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 <꽃파는 처녀>, 눈물 없이 볼 순 없다지….
2018-01-31 정민아 | 성결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더불어,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이 이끄는 북한예술단의 공연이 성대하게 이뤄질 예정이어서 북한예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문화예술을 쉽게 이해함에 있어, 정민아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는 유튜브에서 비교적 접하기 쉬운 북한영화 <꽃파는 처녀>를 추천하며, “북한영화가 북한체제나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고, 다름을 인정하며 그들의 영화를 바라보길 바란다”고 말한다.
한때 ‘조류(朝流)’가 있었다. 문화혁명 시기(1966~1976) 중국 대륙에서는 ‘조류’가 판을 쳤다고 한다. 이른바 조선(북한)의 물결이었다. 그 중심에 영화 <꽃파는 처녀>와 주연배우 홍영희가 있었다. 이 영화는 문화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에서 1972년에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흥행작이었다. 홍영희는 국내 배우 이영애가 현재 누리는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2009년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홍영희가 그에게 직접 꽃다발을 건넸다. 얼마 전 스리랑카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 공식 만찬에 스리랑카 자국 내에서 <대장금>으로 인기절정이던 이영애가 초청받은 것과 비슷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1972년 냉전 시대 당시 사회주의권의 대표적인 영화제로 명성이 드높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칸, 베를린, 베니스 3대 영화제에 모스크바와 카를로비바리를 더해 세계 5대 국제영화제로 보기도 한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난 후 체코는 1994년부터 이 영화제를 새롭게 혁신해 탄탄하고 내실 있게 잘 유지함으로써 지금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2000년에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 <박하사탕>보다 28년 전 수상한 <꽃파는 처녀>가 궁금해질 수밖에.
그럼, 이 영화에 대해 알아보자.
제작국: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제작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각색: 백두산창작단
제작년도: 1972년
러닝타임: 130분
연출: 박학, 최익규
촬영: 박병수, 리희성
작곡: 성동춘
주연: 홍영희, 박화성, 김룡남, 류후남
<꽃파는 처녀>의 탄생 비화
1930년 가을 만주에서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행사를 계기로 김일성이 창작, 공연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이후 김정일의 주도로 1972년에 혁명영화 및 ‘피바다’식 혁명가극으로 만들어졌으며, 1977년에는 장편소설로 재창작됐다. <꽃파는 처녀>는 북한이 자랑하는 항일혁명문학예술의 대표작으로서 <피바다>와 <한 자위단원의 운명>과 함께 3대 혁명 대작으로 꼽힌다. 영화와 가극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쉽고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영화 내용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꽃분이가 식민지 모순을 깨닫고 혁명적 세계관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꽃분이는 조선의 농촌에서 가난한 머슴 집안의 순박한 처녀로서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낮에는 지주의 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꽃을 팔면서 살아간다. 꽃분이네는 가난 때문에 고통을 겪고, 지주와는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다가 엄마의 죽음과 어린 막내 여동생의 실명이라는 끔찍한 슬픔을 겪는데, 꽃분이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 오빠를 통해, 투쟁을 통해서만 계급 모순이 가져오는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혁명전사로 거듭난다.
전형적인 신파영화다. ‘신파적’이라 함은 촌스럽다, 세련되지 못하다, 시대착오적이다, 지나치게 과장되다, 최루성이다 등등 부정적인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데, 우리도 신파영화를 꽤나 좋아한다. 한국영화 황금기였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이 대표적 신파영화이며, 옛날 영화뿐만 아니라 최근 상업영화들 중 ‘코미디’, ‘가족’, ‘눈물’은 흥행의 삼박자 보증수표라고도 하며 ‘신파적’이라고 조롱 받기도 한다. 신파라 함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주제나 내용 면에서 권선징악을 지향한다. 여기서 주인공의 비극에 접근하는 방식은 운명론적 시각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게 한다.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감상에 비중을 둬 과장된 감상주의로 연출을 하거나 배우들의 과장된 대사, 몸짓 연기에 의지한다. 이런 신파적 요소들은 일제강점기 시기와 해방 이후 절대다수가 빈곤층을 형성했던 민중의 정서에 크게 호소하면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위기나 혼란의 시기에 신파가 대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영화적 효과다. 박정희 정권의 억압이 거세지던 1960년대 후반의 <미워도 다시 한번>류, IMF 직후 1990년대 후반 <편지>류, 2010년대 초중반 보수정권 시기 <히말라야>류, 이 영화들은 ‘신파멜로’라는 눈물 반 비아냥 반의 평가를 받는다.
<꽃파는 소녀>가 만들어진 1972년 남한에서는 김기영 연출, 윤여정, 남궁원, 전계현 주연의 <충녀>가 최고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1960년대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결실을 보던 197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장르로 만개할 때이자 정부의 검열을 피해 에로티시즘으로 방향을 틀던 시기다. 이 시기에 탄생한, 엉뚱한 거장 김기영의 역작인 <충녀>는 멜로에 스릴러를 가미한 형식의 장르영화로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자본주의 비판이 어우러진 놀라운 상업영화다.
