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의 강국으로 떠오른 이란
2018-02-28 베르나르 우르카드 |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CNRS) 명
사우디아라비아와 대치하던 중동 냉전 시대, 이란은 수니파 국가 내 소수 시아파 또는 그 분파 세력들에게 의지했다.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를 도와 지하디스트를 소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경쟁 구도는 민족적이나 종교적이 아닌 정치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란혁명수비대가 시리아와 이라크에 개입하면서 이란은 근대 최초로 해외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셈이 됐다. 2017년 11월 21일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IS 소탕을 선언했고, 이란혁명수비대 산하의 특수부대 ‘쿠드스’의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 “결정적인 승리”를 자축했다. 지하디스트를 상대로 거둔 이번 승리를 계기로, 이란은 국제사회에서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란은 2015년 7월 14일에도 주요 6개국과 함께 그동안 이란에 가해졌던 외교 및 경제적 제재를 해제하는 내용의 이란 핵협상 합의안에 서명하는 외교적 쾌거를 이룬 바 있다.
그러나 이란이 이번 승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이익은 없다. 오히려 중동지역의 패권 장악을 노린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이란에 대한 제재조치 해제를 사실상 거부하면서 이란이 그토록 고대해오던 경제부흥을 가로막고 있다. 사실, 40년 가까이 경제적 고립, 국제적 금수조치, 전쟁위협을 겪어온 이란은 ‘통상적인’ 지역 강대국의 모습과는 이미 거리가 멀다. 이란은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 ‘주변국의 공격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세계화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것에 익숙하다.
정복보다 저항에 가까운 이란의 민족주의
많은 분석가들은 이란이 고립된 이유를 설명할 때, 기원전 5세기경의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문화, 시아파와 시아파 성직자처럼 먼 과거의 사건들을 종종 예로 든다. 그러나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의 정치와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민족주의, 이슬람교, 개방. 이 3개 요소는 이란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또 결합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이란의 정치는 언제나 이 3개 요소들의 균형관계를 토대로 움직인다.
종교적 갈등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국민들의 애국심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다. 그들의 애국심은 이슬람교가 국교로 채택되기 이전에 군림했던 팔레비 왕조(1925~1941) 시기와 석유자원을 국유화했던 1953년에 그 정점을 찍었다. 그리스, 아랍, 터키, 몽골의 침략과 오토만, 러시아, 대영 제국의 위협에 항거하며 정체성과 독립성을 지켜낸 아리아족의 땅, 이 아름답고 영원한 이란의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1)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이런 유산을 온전히 계승했다. 이라크, 산유국, 서방 국가라는 3대 적대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혁명 초기부터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다.(2)
1980년 9월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민족주의와 이슬람교가 뒤얽혀 있던 당시 이란의 상황은 미해결 상태로 박제됐다. 이슬람 혁명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국경사수’라는 시급한 과제 앞에서 힘을 잃었다. 이란혁명수비대와 민병대원(Bassijis)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982년 5월 22일 호람샤르 전투를 통해 호람샤르를 탈환한 것은 영토수복의 문제였지, 이슬람 정치의 승리는 아니었다. 이란 내에서 시아파 성직자들과 최고 지도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영향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란을 지켜내고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하는데 기여한 수백만 명의 퇴역 군인들을 동원할 때뿐이다.
