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체험마저도 질병화하는 권력과 자본

2018-02-28     제라르 포미에 | 정신과의사 겸 정신분석가
기분이 처지거나 슬픔이 밀려들거나,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언제나 정신질환의 징조일까? 유럽의 정신의학계는 오랫동안 병의 경중을 파악해, 약 처방에서 심리분석 치료까지 각 사례에 맞는 적절한 처방을 내려왔다. 반면 제약산업에서는 과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상적인 문제를 병으로 둔갑시키고, 병을 치료할 해결책을 들이밀려 한다.

주요 현대병 중 하나인 ‘심리적 고통’과 관련해, 수십 년 전부터 사상 초유의 진단시스템이 등장했다. 그 목적은 이 거대한 잠재적 시장으로부터 높은 수익을 올리려는 데 있었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럽의 위대한 정신의학 체계부터 바꿔야만 했다. 유럽은 지난 2세기에 걸쳐 취합한 체계적이고 다양한 임상관찰 내용을 토대로 정신질환의 증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크게 신경병성 질환, 정신병성 질환, 그리고 도착병성 질환으로 분류해왔다. 이 같은 지식을 무기로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의들은 환자를 진단하고, 중증 사례와 일시적인 상황으로 인한 고통 사례를 구분해왔다. 정말로 약이 필요한 환자인지, 상담만으로도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례인지를 구별해온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고전적인 정신의학은 함께 성장해왔다. 서로 다른 두 분야가 서로의 이론을 보강하며 풍요롭게 발전해온 것이다. 덕분에 제약업계는 제법 큰 파이를 누려왔다.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빅파마(Big Pharma·거대 제약회사를 의미-역주)’의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빅파마’는 실로 거대한 권력을 쥔 제약사들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칭이다.

의과대학까지 침투한 ‘빅파마’의 로비

빅파마는 동네 의사만큼이나 상위정부 부처와 보건기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공을 들인다. 가령 젊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연수’를 핑계로 크루즈 여행 기회를 제공하는 등 상당히 후한 인심을 선사한다.
이 거대 시장을 정복하기 위한 시도가 처음 시작된 곳은 미국이었다. 1952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사상 처음으로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을 편찬했다.(1) 이어 1994년 세계보건기구(WHO)도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 제4판(DSM-4)에 보조를 맞춘 국제질병분류(ICD) 정신질환 목록을 발표했다. 그러자 많은 나라가 그 뒤를 따랐다. 이로써 공식 등재된 정신질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DSM-4에 등재된 정신질환의 수는 1952년 60종에서 1994년에 410종으로 현격히 증가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결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DSM 체계의 간략화가 급선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증상의 원인이나 해당 증상에 들어맞는 심리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환자의 행동에 딱 들어맞는 질환을 목록에서 찾아내 표기하는 것이 전부가 돼버렸다. 이것은 어떠한 증상(슬픈 감정)이 반드시 특정 장애(우울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처사다. 이 경우 정신과 전문의와의 상담은 더 이상 필요하지가 않다. 그저 표면적으로 보이는 ‘장애’의 종류를 판별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행동 장애에서, 섭식 장애, 수면 장애, 심지어 최근 등장한 테러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장애’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만 분류하면 되는 것이다. 

각각의 증상에는 기막히게도 그에 걸맞은 처방약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진단체계는 어느새 ‘장애(Trouble)'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저 혼탁한 물에 완전히 잠겨버린 것이다. 오늘날 ‘빅 파마’의 로비는 의과대학으로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 이제 의과대학에서는 주야장천 DSM만 가르친다. 심지어 제약회사가 직접 나서서 교육을 맡기도 한다. 당연히 온갖 이해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에 대한 비난이 줄을 잇는다. 과거 위대한 정신의학의 전통은 잊혀진지 오래다. ‘메이드 인 DSM’표 ‘신종’ 임상의는 환자가 정신증인지, 신경증인지, 도착증인지를 구분할 방도가 없다. 그러니 환자가 중증을 앓고 있는지, 아니면 일시적 상황으로 고통을 겪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미심쩍은 마음을 안고 향정신성의약품이나 처방하게 되리라.

