

이때 본대에 속해 있으면 경찰의 진입으로 대열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약간의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백골단과 전경이 뛰어오는 방향을 가늠하며 후퇴해야 하기에 처음에는 뿌연 최루탄 사이로 전방을 주시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급박해지면 몸을 돌려 전력으로 달아난다. 내 기억 속에는 내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전에 저만치, 저 앞에서 이한열이 쓰러지는 모습이 들어있다. 기억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게 늘 재구성되는 까닭에 사실(史實)로 확인된 이종창 파주가람도서관 관장과 달리 사건 이후에 내가 기억을 조립해 냈을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이렇다. 이한열과 다른 학생들이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전두환의 호헌선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는 것. 그 현장에서 이한열은 SY-44에 머리를 맞아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숨졌으며, 나는 그 현장에 있던 다른 청년들처럼 이한열의 죽음을 애도하고 폭력경찰을 규탄하고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이후 세월이 흘러 스크린 속에서 강동원이 이한열로 나와 그날의 모습 그대로 SY-44직격탄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아이와 함께 봤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나 역시 영화를 보며 1987년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날 시위대의 몇 번째 줄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화 속의 강동원(이한열)이 가입해 활동한 동아리 ‘만화사랑’이 내 동아리방과 함께 학생회관 3층에 있었으며 이한열의 공간과 나의 공간이 지근거리에 위치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분명히 학생회관에서 수없이 마주쳤을 한열을,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기억이 안타깝게도 나에겐 부재하다. 그 현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의 죽음만을 기억하고, 그의 스러짐을 기억한다. 나의 박제된 기억은 역설적으로 <1987>의 강동원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예상대로 나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주변이 환해진 다음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1987> 앞에서 흘린 눈물이 값싼 눈물이라고 자책하지는 않지만, 가슴 벅찬 자랑스러운 낙루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1987>은 기본적으로 극영화이지만 당대의 역사, 거대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SK와이번스의 안치용 선수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이중성과 비슷하다고 할까.

<1987>을 정치사 등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죽음과 희생을 넘어선 인간 실존과 존엄의 구현이란 의의를 빼놓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당대를, 사건을 공유한 86세대는 살아남은 자로서 그 죽음들의 무게를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박종철이 목숨을 내어놓으며 지키고자 했던 박종운처럼, 그 정도로 극적이진 않더라도 1987년의 청춘은 이제 나이를 먹었고, 마침내 원숙해졌다. 

그 원숙함으로 86세대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1987년을 볼 수 있게 됐을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종철이가 살아 있었다면 나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는 것이 현재의 민주화투쟁이다”(박종운)라고 말할 정도의 ‘객관성’까지는 아니어도 적지 않은 86세대가 모종의 객관성에 입각해 주관적으로 1987년을 소비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 또는 논리에 입각해서도 소비될 수 없는, 소비돼서는 안 되는 사안이란 게 존재한다. 예컨대 숭고한 신념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죽음과 희생은 값싼 한담과 과장된 무용담의 소재가 돼서는 안 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박종철의 죽음을 팔아먹었다며 많은 사람이 박종운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1987년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최루탄에 범벅이 돼 함께 민주주의를 외쳤던, 이제 영원한 젊은이로 표상된 그들을 저렴하게 소비하는 행위를 그날에 남아버린 그들과 그날의 우리 젊음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한다면 역으로 엄숙주의라고 비난을 사게 될까.

살아남은 자들은, 그날들에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하고 다만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작은 기여를 빌미로 타인의 크고 숭고한 공헌의 값을 자기 앞으로 받아내는 행위는 올바르지 않다. 타인의 죽음이 자신의 훈장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승리하지 않았고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기억법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영화 <1987>을 간단하게 “정치적인 삼류 쓰레기 영화”라거나 “아무 의식 없이 과거 아픈 역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앞으로 나에게 이한열이 강동원으로 기억된다고 해도 이한열에게 누가 되지는 않지 않겠는가. 

문제는 ‘1987’이 정치적으로 일상적으로 판매되고 소비되는 행태다. 그것도 특별히 86세대가 언필칭 원숙함에 기대, 그 사건을 팔아먹고 소비한다면, 사자(死者)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금도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닐까. 예를 들자면, 앞서 말한 대로 영화 <김광석>을 보지 않았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외국인 같이 김광석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그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이상호를 김광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런 유형의 포스터를 보게 되면 나 같은 사람은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를 혐오하게 된다(물론 이 글 또한 그런 소비일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자세나 태도, 금도는 부차적인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1987년에 승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원숙해진 86세대는 ‘1987’에게서 훈장을 받아내려고 애쓸 게 아니라 오히려 부채의식을 지녀야 한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은 우리에게 이른바 민주주의를 가져다줬지만, 주지하듯 그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배신하고 있다. 1987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한 86세대는 현존하는 극심한 불평등과 금권의 횡포, 그리고 출구 없는 절망에 대해, 86세대가 젊었을 때와 달리 지금 젊은 세대가 86세대를 포함한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한 1987체제가 출범할 때 자신들이 미욱한 대학생에 불과했다고 변명한다고 해서 책임이 모면되지 않는다. 

86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1987’의 개선장군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1987’에서 우리는 일부 승리했지만 많이 패배했다. 승리는 죽어가고 희생한 그들의 몫이지만, 패배는 온전히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다.  

촛불혁명이란 역사는 ‘1987’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이 촛불혁명에 의해 완성됐다기보다는 1987년의 패배를 촛불이 설욕해 바야흐로 이제 막 지난한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봐야 한다. 86세대는 적폐청산의 도도한 기세에 편승해 있지만, 그들 또한 그 적폐를 만들었고 어느 사이 그 일부가 됐음을 자각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1987’이 소비되지 않고 계승돼야 하는 이유다.

영화 <1987>의 영어 제목은 “1987: When the Day Comes”이다. 영화의 대미에 나를 포함해 86세대가 수도 없이 목 놓아 불렀던 ‘그날이 오면’이 흘러나온다. 늙어가기 시작하는 86세대가 그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누구나 짐작하듯 그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1987>은 영화 자체로는 감동을 주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날은 오지 않았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