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허망한 꿈, ‘민주적인 유럽’

2018-02-28     프레데리크 로르동 | 프랑스 CNRS 연구부장

프랑스 좌파신문 <리베라시옹>의 브뤼셀 특파원 장 카트르메르와 그의 동료들은 마크롱의 당선으로 나침반 바늘이 남반부(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경제위기가 극심했던 유럽연합 회원국들-역주)를 가리키게 된 것이 분명하다며 ‘전문가’답게도 유로존의 위기가 해결될 것이라고 선언했다.(1) 그러나 이들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로존의 남반부 위기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아주 단순하고도 훌륭한 한 가지 이유 덕분에 말이다. 

 
즉, <공산당 선언>의 문구를 뒤집어보면 ‘유럽’이라는 망령이 좌파를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의 문구를 뒤집음-역주). 최근 선거에서 확인된 바가 있다면, 유로화야말로 권력 장악이라는, 좌파의 모든 전략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좌파는 그토록 길었던 자신들의 침묵을 깨고 바삐 서두른 덕분인지, ‘유로화의 의회(유럽의회)’가 지난 26년간의 실수(유로화가 통용되기 전 1992년 2월에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을 통해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의 출범을 위한 계획이 수립됨-역주)를 만회할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는 모욕적인 표현이 돼버린 “사회주의적 유럽”, “민주주의적 유럽”이라는 약속이 재탕되는 것 아니겠는가. 일견 훨씬 신선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속이 텅 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공약(空約) 말이다.
 
비장미가 감도는 “유로화의 의회”
 
그리고 이는 언제나 그랬듯, 이론에만 빠삭한 사회민주주의 진영 지식인들의 ‘열정’으로 움직여왔다. 열정이라고는 종이에 적힌 추상적 관념, 실현할 수 없는 맹세, 실천력 없는 계획이 전부인, 말 그대로 ‘언어유희’만 늘어놓는 그런 열정 말이다. 체리의 꼭지만 요리조리 움직여 달라 보이게 하는 식의 변신이 그것이다. 예컨대, 대선 기간에 브누아 아몽의 선거 자문역들이 『유럽을 위한 민주화 조약』(2)에 열광하도록 이끌었던 변신이 그 대표적 사례다. EU 경제통화동맹의 반민주성이 다름 아닌 ‘유럽연합조약(EU조약)에 근거하고 있음’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EU조약에 관해서, 『유럽을 위한 민주화 조약』의 저자들은 그 무엇도 건드릴 생각이 없다. 아무리 이 문제가 너무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두 가지 방정식, 아니 따지고 보면 동일한 한 가지 방정식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EU조약이 변하지 않는다면 반민주주의가 지속된다. 
EU조약이 실질적인 민주화를 담도록 개정돼야 한다.
 
선이 꼬였을 때는 두 가지 해결방식이 있다. 꼬인 선을 하나하나 풀어내거나, 예쁜 색의 선을 가져와 아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울 것도 없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초등학생 수준의 이들이 구상한 ‘유로화의 의회’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근사한 의회는 어떤 권한을 지니게 됐을까? ‘발언 권한’, ‘의견 교환에 참여할 권한’, ‘거버넌스 대화’에 참석할 권한, ‘결의안’을 내놓을 권한, 심지어 ‘장려할 권한’(3)까지 생긴다! 예컨대 의회는 우아한 발레복 차림으로 ‘과도한 적자 방지책’(제8조)에 개입할 수 있는 셈이다. 또한 의회는 “자신의 견해를 고려해야 하는 유로그룹의 권고를 수정하고 변경할 권한”(제8-3조, 내 의도로 이 부분을 강조했다) 또한 보유한다. 그러나 조항 전문 어디에도 의회의 ‘의무’가 무엇인지는 암시조차 없다.
 
공정하게 이야기해보자. 최대치로 따지자면, 의회는 재정원조 관련 조약문서들에 대한 키를 쥐게 된다. 이 조건에서라면 의회는 EU 회원국이 EU 조약 규정에 따르는 속도와 방식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원국들에게 EU조약 규정은 변하지 않는 채로 강제될 것이다. 이 규정에 따라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의 재정 적자를 EU 기준인 GDP 대비 3%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주택보조금(APL)의 인하, 일반사회보장분담금(CSG)의 인상, 터무니없는 예산삭감 따위를 밀어붙이고 있다.
 
