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시장을 물리칠 몇 가지 방법

[Horizon]

2010-06-07     제임스 K. 갤브레이스

유럽 각국 정부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긴축재정과 임금 인하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경제를 디플레이션으로 이끌고 사회 분열을 강화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해결책이다. 전혀 새로운 것을 구상해본다면 어떨까? <<원문 보기>>

지난 1월 초 그리스 정부는 경제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국제통화기금(IMF)의 한 관리는 복지국가를 해체해야 한다며 총리에게 건조한 어조로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의 또 다른 자문은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 심지어 당신의 동료들에게까지도 두려움을 안겨주는 결정이야말로 훌륭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내린 진단의 기저에 깔린 정리(定理)는 익히 알려져 있다. 즉, 시장은 국가에 명령을 내려 허리띠를 졸라매게 한다. 정부가 승인한 긴축계획을 평가하는 것은 오직 채권 구매자뿐이다. 정부의 채무상환 능력을 신뢰하고 말고는 오로지 이들이 결정한다. 한 국가가 강경하게 예산을 집행하면 이자율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져 대출도 다시 봇물 터지듯 늘어날 것이란 이야기다.

이러한 논리에는 상당한 결함이 있다. 약속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하지만 각국 정부가 시장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온갖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긴축 조치가 발효돼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기존 부채 상환을 위한 재융자는 발표만 됐을 뿐 아직 실행되지 않은 개혁, 다시 말해 시장이 채무자의 선의에 대해 갖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무책임하기로 이름난 국가가 그런 신뢰를 과연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그리스가 공무원 및 퇴직자를 헐벗겨서라도 반드시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아무리 큰소리쳐봤자 소용없다.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국가 부채는 이미 만기에 도달할 것이다. 역설적인 상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즉, 그리스 정부가 지출을 제한하겠노라 약속할수록 도리어 기분을 맞춰줘야 할 시장이 경계 태세를 취한 것이다.

 


긴축 프로그램만 있으면 닫힌 채권시장의 문을 그리스가 수용할 만한 조건으로 충분히 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무너지게 된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시장의 길을 비켜가는 자금을 유럽이 대량 투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제 그리스 정부에 던져진 질문은 ‘유럽연합(EU)이 지갑을 열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게임이 된 긴축 프로그램

이러한 도전 과제와 더불어 경제위기는 정치게임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 정부가 단호한 지출 삭감, 이른바 ‘개혁’을 발표해야 하는 것은 시장뿐 아니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메르켈 총리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그리스 국민이 파격적인 수준의 희생을 감내한다는 조건이 수반돼야만 구제 대책을 인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정부는 유로화와 그 채권자들에게 공공연하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프랑스와 독일 정부에는 두 나라가 지원을 거부할 경우 그리스가 파산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덩달아 폐허가 될 것임을 상기시켰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런 시나리오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약속한 긴축 조치들로 인해 실업은 증가하고 조세수입은 줄어들 테니 말이다. 또한 재정적자가 현저하게 감소하리라는 기대도 하기 힘든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의 계획이 권고하듯, 그리스가 소비를 줄이면 상품 일부를 그리스로 수출하는 독일 및 프랑스 산업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유로화의 평가절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가의 경쟁력 향상을 기대할 수도 없다. 공공부문 비용 축소, 조세개혁 등 일시적이나마 숨통을 터줄 만한 조치도 사회적으로 궁핍이 만연하고 이자율이 터무니없이 높은 상황이라 실시하기가 더욱 힘들다.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들의 분석은 재앙으로 귀결된다. 독일 총리실이 구제대책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로존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채권 부도에 대비한 보험, 즉 신용부도스와프(CDS·Credit Default Swaps)의 가격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은행에서 급상승했는데, 이는 예금 보장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유럽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징후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결국 마지못해 구제 대책에 동의했다.

회원국 사분오열, 투기세력은 단결

이 와중에 비극의 또 다른 실태가 드러났다. 그리스의 도산을 막아보자는 결정은 긴장을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고조시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포르투갈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라. 그 수익성이 불확실해진다면 어서 팔아버리거나 신용부도스와프를 구입하고 싶지 않겠는가. 포르투갈 국채의 가치가 그만큼 하락하면서 포르투갈 당국의 재융자는 더욱 힘들어진다. 금융시장에서는 그리스처럼 민간 채권시장에 빗장을 치고 EU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결제 보장 수단일 것이다. 그럴 경우 구제 대책은 거의 해결한 것이다. 더욱이 포르투갈이 그리스보다 덜 ‘무책임한’ 국가라는 평판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포르투갈 다음으로 이러한 규칙이 적용될 국가로는 스페인을 들 수 있다.