이란의 민족주의는 ‘정복’이 아닌 ‘저항’ 정신을 고양시킨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란은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렸다. 16세기에 근대 국가를 세운 이후에도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패해 영토를 빼앗기곤 했다. 이란이 타국을 정복했던 경우는 1739년 인도의 델리를 침공하고 1795년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점령했던 때가 전부였다. 터키인, 아랍인, 수니파, 기독교인들로 둘러싸여 있던, 이란의 전신이자 시아파 국가였던 페르시아 왕국은 외부영토 정복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란 고원 주변의 국경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만 힘썼다. 티그리스강의 동안(東岸), 카스피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스텝 지대,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주와 헬만드주, 아랍-페르시아만이 이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샤 군대(‘샤’는 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의 주요 임무는 언제 일어날지 모를 소련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란 공화국의 군사정책은 이처럼 방어적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무기금수조치로 인해 미사일, 비행기, 탱크, 대포와 같은 모든 근대적 장비들의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으며, 또한 국가의 전통을 따르려는 방편이기도 했다. 민간인과 민병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불균형적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어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란의 군대는 지속해서 외부를 공격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란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국가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란이 효율적인 방어 수단을 갖추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날 이란에서 권력을 가지고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이라크전 참전 병사들은 과거 이라크가 쏜 미사일이 이란의 도심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래서 탄도미사일 제작을 최대 과제로 고려했다. 그리고 주변국들이 서방 국가들로부터 제공받은 훨씬 강하고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의 이란의 국민적 합의는 핵 분야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핵무기 보유의 필요성 여부에 관해서는 이란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갈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핵 보유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들 동의한다.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이란의 외교적 선택 덕분에 ‘저항’ 정신의 적용 범위는 한층 더 넓어졌다. 이란은 강대국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중요한 사안을 협의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현재 이란은 자신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내세우면서, 이란 핵 합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EU,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낡은 민족주의, 신 개방정책의 걸림돌
새로운 개방정책의 주적은 언제나 해묵은 민족주의다.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통한 승리보다 패배, ‘순교’, 후퇴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란이 혁명의 비극을 겪었던 시기처럼 주변국들이 혼란과 전쟁을 우려하고 있는 현 상황은 이란 시스템의 안정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다. 2013년 대선에서 당선된 로하니 대통령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선거제도를 제한적이되 현실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의 제도적 우위를 보장해주고 있다.(3)
근대 이란의 시작은, 16세기경 투르크계 부족이 세운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사파비 왕조부터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팔레비 왕조 때부터 이미 정치에서 배제돼 있었다. 혁명으로 탄생한 이란 공화국은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면서 반(反)샤 운동을 벌였다(팔레비 왕조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1979년의 이슬람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성직자들과 호메이니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혁명 과정을 이끌었지만, 이란 국민들의 혁명의지를 높이기 위해 움마(Oumma, 이슬람교 신앙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수니파 국가에 속해 있는 소수의 시아파 교도들까지 포용했다. 이슬람권에 소속되기 위해 이스라엘과 극단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자국을 보호하고 이라크의 침공에도 맞서야했던 이란 공화국은 이란으로서의 정체성과 시아파로서의 정체성에 더욱더 집착하게 돼, 중동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소수 민족들과 종파들을 끌어들였다. 