신파, 그리고 컬트
남북한의 GDP가 크로스 되던 1972년, 북한영화는 여전히 신파적 관행에 따라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지주들을 때려잡는 클라이맥스 장면 이후 혁명정신으로 각성한 꽃분이의 얼굴 클로즈업, 혁명단의 리더가 된 오빠가 마을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 이후 오빠의 민중교육 장면과 여전히 꽃을 팔고 있지만 행복한 꽃분이의 얼굴 위로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깔리면 과잉된 신파 정서는 정점에 다다른다. 이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퉁퉁 부은 얼굴로 극장 문을 나섰다고 한다. 그러면서 더욱 열심히 혁명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45년이 지난 후 필자에게 이 영화는 컬트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집중하고 보려고 해도 지루하다. 그리고 온통 비극의 연속이다. 꽃분이는 어쩜 이리도 내내 가련하고 불쌍하기만 할까. ‘꽃 사시오 꽃 사시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주제곡 <꽃파는 처녀>와 삽입곡 <혁명의 꽃 씨앗을 뿌려간다네>와 <도라지>는 북한의 히트작이건만, 지루한 데다가,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 난관이 중첩되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생활, 상반되는 두 집단의 대립, 감정적 증폭,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시청각 장치들로 인해 서사에의 몰입이나 캐릭터에의 동화와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신파적 요소들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은근히 이질적인 북한영화를 즐기게 된다. 동구권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극장 밖에는 손수건을 파는 노점상으로 즐비했다는 중국 극장가 풍경을 상상한다면, 이 영화를 한번 감상하는 정도는 인생에서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영화를 본다고 혁명의식이 고취되거나 공산주의자로 거듭날 일은 없을 것이다. 1990년대 대학가에서 ‘북한 바로 보기’의 일환으로 이 영화를 총학 주최로 상영하고, 교문 밖에는 전경들이 쫙 깔려 최루탄을 쏘던 풍경은 역사의 아이러니나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겨놓자.
박학과 홍영희, 그리고 집단창작체제
연출자인 박학은 배우 출신으로, 그는 2015년 필름이 발굴된 이규환 감독의 <해연>에서 해방 후 최고의 스타가 됐던 조미령과 함께 연기했다. 1947년 제작되고 1948년 <해연>의 개봉이 한창인 때 박학은 북으로 갔다. <해연>이 개봉하자마자 상영금지가 된 이유가 아마도 배우들의 대거 월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박학은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1949)의 주연으로 활약하며 여러 편의 영화와 연극에서 주역을 맡아 스타가 됐다. 이후 1961년 <분계선 마을에서>로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꽃파는 처녀> 이후 북한영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감독이 됐다. 그는 그 공으로 김일성상 계관인이자 인민배우 칭호를 부여받았다.
당시 18세에 파격적으로 주연으로 발탁된 홍영희는 김정일이 직접 발굴한 배우로, 1976년 1원짜리 지폐 뒷면 도안과 1992년 1원짜리 지폐 앞면 도안에 등장한 얼굴의 주인공이다. 공장 선반공에서 스타로 인생역전을 한 1955년생 홍영희는 이후에도 비극적인 배역을 많이 해 ‘울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둥실둥실하고 귀여운 얼굴의 그는 1974년에 공훈 배우가 됐고, 1980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바보들의 행진>의 이영옥이 1955년생이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밋거리다. 통통 튀는 소녀 감수성의 사랑스러운 대학생 이영옥 대 애처롭고 가련한 거리의 소녀 홍영희. 두 대표 여배우는 남북한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벌어지는 시대의 상징 같아 보인다. 각 예술 장르로 재창작된 <꽃파는 처녀>는 집단창작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백두산창작집단이 이야기 각색과 프로듀싱을 했으며, 이런 창작방식은 개인창작의 예술성보다 집체창작을 더 강조하는 주체문예이론에서 비롯된다. 백두산창작단은 김일성과 김일성 가계 인물들의 일대기와 관련한 영화만을 전문으로 창작하는 영화창작집단으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과 속도전의 혁명적 방침을 구현해 ‘백두산창작단의 일솜씨’라는 새로운 공산주의적 창작기풍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꽃파는 처녀>는 사상성과 예술성을 조화시킨 역작으로, 각 예술 부문에서 주체문예사상의 모범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작품을 만든 과정, 영화가 담고 있는 서사와 주제, 그리고 대중적인 전파력까지 <꽃파는 처녀>는 사상성과 예술성, 대중성이 완벽하게 조화된 주체예술의 걸작으로 인정을 받았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 꽃분이를 본받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1973년 초부터 ‘꽃파는 처녀 근위대원’이 각 생산단위에 조직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정일은 주제곡 <꽃파는 처녀>를 교향곡으로 창작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북한영화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린 작품이자, 국제적인 인지도가 가장 높은 영화, 주체사상의 원리를 구현한 영화이며 대중적인 눈물의 신파영화 <꽃파는 처녀>의 성공 이후,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을 1973년에 발표하며 “로동계급의 당이 새로운 문학예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모든 문제를 주체의 요구에 맞게 풀어나가야 한다”고 훈령을 내렸다. 북한영화가 북한체제나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고 다름을 인정하며 그들의 영화를 조금은 귀여운 시선으로 볼 때, 남북한 문화교류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또 다른 순진한 생각을 해본다.
글·정민아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편집이사, 서울시 독립영화 공공상영회 배급위원, EBS-TV 영화프로그램 자문위원, 영화전문 사이트 <익스트림무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신문과 잡지에 영화평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