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철학자 공자>를 루이 14세에게 바친 이유는?

문명교류의 비밀 텍스트(5)

2018-01-31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예수회 선교사 쿠플레(Ph. Couplet, 1623~1693)가 루이 14세(이하 루이)에게 <중국인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1687)>를 바치면서 올린 <헌정서신>에서 한 말이다.


“생각하옵건대, 공자는 궁전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입구에 우뚝 서서 놀랄 것이고 희열에 잠길 것입니다. 그토록 갈망해왔던 대왕(루이 14세)을 발견하고 대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보기를 열망했던 이를 봤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 뛰어난 공자도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던 바의 그런 황제를, 자신의 서책에서 윤곽을 잡아놓았던 저 탁월한 황제를, 또한 공자 자신이 그토록 간구한 바에 걸맞은 그런 이를 선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국의 모든 재능 있는 이들이 그 한 사람만을 우러러보고, 누구나 모든 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절대적인 형상(形相)이자 모형(模型)으로 내세울 그런 군주를 말입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대기인(待其人)”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이 말은 “기다리던 바로 그분”을 뜻합니다. 이 분은 언젠가 나타나실 것이고 신적이고 경이로운 지혜를 타고나셨으며, 자기 자신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성군을 가리킨다 하옵니다.”(<헌정서신>)

쿠플레는 루이를 ‘대기인’이라고 예찬한다. 다시 말해 간절하게 기다렸던 그 분이 바로 루이라는 것이다. ‘대기인’ 루이의 모습은 <역경>의 겸(謙)괘에 묘사된 이상적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두 가지를 말하겠다. 하나는 쿠플레가 겸괘에 나타난 이상적 통치자의 모습이 이후 전개될 18세기 서양의 계몽군주의 모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상적 통치자론이 실은 서양의 절대군주론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플레가 <중국인철학자 공자>를 통해서 전한 동양의 이상적 통치자는 계몽군주에 가까울까? 아니면 절대군주에 가까울까? 답은 전자다. 다음은 <중국인철학자 공자>의 서문에 실린 겸괘에 대한 해명이다.

“마침내 주공이 상육(上六,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여섯 번째)의 효(爻)을 풀이한다. ‘이 효는 사적인 관점에서 왕의 겸손이 얼마나 크게 빛나고 얼마나 널리 칭송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발휘하는 효력과 관련해서, 겸은 좁은 영역에 닫혀있는 제한적인 힘을 뜻한다. 사적인 영역에, 그리고 제한적인 권력에 머물러야 한다(효의 선분이 둘로 나누어져 있음은 능력(권력)의 한계와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경계가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늘이 왕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려주지 않았다. 이는 오로지 황제(皇帝)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자원은 물론 영토와 신하와 백성의 수가 이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갖춰질 때 황제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일로 말미암아 군대를 일으키고 군사를 움직이려는 자는 반란을 도모하는 자를 깨부수는 정도에서 그 생각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가 미치는 경계 내에서만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그 통치의 권한은 왕국 안에 머물러야 한다.’”

주공의 풀이와 설명에 공자가 이렇게 덧붙였다.

‘상육(上六)의 풀이는 이렇다. 한편으로 덕의 큼을 말한다. 또한 덕에 못지않게 명성도 크다. 하지만 최고의 지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조건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는 대업과 위업을 생각하지만, 이를 완수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왕은 단지 이 정도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군대와 무력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 경우, 자신의 지위와 통치 안에 자신의 백성이 머물도록 군대의 힘을 이용하는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중국인철학자 공자> 서문)