제약업계는 왜 아편을 선호하는가

현대에는 ‘우울증’ 같은 단어가 어느새 일상어가 돼 버렸다. 살다보면 누구나 때로는 울적한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울증’이란 개념을 이렇게 사소하고 하찮게 대우하면 되겠는가? 그리하여 우울증은 엄연한 하나의 질병으로 격상된다. 그러나 슬픔이란 때로는 심각한 자살충동을 동반하는 우울증의 징후일 수도 있지만, 또 때로는 누군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뒤에 나타나는 감정처럼, 일시적이고 정상적인 증상일 때도 있다. 공자는 아버지를 여읜 아들에게 3년간 애도의 시간을 가지기를 권했다. 반면 현대인은 보름만 넘게 슬픈 상태가 지속돼도 금방 환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항우울제를 처방받는다. 그러나 항우울제는 일시적으로만 기분을 가라앉혀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때로는 치료를 중단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평생 약을 처방받기도 한다.

DSM표 마케팅은 단순하다. 병리적인 문제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심리적 문제를 적절하게 뒤섞어 주기적으로 신종 장애를 하나씩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이는 아주 손쉬운 일인데, 우리네 인생이 여러 문제와 난관을 안고 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난관은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부여한다. 웃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난관에서 벗어나려 뜨거운 화산 위를 달려간다. 그러나 마약이나 다름없는 약으로 이 활활 타오르는 화산불을 꺼뜨리려는 것은 매 순간 모험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의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와 감정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와도 같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개인의 병리 증상이 진짜 장애로 진단 받는 것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때뿐”이라고 지적했다.(2) 어떤 의약품의 명칭은 이러한 견해에 잘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의미를 새겨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령 극심한 정신병성 질환의 경우 환각이나 착란을 잠재우기 위해 향정신성의약품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런 의약품을 일컬어 anti-psychotic(‘항정신질환제’라는 의미도 있지만, 뒤의 맥락과 연관해 ‘반-정신질환자’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역주)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약을 만든 사람의 의도는, 혹 정신병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완전히 없애려는 것이었을까? 실상 이것은 ‘환자’의 존재 자체가 그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가 아닌가. 오히려 이런 종류의 약품은 ‘Pro-psychotic(친정신질환자적)'이나 ‘Philo-psychotic(정신질환자애적)'으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일단 착란에서 해방된 정신질환자(psychotic)는 종종 위대한 창조자(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이자, 위대한 시인(프리드리히 휠덜린)이자, 위대한 화가(빈센트 반 고흐), 위대한 사상가(장 자크 루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 파마’는 환자가 자유를 되찾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제약산업의 영향력을 뒤흔들 뿐이다. 그리하여 제약업계는 아편을 더욱 선호한다.

더욱이 ‘장애’의 수가 현격히 늘어난다면 DSM 마케팅에 더할 나위 없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령 가장 최근에 등장한 장애 중 하나인 ‘양극성 장애(조울증)’의 경우, 언론매체의 대대적인 선전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실상 양극성 장애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욕망이라는 만인이 겪는 감정적 고통을 심각한 병으로 둔갑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은 꿈의 대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달려간다. 그러나 일단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꿈은 또다시 저만치 멀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미소는 눈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양극성’을 띠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 하루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가도, 다음 날이면 기분이 바닥을 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정신병성 우울증의 경우엔 때로는 욕망의 대상이 죽음 그 자체일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정신증으로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것인지, 아니면 신경증으로 기분이 좋다가 처지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인지를 제대로 판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양극성 장애 진단이 단순한 기분변화를 범죄행위로까지 뒤바꿀 수 있다. 사실상 DSM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가.(3)

“과잉행동장애(ADHD)는 창조된 병이다”