“사회적인 유럽”만큼 허망한, “민주적인 유럽”
 
사실, 이 실속 없이 시끄러운 『유럽을 위한 민주화 조약』에서는 내면화된 패배감이 벌써 어렴풋하게 새어 나왔다. 이 책은 조약의 비준 조건을 예상하는 부분에서 이미, “예컨대 독일 같은 어느 강대국의 동의가 없더라도”(op. cit., p. 44) 발효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4) “예컨대”라고 하긴 했지만, 이는 그저 하나의 예시, 정말 예시에 불과하다. 독일이 비준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유로존 가입유지 여부에 상당한 파급력이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독일이 유로존을 탈퇴한다면, 유로화는 ‘유로’라는 이름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아마 다른 국가들이 독일의 뒤를 따를 것이고, 이는 유로화의 역사적인 폭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사실 그런 끔찍한 결말의 위험을 감수하느니, ‘민주화’라는 웅대한 프로젝트를 얼른 거둬들이고 만 것이다. 이 모든 암담한 생각들이 침묵 속에서 스쳐 간 덕분에, 불필요한 불안감이 조성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사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근심을 거두지 못한 상황이다. 역내 강대국인 독일이 각 회원국의 사정을 고려한 ‘민주화’ 프로젝트를 집어삼킬 방안을 언제든 짜낼 수 있다는 점이다. EU 회원국들이 힘겨루기 할 최소한의 전략조차 없었을 상황에서, 일찌감치 허허벌판으로 후퇴한 것은 어쩌면 잘한 일이다. 적어도 유럽방정식의 실체를, 좌파에게 분명하게 일깨워준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1. EU조약에 의해 금지된 가장 핵심적인 조치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침이란 진보적 방침이 아니다.
2. (각국) 의회의 토의 대상에서 가장 주요한 공공정책의 일부 내용을 빼서 EU조약의 규정을 절대 불변의 성역으로 남겨두는 것은 모든 민주적 주장의 신빙성을 완전히 떨어뜨리는 모순이다.
3. 진정한 의회를 설립해 현재로는 재논의가 불가능한 결정들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유럽조약의 개정만이 유럽을 민주적으로 만든다는 계획에 부합한다.
4. 현 상황에서 이런 개정을 독일은 딱 잘라 거부할 것이다. EU 내 논의에서 자신이 소수파가 된다면, 독일은 (현재의) EU 가입 원칙을 선호할 것이다.
 
EU의회의 개정안을 들이민다면, 독일은 (아마 다른 나라들의 지지를 받으며) 무조건 ‘노’를 외칠 것이다. 그 의회가 사실상 핵심 문제에 관해 발언권 일체를 빼앗겨 들러리에 불과한 존재로 남은, 무언극 배우나 다름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동안 오류에 빠진 채, 혹은 자발적으로 눈이 먼 채 지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오래갈 수는 없다. “사회주의적인 유럽” 때처럼, “민주적인 유럽”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5) 그 결과로서, 좌파가 유럽의 가치라는 명목 아래 ‘유로화’라는 환상에 계속 얽매인다면, 좌파가 집권하는 일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좌파가 지닌 유럽 딜레마
 
바로 이 불가피한 결정적 지점에서 전략적 딜레마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 딜레마의 내적 긴장감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끓어올라, 『부르주아 집단의 환상』(6)을 공동으로 펴낸 두 저자의 의견마저 엇갈리게 할 정도다. 그중 한 명인 스테파노 팔롬바리니(7)에 따르면 유로존 탈퇴 관점이 현재의 좌파 선거구 차원에서만 고려될 수밖에 없으며, 일각에서는 “유로존 탈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나라의 망조”라며 울부짖는다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 말도 옳다. 2010년 이후 계속된 좌파 내의 유로 관련 논의는 그간 수많은 분열을 가져왔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리고 바로 이 즉각적인 반응이야말로, 그리스의 파산조차 그 숨통을 끊어놓지 못했던 “또 다른 유럽”이라는 끈질긴 몽상을 반영하는 증거다. 그리고 “유로화의 의회”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좌파의 그릇된 버릇이야말로 그런 몽상의 가장 비장한 발현인 셈이다. (지지율이 낮은) 아몽을 물러나게 하고 (아몽보다 지지율이 높은) 멜랑숑을 내세우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즉 좌파의 승리보다도 차라리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집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로존 잔류일 것이다(아몽은 사회당 출신, 멜랑숑은 극좌파 성향의 좌파당 출신이다-역주).
 
