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 무너져도 유럽은 남는다

[Horizon]

2010-06-07     아크람 벨카이드

“유로가 실패하면 유럽도 무너진다.” 지난 5월 13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우려를 표명했다. 유로 도입 11년, 유럽중앙은행은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기존 원칙까지 포기해야 했다. 유로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기대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그 논리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마터면 유로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사라질 뻔했다.” 유럽연합(EU) 한 고위 관리(1)의 말이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의 충격에서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유럽을 포함한 금융계 전체는 또 한 번 최악의 사태를 맞을 뻔했다. 지난 5월 7일 금요일,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의 국가 부채에 집중된 투기꾼의 공격은 연쇄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었다. “주가지수가 모두 곤두박질쳤다. 상당수 국가에서 채권금리가 급등하고 은행 간 시장이 긴장했다. 2008년 가을 위기 직전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한 형국이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장관의 말이다.(2)

‘검은 금요일’이 지나가고, 유럽 지도자들은 7천억 유로에 달하는 ‘유럽연합 안정화 기금’을 마련해(정착하려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예산적자로 위기를 맞은 국가를 지원하기로 하는 등 유로화 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이로써 유럽 지도자들은 10년 넘게 유지해오던 주장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철회한 셈이다. 그동안 유로화의 생존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불온한 선동가, 유로를 얕잡아보는 미국인, 가령 밀턴 프리드먼이나 마틴 펠드슈타인과 한패라고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그 후 유로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EU의 한 고위 관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유로는 존속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발행되었다. 유럽 각국의 경쟁력, 국제수지와 무역수지, 인구 등의 차이를 관리·조절할 수 있는 유럽 차원의 거버넌스 없이 공동 통화를 발행한 것은 한마디로 경솔한 짓이었다”고 했다.

“유로존 무너진다, 유로화 수호하라”

유명 경제학자들이 유로존 붕괴 위험성을 경고하자 금융시장은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학 경제학 교수는 “그리스발 금융위기로 유로존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제 유로가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3) 독일 민간 경제연구소 IFO의 경제학자 클아우스 아버거는 “유럽이 2개 통화 지역으로 분리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쪽에는 강한 통화를 기반으로 하는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의 국가,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스페인, 경우에 따라서는 이탈리아와 같이 약한 통화를 필요로 하는 국가로 나뉠 수 있다”고 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피에르 베스피리니는 “현 상태로는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은 존속할 수 없으며, 차악의 선택은 독일이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이라고 했다.(4)

결국 누구도 유로존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한 유로는 도입 초기부터 하나 혹은 다수 국가가 유로존을 탈퇴하고자 할 경우 법 적용이 모호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스에 주재하는 한 프랑스 외교관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어떻게 탈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인 탈퇴 프로세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조차 드라크마(유로 이전의 그리스 화폐 단위-역자) 재도입에 대해 아무 대책이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단일통화 없으면 재앙이 오나?

어쨌든 유럽의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을(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배제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는 지난 11년간의 유럽 공동 통화와 제한적 경제정책에 대한 엄격한 평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로와 유럽안정화협약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마치 유럽의 종말을 선고하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유럽 통합과 단일 시장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율이 급등하고, 은행이 도산하고, 다시금 보호주의와 통화 간 경쟁이 득세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유럽 단일 통화 없이는 어떤 구원도 없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전 영국 유럽연합 장관 데니스 맥셰인은 “유로존이 해체되면 곧바로 유럽에 무역장벽이 재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탈리아의 올리브유 생산자는 그리스가 비싼 유로를 포기하고 더 싼 드라크마를 재도입할 경우 그리스 생산자가 얻게 될 엄청난 이익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국가가 기존 통화를 재도입하고 경쟁적으로 통화 가치를 절하할 경우 유럽 내에서 자유무역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5) 경제학자 파트릭 아르튀스는 유로존을 탈퇴하는 국가는 “곧바로 망하게 될 것”라고 경고한다. 10년 상환 3.80% 이율로 자본시장에서 돈을 꾼 스페인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는 “스페인이 기존 통화를 재도입하면 이율은 20%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한술 더 떠 “유로존이 사라지면 유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6)