아마도 오늘날 가장 걱정스러운 주요 ‘장애’ 중 하나를 꼽으라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를 몰라 불편함조차 호소할 수 없는 아동들이 주요 환자라 더욱 우려스러운 장애다. 오래전부터 이 아동기의 문제는 이 분야의 개척자로 간주돼 온 정신분석학자나 소아정신과전문의가 치료를 맡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 각자가 겪는 어려움이 개별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보기에, 이들의 증상을 총체적으로 ‘장애’라는 말로 통칭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각종 부모 단체로부터 제대로 된 처방을 내놓지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곤 한다. 문제는 그러한 단체 중에는 심지어 제약회사의 지원을 받은 곳도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마구잡이식 진단은 흡사 기침을 질병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이미 고위층에서부터 이런 행태를 부채질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령 2017년 9월 29일, 낭테르 대학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아녜스 뷔쟁 보건장관과 같은 고위급 인사의 후원을 등에 업고, ADHD 진단에 매우 호의적인 콘퍼런스가 개최됐다. 문제는 당시 해당 학회에 등록된 정신분석가들이 경비원들의 저지로 콘퍼런스장에 입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프랑스 질병분류체계에서는 ADHD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신의학계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프랑스소아청소년장애분류체계(CFTMEA)를 기준으로 하든, DSM의 선택적 사항을 반영한 국제질병분류체계(ICD-10)를 기준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프랑스 질병분류체계에서는 이 증상을 그저 산만함의 문제로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산만한 행동은 결코 병이 아니다. 아동이 산만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가족 간 문제,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 등)은 매우 다양하다. 일단 해당 아동과 그 가족을 만나 상담부터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ADHD 진단의 경우에는 산만함이라는 증상이 금세 병으로 둔갑한다. 최악의 경우 ‘신경발달상의’ 원인이 문제라는 진단까지 내려진다. 비록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꾸준히 확인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신경발달상의 문제가 원인이라는 주장에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제롬 케이건 하버드 대학교수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ADHD는 진짜 병이 아니다. 창조된 병이다. (…) 말하자면 미국에서 (ADHD 치료약으로 널리 쓰이는) 리탈린을 복용하는 아동 540만 명 중 90%는 어떤 이상 증상도 겪고 있지 않은 셈이다.”(4) 프랑스에서도 파트릭 랑드망 박사가 저서 『모두가 과잉행동장애라고?』(알뱅미셸·2015년)에서 ADHD를 발병시키는 생물학적인 원인이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고 역설했다. ADHD의 증상은 특수성을 띠지 않으며, 어떤 생체지표(질병이 진행되는 단계 중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태학적, 생화학적, 분자생물학적 변화-역주)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경생물학적인 가설은 전혀 입증된 바가 없는 셈이다. 

ADHD의 창시자인 레온 아이젠버그도 2009년 세상을 뜨기 7개월 전에 이렇게 지적했다. “ADHD는 창조된 병의 전형적 예다. ADHD의 유전적 소인은 철저히 과대평가됐다.”(5) 그럼에도 대대적인 로비에 힘입어, 2011년 이후 4~17세 미국 아동의 약 11%(640만 명)가 ADHD 진단을 받았다고 미국질병예방통제센터는 발표했다. 많은 경우 리탈린(메칠페니데이트)이 처방됐는데, 이 약품에는 프랑스질병분류체계에서 마약류로 간주되는 성분이 함유돼 있다. 이와 같은 암페타민 대량 처방 행위(리탈린은 암페타민이 모태가 돼 탄생한 약이다)는 분명 비만치료제 메디아토르나 갑상선 호르몬제 레보티록스의 대대적인 부작용 사태에 견줄 만한 심각한 의료 스캔들을 몰고 올 수 있다. 리탈린에 함유된 마약 성분은 분명 중독성을 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아직 논쟁 중이기는 하나, 리탈린 복용 아동과 마약 복용 청소년 사이에 상관성이 존재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최전선에 내몰린 아동들의 비극

이제는 아동도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동도 어른처럼 나이에 걸맞은 규범을 지키라고 요구받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신속하게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요구에 맞지 않는 사람은 단박에 ‘모자란 자’로 간주되곤 한다. 그래서인가. 오늘날 프랑스 교육부 온라인 사이트에는 별다른 명확한 증거도 없이 ADHD가 ‘신경병성 질환’이라는 설명과 함께, 교사용으로 자세한 조기 진단 가이드 항목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는 소위 ‘진단을 위한 증상’이란 실상 거의 모든 아동들에게 적용된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정상적인 문제와 병리적인 문제가 또 혼란스럽게 뒤죽박죽된 셈이다.

