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정치는 ‘큰형님’ 후견주의

[Spécial] 황금 과두체제 시대

2010-06-07     로랑 보넬리

<특집> 과두제의 승리

민주주의의 역사란 정치와 경제가 점진적으로 분권되는 과정인가? 오랜 기간 투표를 하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건 가진 자들뿐이었다. 보통선거와 국회의원 제도(알랭 가리구의 글)가 자리잡게 하기 위한 투쟁을 생각해보면, 가진 자들만의 정치에서 벗어나는 데 몇십 년이 소요되었다. 물론 반복되는 부패 사건(안드레우 만레사)과 후견주의(로랑 보넬리)를 볼 때 돈과 정치의 유착관계는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지만, 사법 당국(프란체스카 란시니)은 엘리트 집단의 쇄신(알랭 그레슈)을 통해 이 관계를 척결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자본과 정권 간 ‘투명함’을 우선시하는 정부(레미 닐센)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칠레, 미국 뉴욕처럼 억대 자산가가 당선되고(르노 랑베르), 벨기에 브뤼셀 등에서처럼 압력단체가 공동체가 아닌 관계자의 이익을 앞세우며(프랑수아 루핀), 국가원수와 장관이 자신의 주소록을 은행에 팔아넘기기 전에 경쟁적으로 긴축 조치를 취하는 이 시대에 과연 자본가를 섬기지 않은 채 정치를 할 수 있는가?

돈과 정치가 맺는 관계 방식의 목록에서 후견주의(Clientalism·두목이 부하가 바라는 것을 해결해주고 부하의 충성을 받는 관계 방식-역자)는 뇌물 수수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 1902년까지만 해도 올리비에 갱강이라는 하원의원이 “지난번 선거에서 유권자, 지지자, 반대자에게 소액 식권을 나눠주었다”(1)고 자신의 ‘기부행위’를 밝혀도 무방할 정도였으나, 2009년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는 세르지 다소 코르베유-에손 시장이 ‘현금 기부’를 했다는 이유로 그의 당선을 무효화했다.

물건이나 서비스의 제공과 정치적 지지나 표를 교환하는 일은 이제 더는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대부분의 정치학자와 정치부 기자는 유권자란 자신의 소신에 따라 지지자를 선택하는 합리적 존재이며, 앞서 본 관행은 민주화 이전의 정치 체계에서 횡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 관행은 서구사회에서는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현재는 정치적 관습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것으로 여기는 국가, 최근 들어 거론되는 그리스나 의례적으로 언급되는 아프리카·아랍권 국가 또는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선거 때 식권 배포, 그땐 그랬지…

 

이런 분석은 자민족중심주의적 시각을 반영할뿐더러 정치의 일반적 작용 방식, 다시 말해 정치적 충성도가 형성·유지되는 메커니즘에 대해선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후견주의 방식은 사회·문화적으로 경멸받는 처지에 놓인 서민층 사이에 효과적인 것 같다. 구조는 간단하다. 소외 계층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주면 그 대가로 자신의 표를 줄 것이라는 점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일자리, 돈 등을 나눠주면 당선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교환 행위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는가? 사회학자 로버트 킹 머튼은 1950년대 미국 내 이민자촌에서 ‘정치적 메커니즘’, 이를테면 정치 지도자와 유권자의 상호의존적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 바 있다.(2) 한편 하비에르 아우예로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빈민촌에서 집권당인 정의당(PJ)이 어떻게 조직망을 만들고, 권력을 재생산하는지 조사했다.(3) 페론당의 후신 정의당은 1947년 후안 도밍고 페론 장군이 창설해 1989년 이래 사실상 계속 집권하고 있으며, 상원의원도 대부분 이 당 소속이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드 키르치네르 대통령, 또는 그의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과 카를로스 사울 메넴(1989~99)은 모두 정의당 소속이며, 그들의 정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좌·우파의 이분법적 분류로 구분지을 수는 없다. 정당의 이념적 노선은 지역적 기반을 지닌 주요 인사 간 힘의 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아우예로에 따르면 빈민촌은 정의당 전 서기이자 현 시의회 의원인 마틸데 같은 정치 활동가와 연계된 기초 조직(UB·Unidad Básica)으로 이뤄진다. 기초 조직은 회의나 집회가 열리는 단위이며, 단체로 이동해 빵·설탕·가루우유·쌀·맥주는 물론 정의당을 상징하는 색의 티셔츠와 야구모자 등을 나눠준다. 음악가가 속한 기초 조직도 있는데, 그들의 역할은 단순한 음악가 이상이다. 지역에서 어린이 대상 공연이나 콘서트를 열어 식료품과 의약품을 나눠준다. 시 직원 촐로는 지역 상원의원 부인이 마련한 ‘생명 계획’(Plan Vida)이라는 식료품 배급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매일 아침 촐로가 블록 대표자(Manzaneras)에게 먹을 것을 지급하면 이들이 다시 이웃에게 먹을 것을 배분한다.