이런 우려는 결코 우연히 제기된 것이 아니다. 우선 유로 통화 도입 단계에서부터 지배적이던 신념이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고, 심지어 맹목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차악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인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경제학자 미셸 아글리에타는 “그리스가 국내 경기 후퇴, 디플레이션 악순환, 유럽의 저조한 경제성장률 등을 혼자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고 가혹한 긴축만 강요한다면, 유럽은 시한폭탄을 안게 될 것이며 나중에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가 디폴트 선언, 구제자금 요청, 유럽경제통화동맹 탈퇴를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부채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편이 현명했다”고 말한다.(7)

재정 긴축 강요 위한 이데올로기

두 번째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로를 방어해야 한다”는 주장은 긴축재정 정책을 강요하기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가령 스페인은 올해 공무원 임금을 5% 삭감하고 2011년 임금과 퇴직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또한 퇴직으로 생긴 결원 10명 중 1명만 충원할 예정이다. 포르투갈은 2013년까지 공무원 임금을 동결하고 앞으로 4년간 공무원 인원을 7만3천 명 감축하기로 했다. 이탈리아도 비슷한 긴축안을 내놓았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헌법에 재정적자 감축 의무를 적시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위원회가 각국의 예산안을 국회 심의 전에 검토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유로 방어와 안정화 협약 수호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위기에도 유럽 지도자들은 공공지출 삭감, 구매력과 내수 억제를 내용으로 하는 독일식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국에 적용하기도 힘들 것이라 본다. 좀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금융 자본주의와 시장 자유화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한다는 것이다. 올해 6월 토론토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금융기관에 2007년 투입된 막대한 구제자금의 일부를 반환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그러나 윌스트리트와 런던 금융가의 군주들에게 금융규제와 새로운 성장모델에 관한 이야기가 먹힐 것 같지는 않다.

금융자본 손바닥 위 유럽중앙은행

은행은 이처럼 유로를 도구 삼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검은 금요일’을 전후한 상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은행의 전 수석경제학자는 “지난 금요일을 뒤흔든 폭풍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뿐 아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부채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할 경우 큰 타격을 받고 은행 간 거래가 불가능하게 될 것을 우려한 은행과 대규모 투자펀드가 물밑에서 준비해온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주말 동안 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마저 기존 원칙을 버리고 유로존 취약 국가의 공사채를 사들일 정도였다.(8) 은행 간 거래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조치였지만 독일에서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독일 연방은행이 2008년부터 800억 달러에 이르는 악성자산을 매입해온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처럼 악성부채를 끌어모아 ‘금융 쓰레기 하치장’이 되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지금까지 장클로드 트리셰가 이끄는 유럽중앙은행은 자신의 위상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장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회장의 측근들은 “유럽중앙은행은 지금까지 금리를 인하하고 인플레이션 억제보다는 성장 재고에 더 신경 써 달라는 정치인의 주문에 귀를 막아왔다. 그러나 은행의 압력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지난 5월 초 48개 금융기관이 유럽중앙은행과 유럽 각국 정부에 서한을 보내 국가 부채를 매입함으로써 은행 간 거래를 대신 맡아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러 달 전부터 유럽의 은행이 유럽중앙은행에 유동성 투입을 요청해온 상황에서 지난 5월 8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린 발표 내용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유럽 지도자들은 금융 거래소에서 은밀히 유로존 해체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애널리스트와 트레이더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파리의 한 은행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앞으로 금융위기가 또 한 번 찾아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두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혹은 유로존 해체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투자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과연 유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주요 저서로 <알제리를 향한 조용한 시선>(2005)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이 고위 관리는 대부분의 인터뷰 대상자와 마찬가지로 익명을 요구했다.
(2) <레제코>, 파리, 2010년 5월 11일자. ‘유로가 사라질 뻔한 날’, <르몽드>, 2010년 5월 18일자 참조.
(3) <CNBC> 2010년 5월 10일 방송. Joseph E. Stiglitz, ‘유로를 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가?’, <레제코>, 2010년 5월 10일자 참조.
(4) <르몽드 에코노미>, 2010년 5월 11일자. Henri Weber, ‘유로를 위한 세 개의 시나리오: 해체, 재도약, 현상 유지’, <르몽드>, 2010년 5월 12일자 참조.
(5) <뉴스위크>, 뉴욕, 2010년 5월 24일자.
(6) <르몽드>, 2010년 5월 16일자. <르피가로>, 파리, 2010년 5월 19일자 참조.
(7) ‘유럽의 장기적 위기’, <르몽드>, 2010년 5월 18일자.
(8) 5월 20일, 유럽중앙은행은 은행 간 시장에서 외면당한 165억 유로어치의 공사채를 매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