요컨대 투기자는 지중해 국가의 부채를 ‘유럽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발휘된 것도 바로 이러한 힘이다. 유럽 자본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 메커니즘은 2008년 9월 미국을 뒤흔든 것과 동일했다. 즉, 우유부단한 정치인을 대상으로 시장이 기이한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협박을 받는 모든 피해자가 그렇듯,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크게 분노했다. 반면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국채 공매도(투기자가 소유하지 않은 채권의 매도 주문을 내는 거래 기법)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억제 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이들이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의 국채나 신용부도스와프의 매도는, 가령 뉴욕이나 케이맨제도 등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금만 압력의 기미가 보여도 투기자는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단결한다.

EU가 동원한 수천억 유로의 자금 덕분에 상황이 잠시나마 안정되기는 했다. 그러나 곧이어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이 드러났다. EU 회원국이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서로 돈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경기를 부양하고 동시에 부채를 흡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유고를 늘리는 것도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유럽중앙은행(ECB)만이 이를 행할 수 있다. 위기 발생 초기 ECB가 수행한 역할은 희한할 정도로 불명확했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각국의 국채를 차례로 매입했다. 이를 통해 ECB는 채무 문제를 통제해나갔지만 그 대가로 유로화 공급의 탄력성이 가중됐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유로화가 ‘견고한’ 통화로서 위상을 잃고 걷잡을 수 없는 하락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장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는 “돈 나오는 기계를 가동시키려는 게 아니다”(1)며 다만 정기예금을 재활용할 따름이라고 밝혔지만, 이처럼 힘 빠진 발언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했다.

이런 혼란은 역설적으로 금융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시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려면 어떤 시장보다 큰 영향력을 가진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처럼 공공채무 상환을 위해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시장은 ‘더 확실한 지배를 위해 분열’시키는 게임을 펼치며 공권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유럽은 ‘공동 시장’ 창설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이를 통제할 수단은 갖추지 못했고, ECB가 추가 자금을 제도권에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ECB의 이런 행동은 결국 국가보다 강력한 시장을 세웠으며, 채무에 시달리는 국가는 도산의 위기로 내몰렸다. 이처럼 답답한 상황은 오직 ECB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행동에 방해가 되는 헌장을 포기하고 압력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유럽중앙은행이 나서라

2008년 가을 미국 FRB가 실시한 유동성 투입 정책의 어느 단계까지 ECB가 따라할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ECB가 파격적인 변화를 통해 금융위기를 종식시키더라도 경제위기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구제’ 대상 국가가 받은 것이라고는 가까스로 채무를 상환할 정도의 지원뿐이지만, 그 대가로 공공지출을 가혹하리만큼 삭감해야 한다. 각국 은행은 여기에서 이득을 보겠지만 국민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유럽은 경기침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유럽이 마음만 바꾼다면 위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즉 복지국가를 구축했던 사회 세력이 다시금 일어나서 이런 국가를 옹호하는 한편, EU가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통합 수단이 없는 데서 비롯된 자신의 기형적 체질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말이다.

유럽에 필요한 것은 통합 조세제도, 경제 번영을 전담할 중앙은행, 그리고 건전성을 잃지 않는 금융 부문이다.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경기침체를 억제하고 최빈곤 지역의 수요 감소를 상쇄하는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자동적 재정 메커니즘이다. 이런 시스템은 정부의 행동만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밑받침되어야 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들이 있다. 가령 퇴직연금기금 유럽연합을 창설해 회원국 간 퇴직연금 수준을 조율함으로써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등도 선진국이 적용하는 기준의 혜택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U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절한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통합 시스템을 구상해볼 수도 있다. 유럽투자은행을 설치해 초국적 대학을 설립하면 개발도상국에서나 선진국에서나 양질의 교육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기본 원칙이 있다. 대량 실업과 이에 기인한 재정적자 해결에 적합한 유일한 방안은 바로 공공지출을 늘리는 것이지 줄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EU, 통합 연금·단일 최저임금 필요