오해를 피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철학자 공자>에 실린 <서문>을 쓴 이는 인토르체타(Pros.Intorcetta, 1626~1696)이고, 이 책의 제일 앞부분에 실린 <헌정서신>의 지은이는 쿠플레임을 밝힌다. 둘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요컨대, 인토르체타는 개인의 수양에 중심을 뒀던 반면, 쿠플레는 통치자의 교육에 방점을 찍었다.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는 쿠플레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어떤 용도로 활용했는지를 살펴본다. 핵심부터 말하겠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왕도 인간인 한, 하늘의 뜻을 겸손하게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쿠플레가 겸괘의 번역을 통해서 루이에게 전했던 메시지였다.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종교(혹은 교회)보다 더 오래된 것일 수는 없다고 저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는 생각했습니다. 이는, 그가 오로지 본성과 이성의 빛을 통해서 스스로 깨우친 통찰입니다. 그 자신이 세운 학문과 학설은 이 하나의 통찰을 겨냥해 세워진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인간들이 삶 전체를 하늘의 뜻(天命)을 바탕에 둔 법률과 법칙에 따라 이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헌정서신>)

루이에게 그리스도와 종교에의 겸손을 강조한다. 공자의 목소리를 빌어 아무리 왕이라도 겸손하게 하늘을 받들라고 권한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몽군주가 되게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은 과연 이뤄졌을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루이가 계몽군주가 아닌 절대군주의 길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루이가 라틴어로 번역된 겸괘를 읽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루이는 겸괘의 상육 효에 대한 주해에서 공자의 풀이가 아니라, “하늘이 그(제후국의 왕)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려주지 않았고, 이는 오로지 (천자인) 황제에게만 해당한 것이다”라는 주공(문왕과 <주역>을 공동주해)의 황제에 대한 풀이에 더 심취했었을 것이다. 루이는 결국 절대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는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그의 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쿠플레가 출판한 <중국인철학자 공자>는 계몽군주의 염원을 담은 문헌이다. 왜 하필 <역경>이고, 왜 하필 겸 괘일까? 답은 이렇다. 만일 쿠플레의 바람이 단지 루이가 계몽군주가 되는 것뿐이었다면, 쿠플레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논의를 전하는 <대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쿠플레의 또 다른 염원이 숨어있었다. 루이가 그리스도에 순종하며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는 성인군주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까닭에 공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더 우선되지도 더 중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 왕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라 공자가 누차 말하곤 했던 이방(異邦)의 교리와 이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만큼 말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그의 일갈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중국인들의 입에서도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호이단(攻乎異端)’ 이는 ‘이단의 학설을 공격하라’는 뜻입니다. 전하, 법률의 도움으로 이 시대가 가장 융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교회를 보호하고 육성하며 이단을 박멸하고 경건을 선양하기 위한 전하의 노력 덕분이옵니다. 전하의 이런 노력이 경건을 그토록 사랑했던 공자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은 지당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도대체 공자가 어떤 말로 전하를 예찬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조상대대로의 신의와 가장 융성했던 왕국에 가장 치명적인 이단이 박살되고 박멸된 것을 살펴본다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 깊숙하게 뿌리내린 것으로 보였던 규율들은 금지됐고, 사원들은 폐쇄됐으며, 이름 자체가 이미 땅속으로 깊이 묻힌 지 오래됐고, 수많은 영혼들이 그 옛날의 잘못된 길에서 옳은 길로, 파멸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돼 더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과 더는 부릴 수 없는 힘과 더는 구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결론적으로 가장 위대하시고 진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이 가장 깊으신 전하의 영도를 받아서 온 갈리아(Gallia)가 하나 돼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심이 가장 깊은 나라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단의 박멸에 대한 언급은 앙리 4세가 1598년에 위그노 교도에게 조건부로 허용한 낭트칙령을 루이 14세가 1685년에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신교를 박해한 사건을 가리킨다. 루이가 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박해한 조치가 옳은 결정이었다는 점을 공자의 ‘공호이단(攻乎異端)’ 주장을 내세워 지지하고 있다. 쿠플레가 <역경>을 활용하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서 해명된다. 루이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군주”가 되기를 쿠플레의 염원에 가장 들어맞는 텍스트가 하늘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라는 겸괘였기에. 참고로, <대학>에는 ‘겸’자가 한번 나온다. 그런데 맥락상 ‘겸손하다’가 아닌 ‘만족스럽다(慊, satisfacere)’나 ‘즐겁다(快, delectare)’의 의미로 사용된다. 라틴어 번역은 이렇게 돼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의 의지를 거짓과 속임수로부터 깨끗이 하는 것이다. 진실로 악과 흠을 물리치는 것이다. 어떤 이가 악취 나는 것을 싫어하고, 진실로 좋고 명예로운 것에 기뻐하고 감동하듯이, 마치 아름답고 멋있는 것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듯이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자기 혹은 자신에게 자족적인 사람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라틴어 <중용> 성의: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慊]故, 君子必愼其獨也.)

