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서막을 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2018-02-28     마리옹 르클레르 | 번역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대담한 사상을 품고 관습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영국 지식인층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급진주의와 관련된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갔던 그녀는 특히 전제주의적 시각에 견줘 여성억압 구조에 관한 견해를 정치 이슈화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이 1911년, 인류 진보의 선구자이자 헐벗은 자들의 영웅으로 묘사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유독 영불해협 건너편 프랑스에서 간과된 측면이 있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여성의 운명을 생각한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낡은 장애물을 무너뜨리겠다는 강건한 의지로 프랑스 혁명에 크게 힘을 실어준 영국 급진주의와 연관된 페미니즘의 핵심인물이 됐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프슨은 영국 노동자층의 계급의식이 처음으로 구체화되는 데 있어, 그녀의 결정적인 역할을 설명한 바 있다.

‘급진주의자’란 1760년대부터 결연한 개혁파를 일컫는 말이었다. 1789년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자코뱅파의 영향, 귀족과 상인의 과점체제를 거부하겠다는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급진주의는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에 이론가 두 명이 기여했다. 한 명은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기치의 열혈 추종자였던 토머스 페인(1737~1809)이다. 페인의 『인간의 권리』(1791)는 민주적 급진주의의 성서로 격상하면서 노동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른 한 명은 윌리엄 고드윈(1756~1836)으로, 교회를 떠난 목사이자 최초의 아나키스트 겸 사회주의자였다. 고드윈은『정치적 정의에 대한 고찰』(1793)을 통해 사회 변혁의 꿈을 담은 자신의 아나키즘적 사상을 주장했다. 1790년대는 지식인들이 적은 비용을 들여서 자신의 사상을 담아 출간한 ‘팸플릿의 전쟁’이 펼쳐지는 시대였다. 페인이 사회주의 입장이었다면, 반대로 보수주의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불편한 폭력성을 고발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펴내 영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민심과 진보적 부르주아들이 혁명과 영국식 ‘자코뱅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공공연히 버크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맞섰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논란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인생은 당시의 다른 여성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시작됐다. 사업으로 성공한 부르주아 가정(선조 중 와인 매매상과 견직물 사업자가 있었다)에서 태어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으로서 운신의 폭이 좁다고 느꼈다. 그녀는 또한 빅토리아 시대 직전 생활용품이 공장에서 생산되고, 부르주아들이 귀족적 예의범절을 갖추려고 애쓰면서 여성을 ‘부엌의 천사’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시절에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에서 여성을 유폐하려는 거대한 가부장제를 직접 체험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아버지는 권위적이며 독선적이었고, 어머니는 순종적이며 무기력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싫은 탓에 그녀는 첫 번째 소설1에서 이를 희화화하기도 했다. 그녀의 오빠는 법률공부를 계속했던 반면, 그녀는 자매들과 함께 요크셔의 작은 학교에서 지극히 피상적인 교육을 받았다. 훗날 가정이 어려워지자, 그녀와 자매들은 가정부나 노인들의 말동무 등으로 일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1784년 그녀들은 친구 파니 블러드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2년 만에 폐교해야 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울스턴크래프트는 교육이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딸들의 교육에 관한 소고』(1787)2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는 여성 문제의 근본적 원인과 해결책을 부르주아적 도덕관에 사로잡힌 가정으로 국한해 접근했고, 그녀는 엄마들이 무지한 유모와 못된 하녀로부터 옳지 못한 관습을 배우지 말고 딸들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깨어 있는 인간으로 교육시킬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교육 활동은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됐다. 그녀가 세운 학교가 마침 교육운동가 리처드 프라이스가 일하던 예배당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됐기 때문이다. 목사이자 이론가인 프라이스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찬양한 설교로 1789년 유명해졌는데, 그 내용에 분노한 버크가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을 비판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쓴 것이다.

성공회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영국사회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체제에 순응적이지 않은 신교도들, 예컨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고, 공직을 가질 권리도 없는 비非국교도들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 이전의 급진주의 운동, 미국독립 지원과 노예제도 폐지운동의 중추가 된 의회 개혁안 및 과학적 발명이 싹튼 정치클럽과 학회에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런던 급진주의의 주요 인물이자 페인의 책을 출간한 출판인인 조지프 존슨을 만나게 된다. 존슨은 그녀를 독려하며 『딸들의 교육에 관한 소고』와 첫 번째 소설을 출간하게 해줬으며, 그녀에게 번역이나 자신이 편집한 전문지 교정을 의뢰했다. 비국교도들은 그녀에게 경제적, 정치적인 해방의 길을 열어줬다. 그녀가 그들을 만나면서 급진주의를 배우게 됐고, 자신의 글로써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그녀는 페인보다 앞서 『인간의 권리 옹호』(1790)를 썼고, 그 덕분에 런던의 (남성 위주의) 급진주의자들 집단에서 지식인으로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존슨이 주최한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페인, 소설가 메리 헤이스와 토마스 홀크로프트, 그리고 모든 정부 형태에 대한 초기 아나키스트적 비평을 발표한 윌리엄 고드윈을 만나 토론을 벌였다. 고드윈과 그녀는 연인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동거하게 됐다. 그는 그녀 사후에 펴낸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의 끈기와 논리력,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는 대화 주도능력을 칭찬했다. 고드윈은 그녀를 처음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페인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는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792년, 그녀는 『여성의 권리 옹호』3를 집필했다.