반면, 유로존 탈퇴의 가장 강경한 찬성 인사인 브뤼노 아마블은 이렇게 반박한다. 만일 이 유럽 문제가 정말 그토록 결정적인 지점에 있다면, 그리고 유럽통합론자들이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더라면, EU 노선에 한해서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는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이 그토록 급격히 떨어졌을 리는 없다고. 아마블의 의견 또한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견 이렇게 대조되는 듯한 두 가지 논거를 어떻게 동시에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정말 ‘일견’으로만, 어쨌거나 ‘정치적 논리’의 - 진정한 논리는 결여된 - 관점에서 볼 때만 대조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여론의 생성 과정이 완벽한 이성적 차원의 문제였다면, 이 두 논거는 완전히 대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치적 여론의 생성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이런 경우도 있다. 일부 좌파 지지층은 EU 정책의 ‘특정한’ 내용 그리고 그에 따라 각국의 정책 실행에 가해지는 제약을 열렬하게 반대하지만, 유로존 탈퇴라는 ‘좀 더 포괄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된’ 생각에는 더욱 반대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긴축하는 유럽’에 계속해서 맞서지만, 유로존 탈퇴 여부를 질문하자마자 “절대 안 돼!”라고 답할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에 개인과 집단의 정치적 사고 형성과정에 늘 등장하는, 불균형과 절뚝거림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너무 오래도록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는데, 정치는 ‘정서’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로존이 일궈낸 하나의 ‘성공’이 있다면, EU의 와해와 관련한 모든 생각이 불안의 정서, 심지어는 비할 바 없는 수준의 공포와 연결됐다는 것이다. EU 정책의 구체적인 ‘디테일’에 대한 견해차로 생겨난 모든 것을 없앨 지경으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 위기는 유로존 희생자의 가장 순수한 밑바닥에 자리한, 가장 비극적인 예시를 보여준다. 감옥의 문이 열린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간수 곁에 머무는 편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인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야말로 여전히 가장 인상적인 경우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음에도, 그리고 유로존의 실체를 누구보다도 제대로 파악할 만한 자리였으면서도 계속해서 유로존으로 되돌아가기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감옥 창살에 꽃무늬 커튼만 달아놓으면 된다는 걸까?
 
엘리트 계층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는 EU 문제가 지닌 정서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하며,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현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고학력 계층은 현 상황의 급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 자신이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믿는 이 고학력 계층이야말로, 가장 일관성 없는 지점에 서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불안의 정서에 사로잡혀 있으며, 유럽적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을 품은 채 추상적인 국제주의자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들 덕분에 그들은 -그 경제적, 사회적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또 다른 유럽” 혹은 “유로화의 의회”에서 상상 속의 대피처를, 내밀한 모순들에 대한 환상 속 해결책을 끝없이 찾는 이들이다. 그런데 팔롬바리니가 지적하듯, 안타깝지만 좌파의 정치적 전략은 바로 이들에게 기대야 한다.
 
그렇다면, 서민층과 좌파 고학력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힘의 축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자는 EU 정책의 폐해에 직격탄을 맞았을 뿐 아니라 유럽 통합주의자들의 선전에 가장 덜 사로잡힌 이들이며, 후자는 예민한 정치적 성향 덕분에 신경증적 위기라는 주제와 EU 공동체를 분리시켜 생각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전자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만큼, 유로존을 탈퇴해야 함을 의심 없이 확신한다. 그리고 후자에게는 특별 처치를 해줘야 하는데, 이들에게 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적어도 우리는 이 후자의 사람들이 적절한 우려를 표하고 있음을 인정해줘야 한다. 비록 EU 잔류에 대한 희생을 직접적으로 치르는 이들에 대한 우려가 일시적이거나 우리의 무관심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들의 우려란, EU 협정 그 자체가 제아무리 지독한 것이라 하더라도, 협정의 해체는 자칫 ‘국가의 퇴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방법으로서, EU 대신에 “모든 주권주의의 연합”이라는 전략을 취한다면, 그것 또한 파멸의 시작일 수밖에 없다.(8) 그렇기에 좌파가 주도하는 유로존 탈출은 좌파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여줘야만 한다. 
 