만약 순수하게 동양학문의 진수를 소개하는 것이 <중국인 철학자 공자> 출판의 목적이었다면, <역경>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괘로 겸괘가 아닌 다른 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중국의 유학자들은 ‘복(復)’괘를 선호했다. 복은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復, 其見天地之心乎)”는 괘이기에. 음효 5개가 위에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맨 밑에서 양효가 솟아나고 있기에. 인간이 어두운 현재의 마음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형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쿠플레가 겸괘를 활용하려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역경>의 겸괘 주해를 통해 루이 14세가 그리스도의 겸손한 계몽군주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왕권의 견제가 바로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루이의 권력은 이미 교황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루이가 부렸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어해줄 수 있는 장치, 다시 말해 군주보다 상위의 위치에서 왕권을 견제하는 어떤 존재가 요청됐다. 그 존재가 천주(天主)였다. 이와 관련해서 군주를 견제할 상급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실은 동양의 성리학자들의 주요 담론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주희 이후의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보편의 심급에 자리한 개념인 리(理)가 단지 개념에 불과하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물음을 제기했고, 이와 관련해 갑론을박의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리의 개념만으로는 왕이나 황제로 하여금 하늘(天)을 두려워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리에 대한 담론은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도 자주 활용됐다. 이익(李瀷, 1681∼1763)이 대표적이다. 그는 리에 능동성을 부여한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리를 상제(上帝)의 지위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리를 폐기하고, 그 자리에 상제를 놓는다. 이와 같은 리에 대한 담론에서 벌어진 모든 논쟁들은 하늘을 능동적인 주재자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던 셈이다. 이런 노력 가운데에서 특히 리의 자리에 상제를 놓는 다산의 시도가 흥미롭다. 쿠플레도 이와 유사하게 동양의 리의 자리에 “천주(Dominus)”를 올려놓는다. 

한편, <중국인철학자 공자>가 유럽의 무대에 등장했던 시기의 유럽에서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권신수설의 기원은, 다시 말해서 신이 교회에 종교적 권력을 부여한 것처럼 통치자에게는 세속적 권력을 줬다는 생각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17세기에 들어와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된다. 이를테면, 국가는 하나의 가정이며 왕은 아버지라고 주장했지만, 성서를 해석하면서 인류 최초의 왕은 아담이고 찰스 1세는 아담의 상속자로서 영국을 통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영국 왕당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 1588~1653)가 <부권론(Patriarcha)>(1648)으로 체계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새로이 권좌에 오른 17세기 유럽의 왕들은 국사(國事)는 물론 교회 문제에서도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영국의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그는 실은 왕권신수설의 제창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왕권신수설은 영국에서는 그 위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그 위력이 지속됐다. 요컨대,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 1627~1704) 주교와 같은 이들이 나서서 왕의 인격과 권위는 신성하며 왕의 권한은 아버지의 권한을 본보기로 한 것이고, 왕의 권력은 신에서 나온 것이므로 절대적이며, 왕은 이성의 지배를 받기에 절대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리(理)개념과 이성(Raison) 개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비교 연구가 요청되며, 보쉬에가 강조하는 이성은 왕에게 절대적 권위와 그 통치의 정당화에 이용되지만, 동양의 유학자들은 리를 왕의 절대적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아마도 보쉬에와 같은 왕당파의 주장이 루이 14세를 단지 계몽군주에 머물지 않고 절대군주로 나아가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물론, 쿠플레가 일정 정도 보쉬에의 영향과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보쉬에의 <신정론(神政論)(Politique tirée de l'Écriture sainte)>이 출판된 해는 1709년이지만, 처음 연설된 해는 1679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진술했듯이, <중국인철학자 공자>를 통해서 쿠플레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오히려 이성의 소유자이기에 모든 통치가 정당화되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리 앞에는 겸손한 계몽군주였을 것이다. 물론, 쿠플레는 리의 자리에 천주를 놓았다. 따라서 쿠플레의 소위 ‘계몽군주론’은 보쉬에의 ‘절대군주론’과는 대비되고, 따라서 쿠플레의 <중국인철학자 공자>에서 전개하는 계몽군주의 모델은 보시에의 절대군주론이 아니었다. 또한, <중국인 철학자 공자>가 출판됐던 17세기 말엽의 서양의 출판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서양에서는 <중국인철학자 공자>와는 내용적으로 정반대의 성격을 띤 문헌들이 인기가 높았다. 