아르메니아족,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족, 그리고 1970년대 이라크의 바트주의(Baathism, 단일 아랍국을 구상하는 범아랍주의) 정권에 반대하던 쿠르드족이 여기에 포함됐는데, 대부분은 아랍권과 터키권에 흩어져 살고 있던 시아파 혹은 그 분파에 속한 소수민족들이었다. 이들의 지역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띄엄띄엄 위치해 있어 유사시 포위될 위험이 크다.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시아파 세력의 핵심이다. 몇 세기 전부터 레바논의 강력한 시아파 공동체는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4) 샤의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는 1970년대에 이미 베이루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온건 시아파 정당인 아말(Amal)을 지지하고 레바논의 시아파 성직자들과 교류했다. 호메이니와 친분이 있었던 아야톨라 무사 사드르도 그중 한 명이다. 레바논 내의 이런 네트워크를 이용해 이란 공화국은 프랑스와 미국과 같이 레바논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이라크를 지원하던 국가들을 대상으로 인질극과 테러를 저질렀다. 1982년 7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할 당시, 이란은 이라크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고 UN 측에 주장했지만, 이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이후 이란은 이라크-이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해 레바논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더 굳히게 됐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주요 정치 세력이자 군사적 행동이 가능한 군대이며 이스라엘과 마주한 전방의 첨병이라는 점에서 이란의 안정적인 동맹이었다. 헤즈볼라를 이용한 이란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2000년 5월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했고, 2005년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부에 참여해 시리아 전쟁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의 편에 서서 이란의 특수부대와 시아파 민병대원들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이것은 이란이 유일하게 성공을 거뒀던 경우였고, 다른 시아파 국가들에서 더 이상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의 시아파는 전통적으로 과격한 반정부 성향을 가지고 있다. 쿠웨이트의 아야톨라 모하마드 알 시라지의 지지자들이 그 예다. 이들은 이란 혁명의 혜택을 받았지만 새로 구성된 이란 공화국과는 곧바로 거리를 뒀는데, 간섭을 받게 되면 자신들이 통일된 반정부 세력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다.(5)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은 계속해서 시아파 하자라족을 지원하고 있다. 종교 및 군사 교육을 하고 인도적 차원의 지원도 제공한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하자라족은 부차적인 동맹일 뿐이다. 이란은 탈레반(수니파 무장조직)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페르시아어를 쓰는 수니파 타지크족과도 교류한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시아파도 시리아에 많은 민병대원들을 파견했는데, 시리아에 파병된 해외 군인들 1만여 명 중 2/3가 이란 출신, 특히 특수부대 쿠드스 소속의 군인들이다. 예멘의 경우 시아파의 분파인 자이드파는 본래 이란의 열두 이맘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후티 반란(Houthi rebellion, 시아파 무장 단체 후티와 예멘 정부의 내전)을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면서, 이란은 시리아 내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세력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됐다.
이라크, 시리아, 사우디와의 복잡한 관계
이라크와의 관계는 이와는 성질이 다르고 훨씬 더 복잡하다. 대규모 종교 학교와 시아파 성지가 위치해 있는 곳은 이란의 콤이나 마슈하드가 아니라 이라크의 나자프와 케르발라다. 페르시아계 시아파와 아랍계 시아파 간의 경쟁은 이란과 이라크가 서로 대립하면서, 그리고 이라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가 성직자에게 높은 역할을 부여하는 ‘성직자에 의한 통치(Velayat-e-Faqih) 이론’에 반기를 들면서 심화됐다. 그러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부가 몰락하면서 이란은 이라크와 어색하면서도 좋은 관계가 됐다. 이란은 시아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라크의 새로운 내각을 지지했고, 상업적 교류는 활발해졌으며, 영향 네트워크와 민병대원 네트워크는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에서 입지를 넓혀가는 도중에 이라크의 강력한 민족주의의 벽에 부딪혔다. 이라크의 민족주의는 1세기 동안 유지해 온 독립, 바트당의 중앙집권주의, 그리고 8년 동안 지속된 이라크-이란 전쟁(1980~1988)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 상태였다. 결국 이란과 이라크 간의 골은 또다시 깊어졌다.
하이데르 알 아바디 이라크 총리는 이란과의 경제 교류를 늘리는 것과 이란이 IS를 격파하기 위해 운영하고 지휘하고 있는 쿠드스 부대와 시아파 민병대원들을 지원하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라크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IS가 점령했던 모술을 탈환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라크의 정부군이었고 이란군의 활약은 미미했다. 이란은 현실주의 정책(Realpolitik)과 국방우선 정책으로 인해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 이란으로서는 이라크 정부가 안정되기를 바라면서, 바스라에서 쿠르디스탄까지 이어지는 국경 주변의 완충지대와 시아파 성지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다.