교체라는 역사적 관점
 
물론, 유로존이나 EU 혹은 또 다른 국제조직에서 탈퇴한 나라가 탈퇴 자체만으로 세계에서 고립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주장일 것이다. 예컨대 브렉시트 때문에 대영제국이 ‘은자의 왕국’으로 탈바꿈했다고 주장하려면, 영국이 자유시장에서 ‘후퇴’했음을 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영국의 ‘보이지 않는 손’을 우려한단 말인가!) 비록 브렉시트의 경우에는 국가주의의 강력한 흔적마저 느껴지는, 우파가 주도한 유로존 탈퇴의 전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실질적 국제주의가 상상적 국제주의를 긍정적으로 대체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9) 이 상상적 국제주의는 자신들의 지리적 열망을 충족하기 위해 결국에는 유로화를, FTA를,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을 비호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실질적 국제주의가 좌파를 위한 EU 딜레마 해결에 어떻게 일조할 수 있을까? 실질적 국제주의는 유럽의 엘리트 계층을 외로이 내버려 두지 않고서 이들에게 ‘교체’라는 역사적 관점을 심어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좌파의 과도기적 목표인 유로화 탈출이 이 엘리트 계층에서 그 무엇도 빼앗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이 역시 아무 방식으로나, (보통은 다른 계층이 치르게 되는) ‘아무 대가도 없이’ 이뤄질 수는 없다. 즉 화폐와 상업, 재정의 국제주의라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의가 내놓은 최악의 제안들에 근거한 이 국제주의적 욕망의 무분별한 표출을 그만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엘리트 계층에게 (유로존 유지를 위한) “또 다른 유로화”, “좌파의 유로화”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계속 설득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사실상 좌파의 패권 운명을 손에 쥔 이 계층에게, (유로존을 탈퇴한다고 해도) 그들이 마음속에 늘 품고 있는 일반적인 유럽통합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님을 말해줘야 한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 새로운 제안을 해야만 한다. 유로화라는 쇠퇴한 약속, 그러나 좌파 부르주아로서는 그 공백이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약속을 충분히 대체할 만큼 강력한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 “새로운 유럽 프로젝트”라는 약속, 역사적 관점이라는 확고함을 갖춘 약속이어야 한다.
 