우선, 17세기 영국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와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또한,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시민정부에 대한 제일고찰(First Treatise of Civil Government)>(1689)이 언급돼야 한다. 이 책은 절대군주론을 시민정부론으로 반박하는 문헌이기에. 결정적으로 마키아벨리 <군주론(Il Principe)>도 포함돼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 민주주의나 로마 공화정에 대한 논의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물론,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이상적인 황제로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서기 121~180)를 예찬했다. 그런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아우렐리우스는 통치자라기보다는 철학자였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볼테르(Voltaire, 1694-1778)와 같은 사상가는 아우렐리우스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선호했을 것이다. 강력한 군주의 등장에 대한 염원에서 말이다. 

이는 볼테르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확인된다. 이 저술은 1764년 출판됐다. 이 작품도 <중국인 철학자 공자> 이후의 것이다. 볼테르가 이런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제공한 작품이 <중국인철학자 공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볼테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이랬을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강희제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서양에서도 나오길 바랐으며, 단지 동양의 황제에 비견되는 군주가 아니라, 동양을 뛰어넘어 세계를 정복하는 군주가 다시 나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명실공히 유라시아 세계를 정복한 왕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동양에 대한 대결의식 혹은 정복야욕이 드러난다 하겠다. 서양의 제국주의를 불 지피는 부싯돌의 역할을 한 문헌이 <중국인 철학자 공자>였던 셈이다.  

끝으로 쿠플레가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통해서 전하려 했던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설득방식에도 눈길이 간다. 조선의 유학자 이이가 선조(宣祖)에게 바친 <성학집요>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하기에 그렇다. 예컨대 율곡도 선조가 몇백 년 만에 태어난 보기 드문 성군이고, 따라서 성군으로서 올바른 도를 사회에 구현해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가 수기와 치인의 학문인 성리학을 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선조를 성왕으로 예찬하면서, 속으로는 선조를 성리학적 인간, 즉 리의 법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공적 존재’로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특히 율곡이 조선판 <대학>을 편집해 선조에게 바친 것도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론적 전제이자 수양방법으로 활용하도록 만들기 위함 때문이었다. 

물론 쿠플레가 율곡의 <성학집요>를 읽었을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쿠플레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해 종교-정치적으로 통합된 지상 세계를 염원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설득구조가 율곡의 그것과 흡사하다. 물론 율곡이 선조가 삼강령 팔조목의 훈련을 통해 성리학적 보편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성인군주가 되기를 설득했던 반면, 쿠플레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겸 괘의 주해를 통해 루이가 천주에 순종하고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는 계몽군주가 되기를 염원했다. 이것이 쿠플레가 동양의 관점에서는 성인군주, 즉 서양의 관점에서 계몽군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루이에게 <중국인철학자 공자>를 헌정한 이유였다. 천주에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한 근거를 <역경>의 겸 괘에서 끌어와 루이를 설득하려 했던 쿠플레의 시도는 그 자체로 진기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글·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에서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엔 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키케로의 <수사학>(2006), <Hagiographica Coreana 2> (2012), <인문의 재발견>(2014),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공저, 2016) 등의 저술과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2016), <서양고전문헌학과 동양고전문헌학의 만남> (2017)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