일각에서는 이런 시나리오가 그리스에는 도움을 주지만 독일에는 피해를 준다며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경제적 관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럽 전역의 미사용 자원을 동원해 이를 생산회로에 통합시키는 것이 핵심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향을 택하더라도 이미 일자리가 있는 이들에게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이가 사용할 수 있는 재화 및 서비스의 공급이 신속히 늘어날 테니 말이다. 대신 통합 조세 시스템 덕분에 그리스와 기타 남유럽 국가를 좀먹은 탈세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혁을 실행하려면 막대한 세금이 든다. 하지만 이는 빈곤국가의 부유층에는 영향을 미치겠지만 부국의 빈곤층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달의 경험을 보자면 시장이 여전히 강타력을 지니는 한, 그토록 고대하는 경기회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금융 분야가 더 이상 EU를 위협하지 못하게 무장해제할 필요성이 또다시 확인된다.

이 또한 규제와 과세, 그리고 지중해 국가의 부채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이 가능한 과제다. 공세적인 규제 방식을 들자면 유럽의 모든 금융 주체가 신용부도스와프 거래 방식을 이용해 EU 회원국 국채의 투기를 금지함으로써 투기꾼이 ‘조세천국’으로 피신을 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헤지성이든 아니든 투기 결과로 도산한 은행을 인수해 국유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시세차익에 대한 역내 세금제도를 각국 정부의 감독하에 마련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금융거래 과세를 고려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물론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도입이 너무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금융 오염’을 멈추기 위해 다시금 자본 통제를 실시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스템의 생존을 위해 각국 정부는 금융시장과의 싸움에서 패배해서는 안 된다.

변제가 불가능한 부채의 구조조정을 위해 유럽은 미국 연방파산법 9장이 다루는 자치단체의 채무 정리와 유사한 지급불능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비엔나대 경제학 교수인 쿠니베르트 라퍼가 오래전부터 주창한 바이기도 하다. 이런 제도를 통해 각국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벗어던지는 동시에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핵심적 서비스는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은행이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은행 예금을 보장하고 구조조정으로 취약해진 기관을 관리함으로써 폐해를 줄이는 역할은 정부의 몫이다. 아은행이 겪을 리스크를 너무 안타까워해서는 안 된다. 은행은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잃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또한 한 국가보다는 은행 한 곳에서 생기는 무고한 피해자의 비율이 훨씬 적은 편이다.

이런 개혁을 통해 유럽이 타당한 수준의 이율로 공공지출을 감당하면서 각종 평가기관과 신용부도스와프 시장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유능한 정부를 구축할 수 있을까? 즉, 은행의 지배를 받기보다 이를 지배하는 정부를 실현할 수 있을까? 이는 어디까지나 유럽이 결정할 일이다. 이는 물론 급진적 변화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급진적이지 않은 변화도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유럽의 신자유주의 구조물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어느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선택지는 간단하다. 긴축재정의 끔찍한 급진성이냐, 완전고용의 건설적 급진성이냐다. 다시 말하면 급진성을 경험하는 것이 은행이냐, 사회냐 하는 문제다.

긴축의 급진성 대신 고용의 급진성

필자는 아직 젊던 시절인 1975년 미국 의회의 은행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당시 금융·경제 위기를 겪던 뉴욕시 구제 방안 마련에 참여한 바 있다. 그 프로그램은 대학 및 대중교통 부문 보호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또한 시의 부채를 구조조정하는 한편, 이로 인해 뉴욕 채권 소유자가 입게 될 손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얼마 후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에 소련 대사를 역임한 전 뉴욕 주지사 애버럴 해리먼이었다. 그는 그간의 작업 상황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엉덩이뼈 골절에서 막 회복한 상태의 80대 노인 해리먼은 조지타운에 있는 저택에서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 그의 오른쪽 벽면에는 반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 모작이 걸려 있었고, 왼쪽 유리 서재 안에는 드가의 <발레리나>가 보였다. 작은 민간 미술관 같은 그곳에서 나는 그에게 위원회 위원들이 왜 빈민층 대신 부유층의 희생을 요구하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합니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죠.”

적어도 이 점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글•제임스 K. 갤브레이스 James K. Galbraith
LBJ 공공문제연구소 정부-경영 관계 경제학 교수. 저서로 <The Predator State: How Conservatives Abandoned the Free Market and Why Liberals Should Too>가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Europe1> 방송, 파리, 2010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