시리아에는 시아파 신자들이 거의 없다. 알라위파(시아파에 속하는 과격한 분파)는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 재임 시절(1971~2000) 시리아와 이란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시아파’에 편입됐다.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은 이란 제재가 해제된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 다음으로, 그리고 국가수반으로서는 가장 먼저 이란을 방문했다. 시리아와 이란의 동맹 관계는 모든 지역적 전쟁에서, 특히 지하디스트를 상대로 한 모든 전투에서 이어졌다. 이란은 지하디스트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이란 국경 주변의 방대한 지역을 사우디아라비아와 기타 중동 산유국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란의 영향력 증대를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대립 구도가 심해지면서 수니파 국가 내 소수 시아파 세력들과의 관계는 한층 더 중요해졌다. 미국이 시리아에 개입해 201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2003년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지하디스트를 몰락시키면서 이란은 뜻하지 않은 혜택을 입었다. 이란 국민들의 눈에 사우디아라비아는 1979년부터 이란 제재가 시작된 틈을 타 서방 국가들의 무조건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경제, 언론, 정치 제국을 건설하고 중동 지역 전체를 호령한 오만한 왕정으로 비추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갈등을 겪고 IS와 알카에다의 타크피리(Takfiri, 이단과 시아파의 처단)와 투쟁을 벌인 사건이 이란 국민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지점은, 무능하기로 유명한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친근하고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현 정권을 가까이함으로써 시리아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1980년 이라크 침공 때와 같이 외부 공격에 대해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슬람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이란
최근에는 ‘저항적’이 아닌 자발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란혁명수비대와 민병대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외교정책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수니파 국가 내 소수 시아파 세력들은, 주변국들뿐만 아니라 엄격한 민족주의적 전통을 지지하는 이란 국민들과 사회제도 내에 이슬람 신자들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꺼리는 개방주의자들에게도 고민거리다. 또한 이라크-이란 전쟁의 참전 용사들과 1979년 혁명의 주체들 역시 이 시아파 세력들의 부상을 우려하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 새로운 세대의 등장, 교육수준의 향상이 이란 사회를 통째로 바꿔놓았음에도, 이란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들 중 하나다. 이슬람은 여전히 제도상으로 잔존하고 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근대성이, 더 이상 서구화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현대의 이란사회의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6) 이슬람 정치를 40년간 경험한 이란은 이제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 하고 있다. ‘아랍의 봄’ 이후 이란의 주변국들이 이슬람의 틀 안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찾고 있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이란의 경우가 특수한 이유는 이란에는 정부의 오랜 노력 덕택에 중산층이 많고 또 다양하게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왕정 몰락 이후, 대부분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이라크-이란 전쟁에 군 간부, 혁명수비대, 민병대원 수백만 명이 동원되면서 교외와 시골의 소도시에서 사회계층 간 이동이 활발해진 것이 그 원인이다. 전쟁이 끝나고 금전적·사회적·정치적 혜택을 얻게 된 퇴역 군인들은 중산층에 진입하거나, 혹은 공교육과 고등 교육의 대중화에 힘입어 엘리트층에까지 진출했다. 자신의 뿌리인 이슬람과의 연결고리는 놓지 않으면서, 이 신흥 중산층은 바깥 세계를 탐험하고 또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2009년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 반대 시위의 주역이었던, 대도시에 거주하는 소수의 ‘서구화된’ 부르주아 계층에게만 서구 대형 언론사들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2018년 1월 이란의 소도시들을 중심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로 인해 오랫동안 언론의 관심 밖에 있었던 이 신흥 중산층들도 주목을 받게 됐다.
2018년 시위는 이란 사회를 속속들이 변화시켰다. 이란 혁명과 이라크-이란 전쟁을 경험한 이들은 이제 모두 60세를 넘겼다. 그들은 개방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가 핵 협상을 받아들인 후에 언급했듯이, 무분별한 개방과 이란 정부의 권력을 약화할 위험이 있는 개방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저항’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자손세대는 이란 공화국의 문화권 안에 있고, 사회적 통제는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에서 더 심하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덕에 이란 인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25~40세 연령층의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보다 외부 세계를 더 잘 알고 있으며, 사회적·경제적 정의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돼 있기도 한 사회 지배층의 권력, 방식, 부정부패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체제 전복보다, 그들에게는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개방에의 열망, 장벽을 뛰어넘을까
경제발전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은 두 개의 장벽과 충돌한다. 그 첫 번째는 모든 국제적 교류를 가로막는 것으로, 금융과 은행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부패한 경제 엘리트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는 점이다. 핵 협상을 유지하고 경제제재 해제를 통해 경제성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세력들 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보수파들까지 만족시켜야하는 로하니 대통령에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미해결 과제였다. 그러나 최근 신흥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일으킨 대규모 시위로, 이란 사회의 권력관계는 뒤바뀌었다. 그리고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이들 간에 논쟁이 뜨겁다.