“새로운 유럽 프로젝트”를 위해
 
유럽인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하는 것은 경제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위대한 장 모네(1888~1979, ‘EU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역주)는 -언젠가 그의 동상이 철거될 날이 분명 올 것이다(10)- “유럽이 문화가 아니라 시장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이 문장의 진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모네가 걸어온 행보를 감안한다면, 문화를 중시한 그의 발언이 합당하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현실의 유럽은 이미 시장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의 유럽화는 모든 영역에서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은가. 학술연구, 대학 혹은 고등학교 내 연구, 예술, 체계적인 교차번역 분야,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사료편찬 작업…. 이 모두 ‘유럽화’ 만들기에 딱 알맞으며, 이런 작업들을 통해 ‘유럽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의 유럽”을 향한 정책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데, 특정 사회계층만이 이런 정책의 주요한 수혜자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은 서민층을 흡수하는 데 여태껏 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럽으로서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용서나 속죄의 구조라는 명분이 아니라, 바로 이 서민층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정치적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서민층이 지닌, 지극히 합당한 적개심은 말하자면 마스트리흐트 조약 이후 유럽을 괴롭혀온 끈질긴 상처가 아니던가? 그러니 유로화에서 벗어난 이 새로운 유럽이 서민층과 좋은 관계를 맺길 바란다면, 그들에게 곧바로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 재정원조라는 구체적인 제안으로 호소하는 게 유리할 것이다. 유로화라는 단일통화의 오랜 지배 속에서 쇠퇴해진 국가들을 대신할, 바람직한 모습을 되찾는 데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다. 교외 지역의 대대적인 재개발 계획, 디지털 서비스 확충, 제조업 부활을 위한 기금 조성, 공교육 네트워크에 대한 재정원조, 비영리 단체 지원 등은 “브랜드이미지”를 진심으로 제고하길 바라는 유럽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디어들 아닌가.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아이디어만큼, 그 수단들 역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사실 바로 이곳이야말로, 허공에서 휘발되는 말뿐인 공약과 견고한 정치적 프로젝트 사이의 차이점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어느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은, 그 프로젝트가 동원하는 자원에 아주 정확하게 비례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자원을 전반적인 양적 목표에 따라 아주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오늘날 유럽 GDP의 1%에 불과한 예산 수준을 중기적으로는 3%, 이후에는 5%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물론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며, 이미 에라스무스(EU 내 교환학생 프로그램-역주), FEDER(EU 국가 간의 불균형 해소를 위한 투자 장려 프로그램-역주) 등의 비슷한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영역을, 그리고 특히 그 적용 대상을 지금껏 완전히 도태됐던 계층으로 대폭 확장해야 하며, 이 모든 행동의 규모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역사적 차원의 담론 내부로 결합하며, 이 담론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새롭고 가시적인 제도적 구현 방식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이 구현 방식은 필수적인 사항이기도 한데, 어느 기관이 그 개입의 영역과 규모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관이 ‘의회’ 형태가 아니라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유로화의 의회”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것이다. 이 유럽의회야말로, 유로존이라는 화폐공동체의 돌이킬 수 없는 비민주성을 감추는 데 제 목적을 지닌 ‘민주적 가식’의 기관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유럽에 어울리는 기관은) 의회이되 국회가 지닌 온전한 지위는 주장할 수 없는 의회체여야 한다. 왜냐하면 (각국 정부가 지닌) ‘입법적’ 특권을 전혀 누릴 수 없으며, (앞서 언급한) 재정적 자원의 할당만을 토의할 수 있으며 그와 관련한 징수 범위를 결정하는 것만이 이 기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각국 정부가 유럽 차원의 예산에 원조할 기금을 이행하는 데 그 징수 범위를 직접 결정하거나, 혹은 각국과 유럽 간의 완전한 공유방식을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만 자금 할당의 역할만 보더라도, 특정 프로젝트가 일부 유럽 국가에만 유리하게 배정되기 시작하면 각국의 국가적 이기주의가 세를 떨칠 수 있다. 심지어 전 유럽을 위한 고등학생 혹은 연구자 교류 프로그램을 만든다 하더라도, 특정한 지역에 이런저런 시설과 인프라를 설치하게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다방면에 걸친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회의체와 -그런 만큼 각국의 대립관계가 배제된 단체- 특정 지역에 집중된 프로젝트를 위한 일종의 유럽 사무국 사이에서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혹은 모든 형태의 협력)을 고려해야 한다. 이 유럽 사무국은 말하자면 EU위원회의 새로운 현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초기의 소명에 맞게 유럽 전체의 이익을 구현하는 것을 책임으로 한다. 그러나 입법적 권한, 그리고 FTA의 수호자 같은 성격은 사라진 형태다.
 
