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신계급’, 혁명의 백일몽

[Spécial] 황금 과두체제의 시대

2010-06-07     알랭 그레슈

1967년 6월 선제공격을 가한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으로 구성된 아랍연합군을 무너뜨렸다. 이날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희망한 아랍 지역 통일의 꿈이 무너진 날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또한 단지 아랍민족주의가 실패하고 사회적 보수주의에서 세계적 지하드주의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슬람 정치가 부상하게 된 발단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이날은 이집트 사회를 변화시키려던 의지와, 자립적 국민경제를 건설하고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던 희망이 무너진 날로 남아 있다.

 

많은 사람이 잊고 있겠지만, 1952년 7월 23일 나세르의 지휘 아래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린 ‘자유 장교단’은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이나 거창한 대외적 명분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고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길 원했으며, 후진적 국가에서 탈피한 이집트의 근대적인 강대국 건설을 꿈꾸었다. 우선 그들은 농지개혁을 강행한 뒤, 1960년대 초반부터 ‘아랍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제 기반과 기업을 국유화하고 당시 제3세계에게 신뢰할 만한 발전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인 소비에트 모델을 바탕으로 중공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같은 혁명은 지방의 ‘봉건계급’과 도시 내 부르주아 등 구시대 지배계층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또한 교육 및 보건 분야의 광범위한 프로그램은 물론 대학 교육의 대중화, 선진적 사회 법안, 공무원 증가 등이 뒤따랐다. 실제로 1962년에는 법에 의해 모든 대학 학위자가 공무원직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극빈계층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과 급격한 사회변동은 일당 정치체제, 노조의 군대화 같은 권위주의적 관행과 정보기관의 역할 확장을 동반했다.

유세프 샤힌의 영화 <참새>(1972)에는 당시 이집트 정권의 한계, 즉 사회주의적 슬로건 아래 자행된 부패와 투기욕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1967년 전쟁에서 패한 이후, 나세르 대통령은 신속하게 ‘신계급’의 등장을 도모했다. (앞서 단행된) 농지개혁은 또 다른 불평등을 초래했고, 농촌에 침투한 자본주의는 소수에게만 이익을 주고 대다수 농민의 토지를 착취했다. 도시에서는 정부의 경제정책 관료, 고위 공무원뿐만 아니라 종종 책임자급 관료(1964년 지방단체장 26명 중 22명과 장관의 3분의 1이 연루됨)와 결탁한 상인이나 기업가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부정 재산을 축적했다. 유일 정당과 행정기관은 벼락부자들의 중개자 노릇을 담당했고, 이로써 사회적 동원에 제동이 걸렸다.

부정부패가 모두 ‘폭로’되자, 이집트 내부에서는 급진주의적 여론이 형성됐다. 전위적인 정당의 등장, 노동자 계급 및 빈민 농민층의 결집,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 등에 관한 필요성이 거론됐다. 결국 이집트는 1968년 라틴아메리카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제3세계 국가가 응집한 대규모 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나세르주의 ‘혁명’은 이내 그 동력을 잃어버렸다. 구세력의 반발과 대외정책의 실패로 쇠약해진 정권은 개혁을 원하지 않았을(또는 개혁할 능력이 없었을)뿐더러 급진화를 바라지 않았다. 1970년 9월 나세르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반혁명’의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나세르의 후임으로 정권을 잡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의 진로를 바꿨다. 그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자유주의 경제정책(인피타·Infitah)을 시행했다. 그렇게 혁명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신계급’은 여전히 격한 반대에도 도도하게 남아 있다.

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중동 전문기자. 주요 저서로 <중동 이해를 위한 100개의 열쇠>(Hachette·Paris·2006) 등이 있다.

번역•배영미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