프랑스 혁명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전제주의에 대한 급진주의적 비판을 여성의 경험과 접목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녀는 여성들의 ‘열악한’ 환경이 잘못된 교육 때문이 아니라 체제적 억압과 남성의 횡포로 인한 노예의 삶에 따른 결과라고 규탄했다. 『인간의 권리 옹호』와 『여성의 권리 옹호』 사이의 다른 점은 제목이 보여주듯 단순히 옹호하려는 대상만의 차이는 아니었다. 첫 번째 저서에서 그녀는 당시 보수주의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 했던 왕실과 귀족의 허영과 실상을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특히 억압의 이데올로기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직접적으로 ‘이데올로기’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두 번째 저서에서 발전시킨 것은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였다. 특히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로 인한 여성의 가치 폄하와 노예화를 비판했다. 그녀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디에 드러나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헤쳤다. 특히 학교에서 ‘행실교본’으로 읽힌 장자크 루소의 『에밀』이 소녀들에게 아름답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주입시킨 점을 비판했다. 또한 (어리석게도) 인기가 좋은 남성의 눈에 들기 위해 여성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했던 ‘매너’의 악영향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지적했다.4

울스턴크래프트는 선각자로서 1960년대 페미니즘과 젠더 연구를 앞지른 ‘성의 특성’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사회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동참한 급진주의 운동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주의의 극단에 있는 자유주의 사상을 접하게끔 했다. 예컨대 페인이 큰 틀을 그린, 부를 재분배하는 복지국가, 존 텔월의 노동으로 생산된 이윤에 비례한 노동자의 권리 옹호, 토지의 사유제 폐지를 위해 투쟁한 토마스 스펜스의 농본주의적 초기 공산주의 등이 대표적인 예다.5 그녀의 사후에 발표된 미완성 원고 『마리아 혹은 여성인 자의 불행』에는 그녀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감상 소설 특유의 페이소스는 없지만 여성 노동의 고단함이 생생하게 그려진 이 소설은 ‘다양한 계층에 속한 여성들’의 우정과 상부상조에 대한 상찬으로 끝을 맺는다.6

그러나 1970년대 제2의 페미니즘 물결을 이끈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그녀들은 울스턴크래프트가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물들어 계층 간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또한 그녀의 몸에 밴 청교도주의 때문에 여성 본연의 특성을 몰이해하고, 혐오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면모를 보였다. 재능 있는 여성이 자유롭게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줬고, (당시 토마스 스펜스만이 지지하던)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한 것은 물론, 나아가 여성의 정계진출까지도 꿈꾸고 독려했다. 또한 그녀는 여성이 작가라는 것만으로도 부도덕적이라 여기던 시절에, 제대로 기술할 수 없었던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그러나 그녀의 삶과 사랑은 감정에 지극히 충실했다. 철학이 빠진 공백에 연애 감정이 가득 들어차면서 그녀 자신이 비난하던 감상적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 성적인 자유를 주장하고, 이를 실천한 그녀는 보수 언론은 물론 일부 급진 언론으로부터도 집중포화를 받았다. 그녀는 혁명이 일어난 파리에 홀로 가서 미국인 모험가와 격정적인 열애를 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첫째 딸을 낳았고, 결혼을 ‘추악한 독점’이라고 여긴 고드윈을 만나 결국 뜻밖의 임신으로 그와 동거를 하다가 헤어졌으며(둘 다 작가라는 직업은 부부생활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보다 더 어린 시절엔 레즈비언이라는 비난을 사면서도 파니 블러드와 동성애적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7

울스턴크래프트는 38세에 둘째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사상 전파 속도는 더디어졌고, 보수 언론의 격렬한 비난이 계속됐다. 이어 윌리엄 피트(1759~1806, 24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름)의 보수 정부가 등장해 급진주의 운동이 붕괴하고 남성적 급진주의와 여성혐오가 완고해지면서 그 명맥마저 끊겼다. 영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한 세기나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사회주의의 여성 억압과 여성노동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울스턴크래프트가 남긴 가장 직접적인 유산은, 그녀의 둘째 딸 메리일지도 모른다. 메리는 16세에 유부남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애정 도피 행각을 벌이고 20세에 근대소설의 명작으로 꼽히는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하면서 어머니의 지적, 성적 담대함을 다음 세대에 재현했다. 과학과 철학을 거침없이 버무린 (그리고 보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가미한) 이 책은 이번 후대에선 외면 받지 않았다.

 

 

글·마리옹 르클레르 Marion Leclair
파리에 거주하면서 영국작가와 미국작가들의 작품들을 불어로 번역해 프랑스에서 소개하고 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비롯해 윌리엄 모리슨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Mary. Invention(메리, 하나의 픽션)’, 『Mary Wollstonecraft. Aux origines du féminisme politique et social en Angleterre(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영국의 정치사회적 페미니즘의 기원)』, Nathalie Zimpfer 엮음, ENS Éditions, Lyon, 2015.
(2)  ‘Pensées sur l’éducation des filles(딸들의 교육에 관한 소고)’, 『Mary Wollstonecraft』, op. cit.
(3) Mary Wollstonecraft, ‘Défense des droits des femmes(여성의 권리 옹호)’, 『Œuvres』, édition d’Isabelle Bour, Classiques Garnier, Paris, 2016. 
(4) Barbara Taylor, 『Mary Wollstonecraft and the Feminist Imag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전기는 Janet Todd, 『Mary Wollstonecraft: A Revolutionary Life』(Weidenfeld & Nicolson, London, 2000)를 참고.
(5) Gregory Claeys, 『The French Revolution Debate in Britain: The Origins of Modern Politics』, Palgrave Macmillan, Basingstoke, 2007.
(6) Mary Wollstonecraft, 『Maria ou le malheur d’être femme(마리아 혹은 여성인 자의 불행)』, Œuvres, op. cit.
(7) Claudia L. Johnson, 『Equivocal Beings: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