생필품의 네트워크, 그리고 정치

비록 블록 대표자들은 정치 활동가가 아닐지라도, 대부분 기초 조직의 책임자가 고용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당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블록 대표자는 이렇게 말했다. “집회가 있으면 마틸데는 저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다시 ‘생명 계획’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모아 참석하지요.” 다른 이가 덧붙였다. “거절할 수 없어요. …우리는 친구니까요.” 여기서 정치적 교환은 개인 간의 관계 뒤로 사라진다. 기초 조직 책임자가 혜택받은 시민과 동일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이는 개인적, 더 나아가 가족적 관계망으로 동화된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활동이 후자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인맥과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초 조직 책임자는 자신의 사회적 자본이라 할 ‘개인적 정치 중재’를 통해 동네와 거주민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한다.

이같은 정치 중재자의 후원주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뤄진다. 마틸데, 촐로 그리고 그들의 동료는 페론적 전통과 페론이 노동자 계급에게 보이던 관심을 일상 속에 재창조하는 것이다. 페론 정부(1946~52, 1952~55)는 노동자층의 환경을 대폭 개선했고, 노조는 언제나 국민정의 운동의 핵심적 구성 요소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불안하고 나약한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삶의 존엄성(생존)이다. 정의당은 생필품을 나눠주며, 삶의 존엄성에 의미를 부여한다. 정치적 요구에서 동정으로의 전이는 ‘사회정의’라는 기치 아래에서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 차이를 더욱 인식하기 어려워졌다. ‘인색한’ 두할데 상원의원 부인도 에바 페론 전 영부인을 본받겠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무엇을 주느냐’보다 ‘어떻게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4) 기초 조직 책임자의 중재자로서 영향력은 기부금을 필요한 곳에 사용해 개개인을 집단 역사에 포섭하는 능력에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실제적으로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정치의 힘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모든 변화가 ‘페론주의 이데올로기’ 덕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가 원래 의미에서 많이 수정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상징만 남고 계급성은 실종

앞서 보았듯이 정치 체제의 안정은 기초 조직 책임자와 지역 거주민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경제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던 메넴 전 대통령이 서민층의 지지를 받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정책은 경제적 취약 계층에 먼저 충격을 주면서 그들의 상부상조와 연대망을 약화시켰다. 물론 마틸데나 촐로처럼 금품이나 다른 혜택의 공식적 배급 경로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이 충격을 비켜갔다. 서민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도 적절한 관리를 통해 서민의 적극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명백한 모순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정치인이 국민을 상대로 구축한 후견주의에서 민주주의적 이상을 찾기란 힘들다. 그러나 정치인과 국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성을 기반으로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페론주의 정치인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지배받는다. 이를테면 페론주의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 기반을 기초 조직 책임자의 관리 체계를 통해 유지한다. 이는 유권자에게 물질적 도움(식량·의약품 등)을 주면서 그들을 담론·역사·정체성 등 상징적 분야에서 정의당과 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상황은 좀 나은가? 물론 투표는 충분히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는 행위가 되었지만 기권율과 선거인명부 미등재 비율은 서민층에서 가장 높다. 주요 정당도 그들에겐 거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민층은 하루하루 자신이 겪는 일이 정치인의 프로젝트에 반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정치인의 능력은 자신의 기반이 되는 정치집단에 유용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결국 정치인의 능력이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자본과 소통 가능한 정치집단을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