이란의 경제발전의 두 번째 장벽은 다름 아닌 미국이다. 트럼프가 핵 협상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한 것은 아니다. 트럼프는 1월 중순 이란에 대한 제재면제 조치를 연장하기로 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았다. 미 의회는 UN과 EU의 승인 없이 이란의 인권과 ‘테러(예를 들어, 헤즈볼라 지원)’를 문제 삼아 다른 종류의 제재를 유지하고 강화했다. 국제법 위반임에도, 미국은 자국에 지분이 있는 유럽기업들이 이란에 투자하고 이란과 교류하는 것까지 금지시켰다. 이는 이란과 서방국가들 간의 무역 관계가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란 국민들의 민심까지 동요시키고 있다. 이란이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고,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미국이 이란을 제재하는 주된 이유이기 때문에, 혁명과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수니파 국가 내 소수 시아파 세력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그만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런 정책 변화를 주도할 능력이 있는 세력이나 책임자는 아직 없다. 올리비에 로이가 예견했듯, 이슬람은 정치에서 점차 배제되고 있다.(7) 이란 국민들은 여전히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지만 이제 그들은 어엿한 공화국 국민이다. 중산층의 다양한 집단들, 특히 혁명정신, 저항정신,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개방을 지지하고 있다.
시아파나 과격파 헤즈볼라가 이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란이 지난 40년 동안 겪어온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란이 중동의 맹주로 급부상하면서 중동지역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이란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이란 고유의 매력, 여성의 사회진출, 경제발전력, 예술가 및 영화인들의 영향력 등의 이유가 크다. 이란 정부는 여전히 독재체제다. 그리고 이란 내부의 정치적 분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란의 전설이나 신화보다, 지하디스트 소탕 문제처럼 실질적인 현안들과 이란 사회의 역동성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
독립, 자유, 공화국 설립에의 열망이 담긴 이슬람 혁명 정신은 1980년대 초까지는 이란 국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국제사회 개방을 향한 이란 국민들의 강력한 의지와 역동성이, 이란이 역사상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등의 주변 ‘공화국’들에도 전파되고 있다. 다만 오만과 요르단의 경우 이란이 단 한 번도 지배한 적이 없는 왕정국가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오늘날 이란, 정확하게는 이란 국민들은 이슬람 국가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중동지역 내의 영향 네트워크를 재정비하는 동시에 경제, 산업, 문화 강국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대립 구도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두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1975년 독일과 소련이 맺었던 헬싱키 협약과 같은 불가침 조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중동 지역의 안보를 보장하는 두 축으로, 페르시아만의 석유와 가스 수출을 안정화하고 중동 국가 국민들의 열망을 충족해줄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글·베르나르 우르카드 Bernard Hourcade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CNRS) 명예 연구부장, 이란 연구부, 파리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Cf. Xavier de Planhol, 『Les Nations du Prophète. Manuel géographique de politique musulmane(예언자의 나라. 이슬람 정치에 관한 지리학적 개론서)』, Fayard, Paris, 1993.
(2) Bernard Hourcade, 『Nationalism and the Islamic Republic』, Meir Litvak(지도), Constructing Nationalism in Iran: from the Qajars to the Islamic Republic, Routledge, Abingdon, 2017.
(3) Philippe Descamps & Cécile Marin, 『Une mollahrchie constitutionnelle(입헌 물라(Mullah, 시아 이슬람의 성직자)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5월호.
(4) Houchang Chehabi & Hassan Mneimneh(지도), Distant Relations : 『Iran and Lebanon in the Last 500 Years』, I.B. Tauris, London, 2006.
(5) Laurence Louër, 『Sunnites et chiites. Histoire politique d’une discorde(수니파와 시아파. 불화의 정치사)』, Seuil, Paris, 2017.
(6) Amélie Myriam Chelly, 『Iran, autopsie du chiisme politique(이란. 정치적 시아파의 분석)』, Le Cerf, Paris, 2017.
(7) Olivier Roy, 『L’Échec de l’islam politique(정치적 이슬람교의 실패)』, Seuil, 1992.