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멜로', 아랍 세계 뒤흔들다
터키의 시리즈물 '누르'는 아랍 세계의 커플들에게 이혼을 부추기고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여성들이 꿈꾸는 남자, 무하나드(Muhannad)가 국경을 초월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미디어들은 '누르' 신드롬을 외쳐대고 있다. MBC4, 사우디 채널이 방영하는 이 터키 시리즈물도 애초 아랍 위성방송 채널들이 쏟아내는 수 많은 시리즈물처럼 그저 평범한 연속극의 하나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텔레비전 수상기를 점령하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거의 사회 운동에 견줘지기까지 한다.
남녀노소, 특히 여성들은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극중의 누르와 무하나드 커플이 겪는 고난 장면을 보지 않곤 못배긴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 정치 얘기는 밀려났다. 이 시리즈물을 아랍 세계에 방영하고 있는 방송사 사장에 따르면, 인구 2천800만 명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만, 매일 300만~400만 명의 TV 시청자들이 이 시리즈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애, 남녀평등 내세워 '인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여자 친구 니할이 사고를 당한 이후, 무하나드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할아버지 페크리 벡은 무하나드가 유년 시절 좋아했던 젊은 시골 여성 누르와 손자를 혼인시키기로 결심한다. 이 커플은 그러나 서사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납치, 감금, 암살 시도 등. 시나리오도 퍽 상투적인데다 2005년 터키 방영 당시 시청률도 저조했던 이 시리즈물이 왜 아랍 사회에서 대박이 난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알고 보면 이유는 3 가지다. 감정, 로망스 그리고 무하나드다. 통상적인 연속극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재료가 아니다. 사실 직접적 인기 요인은 '아랍 세계의 브래드 피트'로 불리는 키반 태트리튜그다. 24살의 모델 출신인 그는 이 시리즈물로 발탁되어 탤런트로 입문한 후, 극중의 무하나드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랍 대중의 우상으로 우뚝 선 것이다. 금발에 푸른 눈, 훤칠한 키에 근육질의 몸매만으로도 뭇 여성들을 숨 막히게 할 수 있다. 게다가 극중에서 보여준 아내와의 관계, 즉 사랑과 감수성, 그리고 평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모습이 대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이다.
매혹적인 누르 역은 송굴 오덴이 맡아, 현대적이고, 독립적이고, 용감한 여인상을 재현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극중에서 대화와 상호 존중, 그리고 양보를 통해 끈끈하게 다져진 이상적 부부의 모델이 되고 있다. '누르' 현상에 관심을 가진 아랍 세계의 신문들이 인터뷰한 여성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꿈꾸던 일상적 현실과 동떨어진 이들의 모습에 열광한다고 털어놨다.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뷰한 젊은 사우디 여성 역시 "무하나드는 뭇 여성이 바라는 완벽한 남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 커플은 우리 문화에서 부족한 낭만적인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조금 과장된 면이 없진 않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라도 이런 사랑을 보고 싶어 하죠."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도 남편들에게 무하나드처럼 굴라고 요구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남성층 일부도 '공감'
남성들 일부도 무하나드가 부인한테 모범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들 또한 남들처럼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다. 기혼자인 예멘의 택시 기사 함단(24)은 "우리 문화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데, 이 시리즈물은 서로가 양보하는 법을 가르친다"며 "부부 문제를 다루는 교과서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론 꽃미남 주인공에게 홀린 '누르 마니아'와 일부 여성들이 가정 구성원끼리 약간의 긴장이나 불화의 씨앗을 낳기도 한다. 아랍 신문들 역시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바레인, 예멘 등에선 이 드라마 때문에 이혼했다는 얘기가 이젠 진부하게 들릴 정도가 됐다.
요르단 국회에선 '누르'를 '비이슬람문화'에 맞서는 전략적 의제로 삼았을 정도였다. 초상집에 조문을 간 한 사우디 여성이 당일 에피소드를 꼭 보고 싶은 마음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는 곳을 물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터키 드라마 '누르'… 세속적 미덕·행복, 여성들 열광
종교계·보수주의자 '전통 가치 훼손하는 속물' 분노
보수 계층 '이슬람 정신을 모독'
1990년대에 시리아의 드라마 산업이 발전하면서, 오랫동안 이집트인들이 지배하던 시장에 새로운 장르의 제작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층 세련되고, 한층 치밀해진 줄거리에 대중들은 "허구한 날 사랑과 복수 타령인 이집트 드라마"보다 한결 좋아했다.1)
이에 비해 '누르'는 한 무슬림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무슬림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는 점이 특징이다. 이스탄불에서 사나를 잇는 지역의 삶의 형태, 사고, 가치와 관습 등을 보여주고 여러 세대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거주하는 사회에서 강조되는 가족의 중요성, 어른들에 대한 공경, 부모들이 맺어주는 정략 결혼 등 수많은 극적 요소들이 단번에 이를 대중과 친숙하게 만들었다.