과거 미셸 푸코는 국가와 종교가 성(섹슈얼리티)에서 오는 ‘문화에서의 불안’(프로이트 저작의 제목으로, 국내에는 ‘문명 속의 불만’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는데 충동의 욕구와 문화의 제약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 관계를 의미한다-역주)을 억눌러 왔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신권적 가부장제의 억압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성’이라는 단어가 보다 폭넓은 의미로 해석되는 오늘날, 과거의 억압은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재조직되고 있을까? 억압의 바통을 은밀히 이어받은 것은 제약 산업이다. 제약업계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불면증을 앓는 자, 깊은 실의에 빠진 자, 극심한 신경과민에 시달리는 자, 자살충동을 느끼는 자, 그 누구도 걱정하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잘못이 없다. 모든 것은 그대들 유전자와 호르몬의 잘못일 뿐. 그대들은 신경발달상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처방한 약이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리라.” 
말하자면 모든 것이 신경전달물질의 문제, 역학상의 문제로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것이 자리할 틈은 없다. 그러니 남녀가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트러블, 내밀하게 얽힌 부모와 자녀 간의 복잡다단한 문제, 상하관계나 권력 관계에서 연유하는 힘의 문제, 이 모든 문제가 결국엔 유년기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이제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곳에서든지 최전선에 내몰린 것은 아동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ADHD 사안은 더욱 혼란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억압받고, 가장 먼저 두들겨 맞고, 가장 먼저 교정교육을 받는 것은 아동이다. 옛날에는 어린 학생이 산만하게 굴면 교사가 그의 귀를 잡아당겨 혼쭐을 냈다. 조금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그나마 인간적인 편이었다. 이제는 교사가 산만한 아동에게 장애 진단을 내려야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개인 간의 인간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존속하지만, 사이비과학은 자꾸만 이 관계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려고만 한다. 사상 최초로 이른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아동들이 마구 ‘두들겨 맞고’ 있다. 

과거에는 매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입증한 바에 따르면 다양한 층위를 가진 신화)(6)는 아동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나타났었다. 그런데 현대에는 ‘빅 파마(Pharma)’가 빨간 외투를 걸치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Papa)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 빨간 외투에 가려진 흐릿한 형체의 주인이 실은 성 니콜라스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백정(기근으로 팔 고기가 없어진 푸줏간 주인에게 3명의 아동이 잡혀 죽임을 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성 니콜라스의 기도로 살아난 기적에 대한 전설에서 인용-역주)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제라르 포미에 Loïc Ramirez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여러 대학에 명예교수, 파리 7대학 연구소장. 주요 저서로는 『신경과학은 어떻게 정신분석학을 입증하는가(Comment les neurosciences démontrent la psychanalyse)』(Flammarion·Champs Essais 총서·2010)와 『여성성, 끝없는 혁명(Féminin, révolution sans fin)』(Pauvert·파리·2016)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미국의 정신건강에 관한 성경(La bible américaine de la santé menta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12월.
(2) Stefan Zweig, 『악마와의 투쟁: 클라이스트, 휠덜린, 니체(Le Combat avec le démon: Kleist, Hölderlin; Nietzsche)』, 문고판, Biblio Essais 총서, 파리, 2004년(초판 발행일: 1925년)
(3) 필자도 생안느 병원에서 DSM밖에 모르는 한 정신과전문의가 놓친 우울증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결국 환자는 자살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4) 『What about tutoring instead of pills?』, <Spiegel Online>, 2012년 8월 2일, www.spiegel.de.
(5) 『Schwermut ohne Scham』, <Der Spiegel>, 함부르크, 2012년 2월 9일.
(6) Claude Lévi-Strauss, 『처형당한 산타클로스(Le Père Noël supplicié)』, Seuil, La librairie du XXIe siècle 총서, 파리,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