오직 난청인 사람들, 혹은 위선자들만이 여기 이 EU위원회와 이별하는 것을 ‘유럽’ 그 자체와 이별하는 것과 동급으로 여길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이별은, EU에 다가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EU 협정들로, 유럽은 분명히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그 지점에 이른다면, 정치적으로 가장 눈이 멀었을 때조차 자신이 지적으로 행동한다고 믿었던 고학력 부르주아들도 유럽 그 자체를 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며, 이는 급진적인 변화를 대가로 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도 단일통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단일통화를 포기함으로써 말이다. 유럽은 지금껏 각국 정부에 금지했던 것을 그들에게 돌려줘야만 유럽인들의 호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또 다른 것을 실험하고 시도하며 도전해볼 근본적인 민주적 권한을 되돌려줘야만 한다. 유로화라는 구속복을 벗는다면, 각 정치체가 지닌 주권상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무엇이든 새로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시장금융의 면밀한 조사, 은행의 국유화, 주주 권력의 제어,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등 좌파적 전략을 구상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EU의 신뢰도가 얼마나 되든 간에, (앞서 말한) 이 모든 것 중 그 무엇도 현재 EU -정치공동체에 제 법을 강요하는 정치적 비공동체 -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공동체를 법령으로 뚝딱 만들어내지 않으려 한다. 주권의 공백을 실현하고 과두제적인 몰수를 실행하느니  말이다. 설사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픈 욕망이 진정 있다고 하더라도 한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그중 아무 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의 유럽은 그냥 종말을 맞이하거나, 부당한 가운데 목숨만 부지하는 수밖에는 없다. 혹은, 모든 것을 완전히 혁신하는 수도 있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시작하는 것. 바로 그래서 이 “새로운 유럽 프로젝트”에서는 제도적 창조성과 심지어는 재정적 수단보다도,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치적 담론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유로화를 잊게 하고, 유럽의 지평을 재창조하며, 동시에 각국의 입법적 주권을 부활시킬 만큼 강력한 역사적 의미, 영감 말이다. 현재 이런 혁신은 각국의 정치공동체 수준에서나 가능할 터인데, 그것이 유로존 내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데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유럽의 제안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의 상황에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다른 유럽 국가의 좌파세력 역시 같은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을까? 그리스의 급진좌파당 시리자나, 스페인의 좌익정당 포데모스가 어떤 곤경에 빠졌는지만 생각해봐도 그 대답은 명확해진다. 우리는 유로화라는 풀 수 없는 난제를 옆으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이 정당들,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이들을 곤경에서 구해낼 것이다. “민주적인 유로화”라는 존재하지 않는 꿈을 위해 10년을 허비한, 바루파키스(그리스 재무 장관 역임 당시, 그리스 경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채권국들의 신자유주의적 처방책에 반기를 듦-역주)의 뒤를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유럽 프로젝트는 전 유럽에 걸친 정치적 제안을 지속시키자는 단순한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제안은 그 자체로, 장기간의 목표를 지닌다. 유로화 탈출에 대한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유로화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좌파의 희망을 앗아가는 무덤이 될 수 있겠지만, 유럽 정치공동체라는 이상은 곧 세계무대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말이다. 우리가 이제 이 공동체에 역사적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만 동의한다면, 유럽 공동체는 얼마든 구제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진실로 “더 가까워진”, 유럽 대륙인들 간의 오랜 친목의 완성처럼 주어질 것이다. 현재 EU가 지닌 자유주의적 독소가 완전히 제거된, “새로운 유럽 프로젝트”가 제 시간과 수단, 기회를 온전히 제공할 것이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이며 철학자. 본 기고문의 표현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필자 본인의 책임 하에 있음을 사전에 밝힌다. 로르동의 대표적인 저서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 언제까지? 금융위기와 이별하기 위해』, Raisons d’agir, 2008.
『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Marx et Spinoza 자본주의, 욕망, 노예근성: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La Fabrique, 2010.
『D’un retournement l’autre 또 다른 급변』, Seuil, 2011.
『La société des affects 정서의 사회』, Seuil, 2013.
『Imperium. Structures et affects des corps politiques 지배권: 정치체의 구조와 영향력』, La Fabrique, 2015.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 및 국문학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1) Jean Quatremer, ‘L’élection de Macron tranche la question européenne 마크롱의 당선이 유럽문제를 해결했다’, <Libération> 2017년 5월 9일자.
(2) Stéphanie Hennette, Thomas Piketty, Guillaume Sacriste, Antoine Vauchez, 『Pour un traité de démocratisation de l’Europe 유럽을 위한 민주화 조약』, Seuil, 2017.
(3) 『Pour un traité de démocratisation de l’Europe 유럽을 위한 민주화 조약』, op. cit., pp. 67~71.
(4) 조약이 규정하는 비준 조건을 볼 때, 무척 일관성 있는 가능성이다. 이 비준조건은 EU 전 인구의 최소한 70%를 대표하는 회원국 중 절반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참고로, 독일은 전 인구의 24%를 대표한다.
(5) François Denord et Antoine Schwartz, 『L’Europe sociale n’aura pas lieu 사회적인 유럽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Raisons d’agir, 2009.
(6) Bruno Amable et Stefano Palombarini, 『L’Illusion du bloc bourgeois 부르주아 집단의 환상』, Raisons d’agir, 2017.
(7) Stefano Palombarini, ‘Face à Macron, la gauche ou le populisme? 마크롱에 대항해, 좌파 혹은 포퓰리즘?’, Mediapart, 2017년 7월 10일자.
(8) ‘Clarté(명료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홈페이지 2015년 8월 26일자.
(9) ‘Leçons de Grèce à l’usage d’un internationalisme imaginaire et en vue d’un internationalisme réel 상상적 국제주의에 쓰일 법한, 그리고 실질적 국제주의를 위한 그리스의 교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홈페이지 2015년 4월 6일자.
(10) François Denord et Antoine Schwartz, op. cit.; Annie Lacroix-Riz, 『Aux origines du carcan européen 유럽이 지닌 굴레의 기원 (1900~1960)』, Editions Delga, 2016. Yanis Varoufakis, 『Et les faibles subissent ce qu’ils doivent? 약자들이 응당 감수해야 하는 것을 감수한다면?』, Les Liens qui Libèrent, 2016. François Ruffin, 『Faut-il faire sauter Bruxelles? EU를 와해시켜야 할까?』, Editions Fakir,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