일단 문화적 동질성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쉽게 등장 인물들과 동일시 됐다. 반면에 아랍 국가들에 비해 훨씬 세속화된 터키 사회 간의 인식 차이가 보수 세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비록 극중의 누르가 라마단 금식을 지키긴 하나, 근본주의적 이슬람 정신에 충격을 줄 수도 있는 거침없는 음주와 혼전 성관계 장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동질성과 이질감이 뒤섞인 것이 '누르'의 매력을 더하는가 하면, 종교계를 또한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의 한 여성은 종교인들의 우려를 '우려'하고 있다. "종교인들은 시리즈물에 빠진 젊은이들을 마치 동거를 지지하는 무슬림 취급을 하거나, 혼외정사로 아이를 둔 사람 취급을 한다"면서 "이는 그들이 같은 짓을 하는 서양인들을 볼 때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러나 "이 시리즈물은 남들과 달리 살아가는 무슬림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2) 이라고 덧붙였다. 진짜 문제는 그런 점을 간과한 보주주의자들이란 얘기다.
터키 관광붐…아랍 드라마들도 모방
그럼에도 종교인들만 이 드라마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터키 영상물에 대한 이 같은 열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팔레스타인 인터넷 신문인 <알 와탄(Al Watn)>의 기자 사메 아시가 그런 경우다. 그는 "터키 시리즈물이 아랍 세계에서 터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성공했을까?" 라고 한 기사에서 자문했다. 3)
만약 이 질문에 의당 긍정적인 답변을 해야 한다면, '아랍국(nation arabe)' 동료들에게 터키와 아랍의 역사에 대해 숙고해 보라고 그는 권했다. "만약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오토만 제국 시대를 돌아보면, 아랍인들의 문명과 기술 발전이 더디었던 것은 터키인들 때문"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터키 시리즈물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문제는 이 현상이 실제로 터키인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우리 조부모들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시각을 바꿔 놓는데 성공했을까 하는 점이죠"
온갖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물은 터키 관광을 부추기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리야드 주재 특파원은 한 터키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터키를 방문하는 사우디인 관광객이 지난해 4만 명에서 올해 10만 명으로 늘었다고 전했다. 4)
사나 주재 터키 영사관도 마찬가지다. 사나에 있는 한 여행사 책임자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예멘 인들이 에피소드 촬영지가 있는 이스탄불로 떠나기 위해 영사관을 찾는다"고 말했다.
"무하나드를 만나보겠다 한들 누가 말리겠어요? 어제도 일가족에게 터키 여행을 주선했습니다. 드라마가 그들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죠." 터키의 관광업계 또한 이런 분위기를 한껏 이용했다. 보스포르 해안가에 가공의 무하나드의 집을 지어, 여행업자들을 위한 숙박업소로 활용한 뒤, 박물관으로 꾸몄다.
이 드라마는 200편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라마단 기간을 앞둔 지난 8월 말에 종영됐다. 흔히 라마단 기간에 아랍 드라마들은 한편으론 조심스레 검열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론 '유머러스'한 톤으로 사회 문제를 다루곤 했다. 이제 그들은 '누르'를 계기로 더 자주 여성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전위적인 많은 시리즈물은 방영이 연기되기도 했다.
리용 대학의 아랍 문화 전문가 이브 곤잘레스-퀴자노 교수는 "아랍 세계에서 그런 드라마들을 모두 방영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그러나 '누르'처럼 대중의 구미에 맞는 시리즈를 광고주들이 모방 선전하기 때문에, 다음 라마단을 전후 해서 아랍 여성들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시리즈물이 당연히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5)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 프랑스 지정학 연구소 졸업
1) 이브 곤잘레스-퀴자노(Yves Gonjales-Quijano)의 '라마단의 텔레비전(3/3): 드라마의 지정학과 여성의 문제(Tㅤㅁㅐㄼlㅤㅁㅐㄼvison de Ramadan gㅤㅁㅐㄼopolitique du feuilleton et questions de femme)'. http://culturepolitiquearabe.blo-gspot.com, 디나 엘-카와가와 알랭 루시옹(Dina El-Khawaga et Alain Rou-ssillon)의 '이집트 TV드라마 잘 이용하기 (Du bon usage des feuilletons tㅤㅁㅐㄼ-
lㅤㅁㅐㄼvisㅤㅁㅐㄼes ㅤㅁㅐㄼgyptie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5년 5월
2)'어떤 이슬람 교도,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강타하는 터키의 멜로 드라마 (Un-islamic, Turkish soap opera all the rage in West Bank and Gaza)', Associated Press, 2008년 7월 27일
3) http://pulpit.alwatanvoice.com/print.php?id=134860, 2008년 5월 28일
4)'페자 살레 암바흐(Faiza Saleh Ambah)', '사우디아라비아를 뒤흔드는 위험한 멜로(A subversive Soap roils Saudi Arbia)', <워싱턴포스트>, 2008년 8월 3일
5) 이브 곤잘레스-퀴자노 참조. ibid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